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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성적인 회사원 Mar 31. 2023

[6] 나의 '직장 내 괴롭힘' 신고 문서

직장 내 괴롭힘 1차 신고 문서를 공개한다.

나의 신고 문서를 공개한다.



있는 그대로 공개는 못하고, 조금 수정을 하였다. 회사이름이나 사람이름이 나오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그대로 공개하였다. 이전에도 말했지만 신고 문서를 이렇게 작성하면은 안된다. 이것은 나를 도와달라고 감정에 호소하는 호소글이지, 신고 문서의 형식은 띄지 않는다.



신고 문서는 발생한 사건에 대해서 날짜, 상황설명(6하원칙), 목격자, 증거유무로 작성해야 한다. 내 생각에는 호소문과 신고 문서를 같이 쓰는 방법이 가장 좋은 것 같다.



그래도 이 신고 문서는 신고의 가장 큰 핵심이 있다. 사장님께 호소 메일을 보냈기 때문에, 사장님이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제대로 조사해서 보고해!'라고 말씀을 해주셨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졌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의 직장 내 괴롭힘 조사는 다른 피해자들처럼 흐지부지 되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이게 의아할 수도 있는데, 직장 내 괴롭힘 조사는 회사에서 하는 것이 원칙이라 대부분 회사 마음대로 진행한다. 그래서 회사의 입김이 정말 크게 작용한다. 직장내 괴롭힘에 대해 고용노동부가 만든 정해진 매뉴얼이 있으나, 이건 매뉴얼일 뿐 법은 아니다. 실제로 상담을 하다보면 회사가 조사를 흐지부지하면서, 사건을 덮으려고 하여 최대 3개월 까지 걸리는 것도 보았다. 



피해자를 지키기 위한 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아는 이유는 내가 개인적으로 '오픈 카카오톡방'을 운영하기 때문이다. 정보가 없어서 힘들어하시는 분들이 연락을 준다. 나는 피해자들이 고통받은 정말 많은 이야기들을 알고 있다.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한 고통뿐만 아니라, 용기 내어 신고를 했지만 그 후 발생하는 고통까지 말이다.



나는 운이 좋았다. 정말... 내가 운이 좋다는 표현을 하는 게 적절한가 모르겠는데, 하... 이런 말을 하는 상황 자체에 헛웃음밖에 안 나온다. 죽을뻔한 사고를 겪었지만 운이 좋았다고 말을 하는 나도 참 이상하다. 하지만 나는 다른 피해자분들에 비하면 정말 운이 좋은 것이었다. 일단 조사는 제대로 진행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내 신고 문서를 공개해 보겠다. 나중에 신고할 때, 이 문서를 사용하는 것도 좋다. 신고 문서 따로 감정에 호소하는 문서 따로 이렇게 말이다.


─────────────────────────────────


안녕하세요, ㅇㅇㅇ입니다. 


업무 도중 갑자기 쓰러져 심려를 끼쳐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걱정해 주신 임원 분들께 당시 발생한 일과, 재발을 방지하기 위하여 제가 스스로 느낀 점을 글로써 적어 메일 드립니다. 



미주신경성 실신이란?


극심한 '신체적 또는 정신적 긴장'으로 인해 혈관이 확장되고, 심장 박동이 느려져 혈압이 낮아지는 현상입니다. '기립성 저혈압'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급격히 낮아진 혈압 때문에 뇌로 가는 혈류량이 감소하여 일시적으로 의식을 잃는 것을 말합니다. 질병이라기보다는 증상에 가깝고, 대부분 저절로 회복되기 때문에 특별한 치료가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2022년 2월 8일 오후 2시경, 저의 자리에서 잠시 일어났는데, 뒷목이 긴장되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었습니다. 옆에 있던 '안대리'에게 물어보니 제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대로 쓰러졌고, 바닥에 '쿵' 하고 머리를 박았다고 하더군요. 



약 10초간 바닥에서 정신을 잃었다고 합니다. 살면서 이런 적은 처음이고, 상황이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깨어난 후 그대로 안대리, 조 과장과 함께 세 명이서 앰뷸런스를 타고, 대형 병원 응급실로 이송되었습니다.

뇌 또는 심장에 이상이 있을 수 있다고 하여 다음과 같은 검사를 진행하였습니다.


