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길 마지막 여정은 제주 해녀 항일운동 기념공원에서 구좌읍의 앞바다를 바라보며 시작한다. 제주 정신의 표상인 해녀의 삶과 문화를 생각한다. 전반부는마을과 밭길을 걷는 마을길이, 후반부는 바닷길과 오름길이 차례로 나타난다. 동부 제주도의 자연을 고르게 체험하는 길이다.
제주 해녀
물질하는 여성을 잠수(潛嫂), 잠녀(潛女)라 하였던 것이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해녀라는 말로 바뀌었다. 원래는 잠길 잠(潛), 형수 수(嫂 ) 자를 써서 존칭의 의미가 들어 있었다.
물질을 나잠업(裸潛業)이라하고 남자도 물질을 하였다고 한다. 남자는 포작(鮑作)이라 하여 전복을 잡고, 여자는 잠녀(潛女) 또는 잠수(潛嫂)라고 하여 해조류를 채취했다. 그러다가 언제부턴가 남자가 뱃일과 수군에 동원되어 일손이 부족하고, 나라의 공물 독촉에 전복 따는 어려운 일도 해녀의 몫이 되었다.
김녕리 해녀들
여자 아이들은 7~8세가 되면 물질을 배우기 시작한다. 제주의 여성들은 새벽부터 물 긷는 허벅을 지고 하루 일을 시작하여 집안일, 밭일, 또 물 때에 맞취 나가는물질까지 한시도 쉬질 못 했다.
근대사회로 들어서면서 공물을 바치는 노역에서 잠시 해방되는 듯하다가 다시 일제의 가혹한 수탈에 신음하게 된다. 이러한 배경에서 해녀의 생존권 투쟁이 일어난다.
제주 해녀 항일운동 기념공원
구좌읍 상도리와 하도리의 경계에 제주해녀 항일운동 기념공원이 있다. 이곳 연두망 동산은 1932년 1월 12일 구좌, 우도, 성산의 해녀 1,000여 명이 모여 시위를 시작한 장소다. 올레21길은 제주 해녀 항일 유적지에서 시작된다.
해녀 항일운동.
1932년 구좌, 우도, 성산면의 해녀들은 일본인 도사(島司)의 부당한 해산물 수매 가격에 항의하여 쟁의를 일으킨다. 연두망 동산에서 세화 5일장까지 호미와 빗장을 들고 만세를 부르며 나아갔다. 일제의 식민지 약탈 정책과 민족적 차별에 항거한다. 총 238회에 걸쳐 연인원 17,000여 명이 참가한 국내 최대 규모의 여성 항일운동으로 발전한다.
부춘화 해녀, 김옥련 해녀, 부덕량 해녀의 흉상
해녀 공동체의 단결력과 송고한 저항정신을 제주의 정신으로 기리기 위해 2차 봉기의 집결지였던 이곳 연두망 동산에 기념 공원을 마련하고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탑을 세웠다. 기념탑 옆에는 해녀 항일운동을 주도했던 부춘화 해녀, 김옥련 해녀, 부덕량 해녀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해녀박물관에 전시된 포장과 포장증(복제품)
또 해녀 항일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애국지사 강관순의 시비 '해녀의 노래'가 자리를 함께 한다. 해녀들의 공을 알리고, 명예회복을 위하여 노력한 김진근 제주해녀 항일운동 기념사업위원장의 공로비도 함께 있다.
강관순의 시비 '해녀의 노래'
해녀박물관
기념공원에는 제주 해녀의 문화와 역사를 기록해 놓은 해녀박물관이 있다.해녀의 삶과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어촌마을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올레를 걷다가 처마 밑에 걸려 있는 테왁망사리를 종종 볼 수 있다.
테왁망사리
불턱은 해녀들이 옷을 갈아입고 바다로 들어갈 준비를 하는 곳이며 작업 중 휴식하는 장소이다. 돌담을 둥글게 에위싸고 가운데 불을 지펴 몸을 덥힌다. 이 곳에서 물질에 대한 지식과 요령, 정보와 기술을 전수하고 습득하며 해녀 간 서로 협동하는 공간이다.
해녀 박물관에 재현해 놓은 불턱
해녀가 물질을 할 때 입는 웃을 '물옷이라 한다. 재현 불턱의 광경을 보면 해녀들이 입고 있는 물옷이 지금과 다르다. 옛 물옷은 물소중이'(하의) '물적삼'(상의), 머리카락을 정돈하는 '물수건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물적삼과 물수건(상), 소중이(하)
1970년대 들면서 해녀들의 물옷은 고무옷(잠수복)으로 개량되었다. 잠수복을 입고 물칼퀴을 신고 작업을 하면서부터 작업 능률은 크게 올랐으나, 잠수병의 부작용도 나타나고 있다.
잠수복(좌), 테왁망사리(우)
테왁은 부력을 이용한 작업도구다. 물속의 해녀가 그위에 가슴을 얹고 작업장으로 이동하거나 물에 띄워 숨을 고를때 사용한다. 테왁에는 망사리가 부착되어 있어 그곳에 채취한 해산물을 넣어둔다.
