80년대 속칭 고스톱이라는 화투놀이가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3명만 모이면 고스톱을 쳤다. 식당에서도, 상갓집에서도, 버스터미널에서도, 국제공항에서도 심지어 학교 교무실에서도 잠시 시간만 나면 자리를 펴고 고스톱판을 벌렸다.
이즈음 '국보위 고스톱'이라는 룰이 있었다. 선을 잡은 사람이 선수를 지정한다. 너는 치고, 너는 죽고, 너는 광 팔아라. 선이 순서도 없고 원칙도 없이 마음대로 화투 칠 사람을 정한다. 만만한 사람을 골라서 지정한다. 진행 방법도 기상천외하다. 점수가 나도 '고', '스톱'을 자유의사로 결정하지 못한다. 선을 잡은 사람이 '스톱'하라면 '스톱'해야 되고, '고'하라면 '고'해야 된다. 그러나 반전도 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로 '고'나 '스톱'을 한 사람은 선의 권한을 가지게 된다.
이 시절 '설사', '피박', '일타쌍피'등의 수많은 유행어가 일상생활에도 스며든다. '일타쌍피'는 '고스톱에서 화투짝 한 장을 내고 피 두장을 가져온다 뜻으로, 한 가지 일을 하여 두 가지 이익을 봄을 이르는 말'로 국어사전에도 올라 있다.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권위주의적 독재정권의 만행을 풍자하는 국민 놀이판이었다.
반송. 청남대 주도로 양쪽에 여러 그루 심어져 있다. 80여년 된 것으로 가지가 많아 만지송, 다행송으로도 불린다.
청남대에 왔다. 충북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대청호반에 자리 잡고 있는 청남대는 '따뜻한 남쪽 청와대'란 뜻으로 언제까지나 권력을 누릴 것으로 생각한 권위주의적 독재국가 시절인 1983년에 만들어진 대통령 공식 별장이다.
대통령 기념관에 들어간다. 역대 대통령의 선거 포스터가 게시되어 있다.
해방 후 남북이 함께하는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열망하는 국민의 바람과는 달리 남한 단독정부의 대통령이 된 이승만. 남북 분단의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외치다가 한국전쟁이 나자, 한강 다리를 끊고 남으로 도망친다.
보리고개로 국민들이 굶주리자, '빵도 먹고 사과도 먹지, 왜 쌀과 보리만 먹냐'라고 말한 무지에 미국 정치학 박사의 권위는 의심을 받는다. 이승만은 국민의 심판을 받고 망명한다.
학생들의 피로 지킨 민주주의의 틀을 탱크를 앞세워 무너뜨린 박정희. 초등학교 교사를 하다가 만주군관학교,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 벌판에서 독립군을 토벌하던 박정희는 일본이 패망하자 광복군의 깃발 아래 귀국한다. 그런 그는 해방 공간에 국군 장교가 되어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는다. 삼선개헌, 유신헌법을 통해 영구집권을 꿈꾼다. 하지만 영원한 권력은 없는 법, 폭압적 권력을 휘두르며 인권을 탄압하던 박정희의 절대적 권위도 심복의 총탄에 허무하게 무너진다.
박정희 군사쿠데타를 인정하고 하야하여, 뒷날 반정부 운동에 앞장서는 뒷북을 쳤던 내각책임제 국가수반 윤보선. 박정희가 죽은 후 체육관 대통령이 되었다가, 군부를 장악하여 실권자로 행세하던 전두환에게 권좌를 물려주고 12.12 쿠데타의 진실을 끝까지 밝히지 않았던 최규하. 둘은 왠지 선거 포스터가 없다.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스스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야당도 마음대로 정하고, 정치인도 마음대로 묶고 풀고, 기업도 마음대로 죽이고 살리고, 눈에 거슬리면 마음대로 삼청교육대에 감금하여 혹독한 폭행을 가하고 한마디로 '국보위 고스톱'과 같이 나라를 주물렀다. 하지만 나라 전체가 감옥 같은 철권정치도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국민의 저항에 직선제를 수용한다. 국보위 고스톱은 선(권력)을 잡은 사람이 마음대로 한다. 노태우 뒤에서 상왕 정치하려던 계획은 무위로 돌아간다. 선 잡은 사람이 마음대로니까. 결국 5공 청문회가 열리고 백담사로 유배 간다.