CT

X-RAY

심전도 검사

혈압 검사

피검사



다행히 모든 수치가 정상적으로 나왔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미주신경성 실신에 대한 원인은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어요"

"환자분은 모든 수치가 정상이세요. 컨디션이 좋지 않으셨던 것 같아요"



요즘 사실 컨디션이 좋지는 않았습니다. 불면증도 있었고, 계속해서 뒷 목이 긴장되고 뻐근하여 스트레칭을 자주 했습니다. 이번에는 운이 좋아 큰 사고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이 사고로 죽거나 크게 다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재발을 방지하기 위하여, 저의 컨디션이 안 좋은 이유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미주신경성 실신의 원인으로는 극심한 '신체적 긴장' 혹은 '정신적 긴장'입니다. 신체적으로 모든 수치가 정상이므로, 이번 사고는 정신적 긴장으로 원인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일단 회사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는 아닙니다. 저는 작년 6월 부서이동을 하여 현재 부서로 왔습니다. 오고 나서 가장 놀랐웠던 것은 당시 팀장님이 만드신 수평적인 구조와 분위기였습니다. 자유로운 발언과 주장을 할 수 있는 분위기였습니다. 이상적인 조직 문화에 대해 저는 매우 만족하면서 즐겁게 근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제가 갑자기 쓰러진 이유가 늘 심리적으로 긴장이 된 상태고, 이에 따라 몸이 긴장이 되어 원활한 신진대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미주신경성실신으로 쓰러졌다고 가정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불면증, 우울, 불안 증세로 인하여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의심되어 정신과 진료를 받았고, 항우울제 및 안정제를 처방받았습니다. 상담을 받고 이야기를 하던 도중, 심리적 긴장 상태라는 말에 생각이 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직장에서 저를 '구타유발자'라고 부르며 몇 달 동안이나 함부로 대하는 사람입니다. 사건이 발생한 오늘 오전에도 제 자리로 와서 



"네가 한 발언 때문에 앞으로 회의에 참석하지 않겠다"

"너로 인하여 내 안 좋은 기억들이 떠오른다"

(정확히 이 말은 아닙니다. 간략히 적었습니다) 



저 때문에 회의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말이 당시에 굉장히 '위협적'으로 들렸습니다.  이후부터 극심한 신체적 긴장감이 시작된 것 같습니다. 



이 발언이 너무 걱정되어서 바로 같은 부서에서 오래 근무한 '안대리' 에게 상황 설명 후, 너무 걱정된다고 상담을 받았습니다. (안대리는 나이는 저보다 어리지만 일처리 및 상황판단이 빠르고, 말을 조리 있게 잘하여 제가 존경하고 의지하는 직원입니다.)



몇 달간 이어진, 이 '사람'의 위협과 폭언 그리고 폭행을 피하기 위하여 지속적인 긴장감 속에 회사 생활을 한 것이 쌓이다가 이번에 터진 것 같습니다. (폭행은 11월경에 한 번 발생, 저를 때리고 나서 깜짝 놀라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사람이 매사 긴장 속에서 살아가는 게 얼마나 불안하고, 초조하고, 위축되고 심리적으로 압박이 되는지 이번에 몸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정신적으로 힘들 때마다 저는 항상 속으로 삭였습니다.



'괜찮아'

'부서이동 한지 얼마 안 됐는데, 분란 일으키지 말고 잘 참자'

'괜찮아.... ㅇㅇ아...' 



그런데 그동안 이해가 안 되는 상황들을 계속해서 받아들이다 보니 제가 이렇게 망가져 있었네요.  저도 몰랐습니다. 억지로 웃어넘겨왔던 상황들에 의해서 제가 버티지 못할 정도로 병들어 있었다는 것을.



사실 아직도 무섭습니다. 제가 의식을 잃고 쓰러졌을 때, 바로 바닥에 떨어진 것이 아니라, 양 옆에 바로 있는 책상 모서리에 눈이나 머리가 부딪혔으면..... 상상도 할 수가 없습니다. 제 가족, 지인, 연인 등 저와 관계된 인생이 한 번에 다 무너지는 게 돼버리니까요. 



