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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미영 Sep 29. 2024

나 홀로 블루를 위한 명상

  석 달 넘게 이어진 더위로 인간과 산하가 몸살을 앓았습니다. 이제야 찬바람이 내려 한숨을 돌리게 하는군요. 밖을 향해 왔던 관심의 과녁이 비로소 ‘나’로 되돌아와 조준되는 지금이 헝클어진 자신의 매무새를 다듬는 시기로서 최적이지 아닐까 합니다. 때에 맞춰 ‘명상’ 인구가 늘어난다는 소식도 당도했어요. 참으로 반가운 일입니다. 무한경쟁과 변화의 가속에 내몰린 현대인들의 정신건강에 적신호가 켜질 수밖에 없겠지요. 많은 이들이 치러내는 우울감에 명상만큼 탁월한 치유법도 없으리라 봅니다. ‘명상’하면 가부좌자세와 묵언으로 임하는 특정 종교를 연상하게 될 텐데요. 그러다 보니 사람들 다수가 명상의 이로움을 알면서도 그 종교인이 아니라서 혹은 아직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자신의 처지를 둘러대며 나서지 않는 일도 생깁니다. 단지 종교에 걸렸다면 선택적 판단 아래 명상에 임하는 기독교 문화권 외국인들이 많다는 점을 전하고 싶습니다. ‘명상’이 종교를 떠나 ‘지금 이 자리의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내적 성찰’을 강화시켜주는 매력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낮은 조도의 불빛 아래 안정감이 짙게 깔린 공간. 오직 호흡에만 마음을 둔 존재들이 낮은 자세로서 임했던 그 장소. 명상에 첫 발을 내딛던 관문은 그토록 신선했습니다. 일체감과 몰입의 순간을 온몸으로 체험했으니까요. 방석에 양다리를 편안하게 걸쳐 앉아 들숨과 날숨에만 온전히 마음을 쏟아냈던 시간입니다. 오만가지로 끼어드는 잡념을 철퇴시킬 무기로는 ‘지금 내 마음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마음점검 뿐이죠. 잠시라도 마음이 나태해지면 어김없이 끼어드는 잡념에 예속되지 않도록 문단속에 나서는 겁니다.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압구정역 부근에 위치했던 ‘보리수선원’에서의 명상 열기는 나를 압도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발자국을 내딛자 마치 맑은 숲의 정기가 내 몸을 휘몰아칠 듯한 분위기는 압권이었지요. 입문 당시, 50대 초반을 막 넘긴 내 나이였고 사업은 벌여놨으되 펼칠 미래가 보이지 않았던 암울했던 시절이 걸쳐져 있었습니다.


  ‘홀로’서기로 결심한 이후, 기댈 대상이 없음에 상심할 겨를도 없이 내 자신에게 기대기로 생각의 전환을 꾀한 일. 그것만 해도 상당한 성취였어요. 그로써 야물고 단단해진 나는 내 앞에 전개된 현실을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시기를 거쳐 왔습니다. 온갖 스트레스로 인해 그때 얻게 된 피부병의 그 흔적을 지금도 훈장처럼 달고 살 정도입니다. 오로지 내 삶 한 조각에 강화할 시간은 길어지며 경제적 자립마저 소홀할 수 없던 잡다한 일과 노동에 묻혀 살았던 그때. 천만다행 그 무렵은 전원생활을 이어갔던 10여 년의 세월이 얹혀 자연과 뒹굴었던 경험이 동반됐다는 점이겠지요. 흙 속에 손이 닿자마자 꼬물거리는 생명들을 만난 일. 책을 통해서만 봐왔을법한 생명들의 실물을 직접 대면해 너무 신기했고 즐거움이 따랐습니다. 고된 노동이 수반된 전원생활이었지만 그것이 되레 못된 병으로 이어지지 않을 방책이 되었으리란 추측까지 생겨나는 이유는 뭘까요. 그때 동행하게 된 명상이 내게 행운을 가져다주지 않았을까 싶거든요.


  명상은 ‘지금’ 바로 ‘여기’에 방점을 찍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자는 것입니다. 지금 일에 머물러 충실한 결과를 낳는다면 늘 새로운 순간과 세계를 접하며 자족할 줄 아는 생활인의 면모를 갖출 수 있습니다. 벌어진 현상을 놓고 ‘과거’로 회귀하려거나 예측 불가능한 ‘미래’로 앞지르려 하지 않아 큰 걱정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정신건강에 좋을 수밖에 없으니 불면증도 사라지며 환한 마음을 지니게 되는 겁니다. 지금 내 삶이 그렇기에 드리는 말입니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 꾸준히 이어가는 일은 거저 습득되는 법이 없습니다. 그 이후, 명상에 임하는 내 마음에도 크고 작은 변화가 생겨났습니다. 수행과정에서 불쑥 일어나는 의심과 합리화 또는 게으름으로 들쑥날쑥 수행에 흠집을 내기도 했지요. 그러면서 생활 속에 명상이 몸 안에 체화되기까지 숱한 과정을 거쳤습니다. 오랫동안에 걸친 띄엄띄엄 기간의 명상수행이었을지언정 가랑비에 옷 젖듯 내 안에 차곡차곡 자리 잡아 갔던 겁니다.


  이젠 몸이 늙어 수행 방석에 오래 앉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주로 생활 속에서 마음 챙김에 노력을 기울입니다. 이를테면 대화하면서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내용이 상대에게 바른 말로서 전달이 되기를. 또는 전화를 걸 때 내 입 안에서 나오는 말로 서로가 이해되고 사랑하게 되기를. 때론 보석처럼 상대방의 귀에 아름다운 내 말로 담겨지기를. 지속가능한 언행을 유지하기엔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 번 마음을 기울이다 보면 언젠가는 자리 잡게 되지 않겠어요. 부드러운 말 속에는 천만금과 비길 수 없는 고귀한 결이 담겨 있습니다. 거친 말과 행동이 오가는 세상에서 그런 자세를 취하는 것이 외롭고 시린 일이라고요.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세상에 몇몇 명상수행자들이 그와 같은 외로운 일에 나선다면 살만한 세상으로 조금씩 바뀌어 가지 않을까요. 이것이 나 홀로 블루를 동시에 이겨내는 당당한 일이기도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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