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는 남자들의 옷에서 좋은 향이 난다. 어머니가 입혀준 냄새. 그런 옷을 입고도 여자를 죽일 듯이 미워한다. 혐오는 이미 옷에 배어있는 냄새만큼이나 깊숙이 존재한다. 고작 냄새 하나에도 혐오가 있다.
개중에 몇 명이나 본인이 세탁해 입었을까? 살면서 세탁기를 얼마나 돌려봤을까, 화장실 청소는 해봤을까?
친구들과 ‘니애미’, ‘엠창(엄마 창녀)’와 같이 저급한 단어로 웃으며 놀던 남자들이 군대만 가면 이등병의 편지를 부르며 엄마가 보고 싶다며 울먹인다.
보고 싶어 하는 이유는 본인이 해야할 것들이 많아져서다. 누군가 해주지 않는다. 당연하단 생각조차 하지 않은 엄마가 해주는 밥이라던가. 그들에게 ‘어머니의 품’이란 그런 것이다. 식모와 다름없는 이유다.
남자들이 만든 ‘엄마’는 그들이 결혼을 하는 순간 또 다른 ‘밥 잘 차려주는 엄마’를 만들어낸다. 혹은 어머니의 가득했던 사랑이 “우리 엄만 이렇게 해줬는데 니가 감히 뭔데 안하냐?”로 변질된다. 정상적인 사랑의 형태가 아니다. 어떻게 사랑이 폭력이 될 수가 있나.
최근 트로트가 한창 붐이다. 본인 어머닌 누굴 좋아하는지 아냐고 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