12.12 쿠데타의 주역이면서 6월 항쟁으로 국민들이 쟁취한 대통령 직선제에서 당선된 첫 직선 대통령 노태우. 민주 진영의 분열로 대권은 잡았지만 여소야대의 허약한 정부를 '이 사람 노태우 믿어 주세요'하면서 몸을 한껏 낮추는 제스처로 난국을 헤쳐 나가려 한다. 물태우로 조롱받던 노태우는 3당 합당으로 권위주의적인 정권으로 회귀한다. 거대 여당이 된 노태우는 전두환과 다를 바 없는 독재를 자행하여 학생들의 분신자살이 이어진다. 본인은 입을 다물었지만 그의 아들이 지속적으로 노태우의 과거 행적에 대하여 사과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 전두환과는 다소 다른 평가를 받는다.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며 민주화 투쟁의 선봉에 섰던 김영삼은 '호랑이 잡으려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며 신ㆍ구 쿠데타 세력과 3당 합당한다. 소수파지만 민주화 운동을 한 권위로 거대 여당의 후보가 되어 권력의 정상에 오른다. 김영삼의 권위는 '전두환, 노태우의 사법처리', '하나회 해체', '금융실명제 실시' 등으로 국민들의 환호를 받는다. 그러나 임기 말기에 IMF사태로 경제 위기를 맞아 인기가 추락한다. 자당 대선 후보가 '대통령 허수아비'를 만들어 매질하는 수모를 겪으며 권위에 손상을 입는다.
국민들은 국가부도 사태에 직면한 나라를 구할 수 있는 '권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재벌을 위시한 기득권 세력과 노동자를 함께 설득할 수 있는 리더십을 원했다. 그러한 권위를 가진 사람으로 김대중을 선택한다. 오랜 세월 권위적인 권력으로부터 탄압을 받으며 죽을 고비를 몇 차례 넘긴 민주화 투사로 굳어진 권위가 국민들로부터 IMF 경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인물로 신뢰받게 했다. 조기에 IMF 경제위기를 졸업하고 정치보복의 고리도 끊지만, 그의 권위도 각종 측근 비리로 정권 말기에 어려움을 겪는다.
돌탑. '대청호와 청남대를 주민의 품에 돌려주신 노무현 대통령께 문의 주민 5천8백명이 돌 한개씩 모아 고마운 마음을 탑으로 쌓아 드립니다'는 글이 새겨져 있다.
소수 정당, 소수 계파의 노무현이 '새로운 대한민국'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고자 꿈을 꾼다. 대통령에 취임하자 '탈권위'를 주장하면서 모든 기득권을 스스로 내려놓는다.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 민주주의 보루'라며 참여정부를 연다. 검찰권 독립으로 권력을 사유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실천한다. 그리고 국가 전반의 권위주의적 요소를 제거하고, 각종 대처 매뉴얼을 만든다. 하지만 국가 권위주의에 익숙해 있던 기득권 세력은 반발한다. 평검사가 대통령의 권위에 도전한다. 언론은 (지금은 관행이 되었지만) 대통령을 '노(盧)'라고 기사 제목을 단다.
이 시기에 청남대도 일반인에게 개방된다. 사계에 따라 제 모습을 바꾸는 조경수와 야생화가 자라고 있는 청남대와 함께 철새 도래지인 대청호반도 국민의 품으로 돌아간다.
충푹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대청호반에 자리잡은 청남대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국민의 욕망을 이용하여 권좌에 오른 이명박은 취임 초기부터 '미국산 소고기 파동'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반면 봉하마을에는 관광객이 몰려간다. 위기를 느꼈는지 퇴임한 대통령에게 검찰권으로 수모를 안긴다.
아버지의 권위에 힘입어 대통령이 된 박근혜는 어릴 때부터 보아온 아버지의 통치술을 그대로 답습하려 한다. 예의 신비주의적 리더십으로 국가권위주의의 회복을 꾀한다. 최순실에게는 한없이 작아지던 박근혜는 국정농단에 휘말려 촛불의 심판을 받는다.
탄핵 정국에서 '이게 나라냐'라고 외치던 촛불은 깨끗하고 정직한 이미지의 인권 변호사 문재인을 '적폐 청산'의 적임자로 지목한다. 문재인 정부는 대북정책, K-방역에서 성과를 내고 선진국 대열에 진입한다. 검찰개혁에 총력을 기울이지만 기득권 세력의 끈질긴 저항에 멈칫거린다. 임기가 5개월여 남았는데 대통령 국정지지율이 자신의 당선 득표율에서 조금 빠진 40%대를 오르내린다. 그렇지만 자신이 임명한 자가 등 뒤에 칼을 꽂는데도 인내하고 '문재인 정부 검찰총장'이라며 신뢰를 보낸다. 선출되지 않은 관료 통제에 실패한 '신사 리더십'에 갑갑해하는 지지자들도 생겨난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후 당선된 7명의 대통령, 국민들은 다음에 어떤 권위를 선택하런지.
전대미문의 코로나19 팬데믹에 전 세계가 고통받고 있다. 팬데믹 이후의 경제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할 리더십이 시대정신으로 부각되고 있다. 대선이 80여 일 앞으로 다가왔다. 국민은 강력한 대통령의 권위를 요구하고 있다. 그래서 여야 모두 '권위'의 리더십을 가진 후보를 선택했다. 그러나 '강력한 추진력으로 상징되는 권위'와 '국가 권위주의의 회귀'로 '권위'의 결은 다르다. 내년 3월 9일 어떤 결과가 나올지 사뭇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