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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세인 Jan 23. 2024

대학이 인생을 결정할까

세 번째 반항

인 서울, 투 더 스카이

난 재수를 했다.

그땐 자주 '공부자극영상'을 찾아봤다.

인터넷 강의 중간중간 선생님들이 '공부자극'을 주기 위해 하는 말도 메모해 두고 책상에 붙여뒀다.


'지금 1년이 남은 평생을 결정한다.'

'지금 흘린 침은 나중에 흘릴 피눈물이다.'


사실, 고등학교 3년 동안 지겹도록 들었던 말이지만 더 혹독해져야 된단 생각에 주문처럼 외웠다.

재수가 끝나고 결국 원하던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면서 난 정말 위태로웠다. 이제 내 인생은 끝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더 살고 싶지 않아 졌다.


내가 나를 돕기 위해 했던 말이 그리고 남들이 날 돕기 위해 했던 말이 결국 날 벼랑 끝으로 몰았다.


청소년 행복지수 세계 최하위 국가

자살률 1위 국가

이런 수식어를 볼 때마다 대학에 대한 비정상적인 집착이 비단 나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상처받은 승자

친구들과 얘기하다 보면 이런 말을 많이 듣는다.

"난 죽어라 노력해서 여기 왔으니까 그만큼의 보상을 받아야 해."

어떨 땐 이에 대한 집착이 너무 과해 자기보다 떨어지는 학교에 대한 혐오를 내뱉고 자기보다 높은 학교에 대한 과한 칭찬과 함께 자기 비하를 내뱉는다.


명문대생은 지방대생에게

지방대생은 전문대생에게

대졸은 고졸에게

나보다 노력을 덜 한 사람과 똑같은 취급을 받는 걸 거부한다.

차별은 필요하다 말한다.


그런 학생들을 비난하겠단 말은 절대 아니다.

우리는 12년 동안 학교에서, 사회에서 그렇게 배워왔고

대학 전쟁에서 피땀 흘리며 투쟁했기 때문이다.

지금 사회엔 그 전쟁에서 겨우 살아남은 상처받은 승자와 패자만이 가득하다.

그리고 몇몇 사람에게 쥐어진 대학 간판이라는 트로피는 남을 무찌르는 무기가 되어버렸다.


대학은 나를 설명하지 않는다

이런 사회의 저변에는 능력주의가 깔려있다.

내 성공, 그러니까 내 대학 간판은 내 덕이며, 내가 기울인 노력에 따라 얻은 것이라는 능력주의적 신념이다.

지난 화 '성공한 사람은 이유가 있다.'에서 얘기했듯 과한 능력주의는 과한 오만과 패배감을 낳는다.

대학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은 그 모든 게 오직 내 능력 덕이라는 오만으로 패배한 사람들을 쉽게 무시하고

패배한 사람들은 그 모든 게 내 노력이, 내 능력이 부족한 탓이라는 생각에 무너진다.


생각해 보면 나도 그 생각이 제일 괴로웠다.

난 분명 최선을 다했는데 남들에겐 노력 덜한 사람, 능력이 부족한 사람으로 낙인찍히는 게 억울했다.

결국에는 내가 나서서 내 부족했던 순간들을 끄집어내 끊임없이 날 나무랐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점수가 내 노력과 능력을 다 설명할 수는 없음을.

고작 대학 간판으로 나를 평가할 수 없음을.


대학은 인생을 결정하지 않는다


인생에는 수많은 변수가 있다.

대학 또한 그 수많은 변수 속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변수를 절대로 다 알 수 없다.

  그렇기에 그들이 살아온 인생을, 또 그들이 살아갈 인생을 고작 대학으로 판단할 수 없다.


하지만, 여전히 사회는 대학으로 인생을 판단한다.

 그 속에서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게 나이브하게 느껴지기도, 무책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고등학생이었던 내가, 재수생이었던 내가 진짜듣고 싶었던 말은, 그 아이에게 필요했던 말은 그런 무책임한 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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