해녀항일운동 관련자료, 해녀공동체 관련자료 등이 전시되어 있다.
해녀항일운동 관련 형사피의자 색인부
박물관에서 전시해 놓은 작업선 뒤의 언덕으로 들어서니 조그마한 정자가 보인다. 하얀 꽃이 소복이 피어 있는 사상자가 언덕을 뒤덮고 있다. 먹거리가 부족하던 때에는 어린순을 따서 나물을 무쳐 먹기도 했던 미나리과의 두해살이풀이다.
하얀 꽃이 소복이 피어 있는 사상자가 언덕을 뒤덮고 있다.
언덕을 내려서면 축구장이 있다. 아이가 세발자전거를 타고 있다. 아내는 손녀 생각이 나는지 아이에게 말을 건다.
"자전거 잘 타네, 몇 살이니?"
면수동 밭담길
면수동 마을로 들어간다. 면수동(面水洞)의 옛 이름은 낯물마을이다. 제주스러운 이름의 낯물마을은 돌담길이 예쁘다. 허튼층쌓기한 돌담으로 경계가 지어진 길가에 태양국, 구절초가 피어 있다. 전형적인 제주 농촌 마을 풍경이다.
아내는 깜찍하게 꾸민 펜션 울타리 밑에 쪼그리고 앉아 송엽국을 접사 촬영한다.
제주스러운 이름의 낯물마을은 돌담길이 예쁘다.
제주 밭담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낮은 밭담이다. 허술하게 아무렇게나 쌓은 돌담 같지만 허튼층쌓기한 돌담은 강한 바람에도 허물어지지 않는다. 옛사람들의 지혜가 묻어난다. 돌과 돌 사이로 바람이 빠져나간다.
허튼층쌓기한 돌담은 강한 바람에도 허물어지지 않는다.
제주 밭담의 총길이는 2만㎞로 지구 둘레의 반 바퀴가 넘는다. 밭담은 밭과 밭 사이의 경계를 지어 주고, 짐승들의 침입을 막아주는 담장 본래의 목적만 있는 게 아니다. 제주는 바람이 많은 곳이다. 강한 바람으로 인한 토양과 씨앗의 유실을 막아주고 농작물을 보호한다. 고려 고종 때부터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제주 밭담은 이러한 역사성과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4년 4월 FAO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제주 밭담은 역사성과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FAO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낯물밭담길. 면수동에 있는 밭길의 이름이다. 동네를 벗어나 밭길을 걷는다. 경운기 바퀴가 지나간 길은 맨 땅이 드러나 있고 가운데로 잔디가 나 있다. 길 가장자리로 아기달맞이꽃이 앙증맞게 존재감을 표시한다.
낯물밭담길
무, 당근, 감자, 양파, 마늘, 보리농사를 많이 한다. 특히 전국 당근 물량의 약 70%를 이곳에서 생산한다. 당도가 높고 맛과 향이 좋고, 유기물 함량이 풍부하여 최고의 품질로 인정받는다.
길 모랭이를 돌아서니 장다리에 핀 무꽃이 바람에 하늘하늘 흔들린다. 하얀 새끼손톱만 한 꽃잎이 점점 연분홍색으로 물들어간다.
장다리밭의 무꽃이 바람에 하늘하늘 흔들린다.
유채 명소가 된 별방진
바다 쪽으로는 해녀들이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내뿜는 숨비소리가 들리고, 밭담길 쪽으로는 무꽃이 바람을 맞아 휘휘 소리가 들리는 숨비소리길 끝머리에 높은 돌담이 길을 막는다.
별방진. 별방포구 앞, 해맞이해안로 도로변에 조선 중기 제주 목사 장림이 구축한 성곽이 있다. 별방진이 있던 곳이다. 성 안에는 진사, 객사, 공수, 사령방, 군기고, 대변청, 별창을 갖춘 제주 동부의 가장 큰 진성이었다. 동, 서, 남문이 있었다.
별방진
하도리의 옛 지명이 별방이다. 지금은 성안에 민가가 빼곡히 들어서 있어 옛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타원형 성곽의 둘레 1km 안에는 유채가 심겨 있어 유채꽃 명소로 더 알려져 있다. 유채꽃이 만발했던 밭은 다음 해를 기다린다.
타원형 성곽의 둘레 1km 안에는 유채가 심겨 있어 유채꽃 명소로 더 알려져 있다.
서문동 우물. 서문리는 별방의 서문 안에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의 일곱 동네에서 가장 오래된 서문동 우물이남아 있어 옛 별방진의 규모를 가늠케 한다.
서문동 우물
고이화 해녀 생가. 제주 해녀 항일운동을 하고, 지역별 해녀 명창과 해녀들이 물질하면서 부르던 해녀 노래를 소개한 고이화 해녀 생가를 들여다본다. 4.3 때는 전 가족이 화를 당하는 비극을 겪으면서 제주 최고령 해녀로 활동하였다고 한다. 집 규모가 꽤 크다. 경제적으로는 넉넉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