그동안 반 평생 노력한 공부와 경쟁을 통해 이룬 ■■에서의 회사생활이 과연 맞는가 의심이 되기도 합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이토록 치열하게 살아왔나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아직도 너무 무서워서 눈물이 흐릅니다. 그리고 돌연 분노가 차올랐습니다. (신경이 많이 예민해진 상태입니다.)



저를 구타유발자라고 부르며 함부로 대하는 이 '사람'은 그동안 동일한 문제로 인사과에 '2번'이나 다녀온 사람이라고 들었습니다. 이 '사람'은 "뭐 인사과 한번 더 가지"라고 말하면서 마음에 안 들면 사람이 많은 장소에서도 욕설을 남발합니다. 



인사과에 대해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기분 상하시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처벌이 얼마나 약했으면 "인사과 한번 더 가지"라고 말하면서 함부로 행동하지?' 

'왜 인사과에서는 적합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것이지?'

'동일 전과자 2범을 사회에 다시 풀어놓고, 동일 사건이 다시 발생한 것 아닌가?' 

'왜 내가 큰 사고를 당할뻔한 피해자가 되어야 하는 건가. 정말 너무 억울하다'



제가 이렇게 적는 이유는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리고 저를 비롯한 사내 또 다른 '피해자'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과거 두 사람을 포함하여, 저까지 세 사람, 그리고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길까 하는 불안한 마음도 큽니다. 



그리고, 이번 일을 계기로 저를 스스로를 돌아보았습니다. 



내성적인 성격으로, 불합리한 상황에서 상대의 기분이 상하게 하면 안 된다는 '강박' 같은 게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불합리한 상황에서 짜증, 분노, 불안감 등 '부정적인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오히려 반대로 웃어넘겨 버렸습니다. 이게 그 '사람'과 지속되었고, 스트레스로 쌓여서 터져 이번 사고가 발생한 것 같습니다.



저 또한,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위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적절한 언어로 표현하는 연습을 해야겠습니다. 



내성적인 성격을 가지고 열심히 회사 생활을 하려는 임직원을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다시 한번 심려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바쁘신 와중에도 관심 갖고,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여기까지가 내 1차 신고 문서이다. 조금 더 설명을 해보자면,



가해자가 누군지도 명확하게 작성하지 않았고,

어떤 피해를 받았는지도 나와있지 않고, 

증거는 어떤 게 있는지도 모르고, 



나의 '주장'만 있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작성한 신고서이다. 



사실 처음에는 내 억울한 감정에 대해서만 작성을 하였다. A4 용지 5장은 나오더라. 다 쓰고 다시 읽어보니 '저 정말 억울해요, 저 사람 혼내주세요. 저 너무 힘들어요' 하는 글이었다. 나는 만족스러웠으나, 상대방 입장에서는 만족스럽지 않을 것 같았다. 왜냐하면 상대방의 이득이 없기 때문이다.



허브코웬의 협상의 법칙에서 보면, 나의 의견에 상대방이 얻을 수 있는 이득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하였다. 



처음 쓴 글에서는 상대방의 이득이 없었다. 책을 보면서 수정을 거듭해 나갔다. 결국 나의 억울함을 토해내는 이야기를 줄이고, 또 다른 피해자를 막기 위해서라는 이야기를 추가하였다. 이 사람을 가만히 두면 직원들이 힘들어하는 느낌으로 말이다. 실제로 내가 3번째 피해자 이기도 하다. 회사의 이득을 제시한 것이다.




앞서서 신고메일을 '제발 도와주세요'라는 어조로 최대한 공손하게 작성했다고 하였는데, 혹시나 궁금하였다면 그 궁금증이 풀렸으면 좋겠다. 




막상 고민하던 것을 하고 나니 마음은 개운하였다. 



이제는 어떻게 되려나 하는 불안함이 있긴 하였는데 개운함에 비하여 크지는 않았다. 행동하지 못하는 두려움과, 행동할 수 있는 용기는 정말 종이 한 장 차이 같다. 그 순간의 마음가짐의 차이라고 할까나. 약을 먹고 행동한 내가 용기라는 표현을 쓰기에는 애매한 것 같기도 하고... 내 등을 밀어준 약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이 날은 수면제를 먹고 마음 편안하게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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