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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미영 Oct 31. 2024

‘느림의 노년기’에서 잠시 벗어나 있으려는 이유

  심심찮은 부음이 정렬해 있는 요즘입니다. 또래의 자연사 소식이 남다르지 않게 다가왔던  그날, 배우 김수미의 죽음도 겹쳐졌습니다. 차례가 임박했음을 암시해 주는 것과 달리 마음은 되레 담담했어요. 얼마 남지 않은 말간 시간들의 급물살을 탈 것으로 보이는 촉진제가 되었을 뿐이니까요. 벌여놓은 일들을 흔들림 없이 마무리하고자 몸만들기 미션에 골몰했습니다. 유통기간을 넘긴 몸이지만 조금 더 사용연장을 늘리고 싶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면서 최우선으로 결정한 그 일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습니다. 


  가까이 위치한 구립 종합체육관에서 헬스PT를 받고 있는 중입니다. 일대일 지도비가 부담되었지만 사설업체 보다 저렴하고 무엇보다 ‘지금’이 적시란 생각에서 큰마음을 냈던 것이죠. 자세가 바르지 않아 생겨난 병력은 근골격계 질환까지 동반하더군요. 개개인이 지닌 이 같은 신체 상태와 생활 패턴 또는 성향에 따라 적합한 지도를 해주는 트레이너를 만났습니다. 개인레슨을 통해 내 몸의 상태를 제대로 인지할 기회가 되며 그에 맞는 지도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은 분명 정확한 자세와 함께 좋은 운동과 습관의 지름길이 되니까요. 이에 방점을 누른 일입니다. 


  총 10회 중 8회를 받은 지금, 효과를 보고 있어요. 불편했던 고관절부위가 훨씬 부드러워졌고요. 집중수행을 할 때 방석 위에서 오랜 시간 동안 양반다리 자세로 지탱할 수 없었는데 지금은 꽤나 괜찮습니다. 게다가 어깨와 견갑골이 앞으로 쏠려 라운드 숄더가 된 내게 교정이 필요해진 시점과 겹쳐진 치료가 되었죠. 양쪽 두 팔에 들린 긴 봉을 어깨 뒤로 넘기기 힘들었는데 제법 넘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기까지 지도사 응원의 말이 별개의 힘으로 작용한 것은 외면하기 어려운 사실입니다. “아주 좋아요! 아주 잘하고 계세요. 최고에요!” 뻔한 립서비스임을 알면서도 구렁이 담 넘어가듯 그 추임새에 넘어가지더라고요. 민망한 말입니다만 나이듦과 반대곡선을 그리는 건 응원의 말인 것 같습니다. 뭐 나이든 사람에게만 해당되겠어요. 누구나 생애주기에서 응원을 주고받는 일은 서로에게 긍정의 화학적 반응을 일으킨다는 점을 새겨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향후 네 차례에 걸친 지도를 더 받는 게 좋겠다는 그녀의 권유가 있었고요. 비용부담의 절충점을 헤매다 한 차례의 지도로 낙점했습니다. 


  나이 70을 넘기기까지 착각 속에 살았습니다. 내 삶의 언저리를 유영하는 시간들이 넉넉해서 마음만 먹으면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수 있다고 말입니다. 두텁게만 느껴왔던 내 삶의 표층이 부쩍 얇아지고 있음을 직시한 건 불과 몇 해 전입니다. 언제라도 깨질지 모를 내 몸에 안부를 묻는 게 잦아졌고요. 노쇠해가는 몸뚱이로 인해 활동영영이 위축되고 여태껏 유지해온 일상에 적지 않은 타격을 안겼습니다. 활동에 탄력을 잃고 머지않아 캄캄한 동굴 속에 갇힐 날도 맞겠으나 겁먹을 필요까지 없다는 일말의 생각을 지니기도 했죠. 왜냐하면. 처음 어둠 속이 동굴에 들어섰을 때 한 치 앞도 가리지 못할 점을 우려하겠지만, 이내 동공이 커져 어둠을 밝혀 치환될 일로서 안심하게 될 것이라고. 노년은 이처럼 어둠과 친숙해져 원숙한 단계로 넘어갈 지략을 보일 때인 것 같습니다.


  70대 후반에 들어섰으나 아직 돈이 많이 들어가는 병에 걸리지 않아 안도했어요. 때대로 몸 이곳저곳 고장이 나지만 공적보험으로 충당될 정도로 지닌 재정에 부담을 주지 않았으니까요. 일생을 통해 노화가 진행돼 건강이 현저하게 떨어질 평균 나이로는 34세 • 60세 • 78세라 했던 어느 의사의 글이 생각납니다. 살아보니 70대인 나이도 잘만 관리한다면 자주적인 활동에 지장을 받지 않는 것 같고요. 아직 우려할만한 노화의 악령이 아직 도달해 있지 않은 ‘지금’이 그 시간대의 속으로 몰입할 절호의 기회라 여겼지요. 기회는 다시 오지 않기에 놓치지 않으려 그에 힘을 실어준 일입니다. 몸을 만듦과 동시에 하고픈 일에 매진하고자 향후 2년간 ‘느림의 노년기’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기로 한 것입니다. 황혼의 인생무대 위에 당당한 주인의식으로 서있고자 바빠진 채로.


  우리는 몸소 이 세상에 살러 왔지 이름을 밝히려 온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저절로 알려지면 모를까). 우린 길가에 핀 풀 한포기에 지나지 않아 무명초처럼 살다 언젠가 사그라질 목숨들이지요. 삶의 등식이 뭐 별거겠습니까. 이제 녹록치 않을 막장 노년의 무대 위에서 마음껏 즐기다 먼지로 흩어질 운명인 것입니다. 적어도 후회는 남기지 않기 위해 마지막 심지를 깔끔히 태우려는 진중한 과정으로 삼겠습니다. 그렇게 원 없이 소진하고 나서야 가벼워진 몸이 되지 않겠어요. 그런 이후에 멍석을 깔고 느긋하고도 심심하게 보내렵니다. 그러니 ‘노년의 느림학’에서 잠시 벗어나 젊은이 같은 행색으로 소란을 피운들 꾸짖지는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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