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히어로 영화 중 배트맨은 슈퍼맨 다음으로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팀버튼의 배트맨은 슈퍼 히어로 영화의 신드롬을 불러일으켰고, 놀란의 <다크나이트>는 세상에 나온 뒤로 쭉 배트맨 시네마틱 사가에 어김없이 따라오는 꼬리표가 됐다. 좋게 표현하면 배트맨이라는 영웅의 상징성을 대중들에게 각인 시킨 영화지만, 나쁘게 말하면 다크나이트 트릴로지 이상으로 배트맨 사가를 진행하지 못하게 막은 거대한 장애물이다. 시리즈의 연속성이 결국 생명력인 히어로물에게 치명적인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배트맨의 생명줄 연장을 위해 다수의 감독과 작가, 배우들이 그 장애물을 넘어서려 노력했지만 모두가 부딪히거나 걸려 넘어졌다. 그리고 그 바통은 영화 심폐소생술에 성공한 경험이 있는 맷 리브스에게로 넘어갔다. 팀 버튼의 <혹성탈출 >이후로 이제 혹성탈출은 끝났다고 모두가 생각했지만, 10년 뒤 맷 리브스는 당당하게 리부트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는 결과적으로 배트맨 또한 깔끔하게 리부트 시켰고, 그 답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장애물을 넘지 않고, 돌아가면 되는 것이다.
맷 리브스 감독은 우선 브루스 웨인의 이미지부터 바꿨다. 마이클 키튼부터 크리스찬 베일, 벤 에플렉까지 이어온 기존의 브루스 웨인은 외부적으로는 깔끔하고 젠틀한 미중년의 이미지였다.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CEO로, 사교성도 좋으며, 대중들의 이미지 또한 상당히 좋다. 로버트 패틴슨의 배트맨은 이와 정반대다. 가면을 벗었을 때 드러나는 눈가의 까만 분칠과 거의 정리하지 않은 헤어스타일은 이전의 배트맨에서 보기 힘든 다소 폐인적인 면모를 부각하며 퇴폐적인 캐릭터로 그려낸다. 그는 악과 싸우기 시작한 뒤로 2년 동안 회사 업무는 알프레드에게 맡기고 두문불출하며 범죄 척결에 몰두한다. 그의 연구실 또한 매우 큰 차이가 난다. 다크나이트에서 보여줬던 깔끔하고 모던한 매력을 보여주지도 않고, 여타 배트맨의 실험실처럼 최신의 장치가 잔뜩 들어와 있지도 않다. 당장 고장 나도 이상하지 않을 모니터와 컴퓨터, 프린터만이 존재할 뿐이다. 배트맨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기도 전에 이미 브루스 웨인이라는 사람부터 어둡고 축축하다. 정말 단순한 변화이며, 어쩌면 크게 달라진 결은 없지만 충분히 새로움을 느낄만한 컨셉이라 생각한다. 그 덕에 우리는 배트맨이 브루스 웨인으로 돌아오는 장면에서 신선한 이질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이질감은 꽤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모든 배트맨 시리즈들이 스토리를 진행하기 위해 이용하던 배트맨의 규율을 대하는 자세도 눈여겨 볼만하다. ‘배트맨의 정체는 철저히 감춘다.’, ‘누가 됐던 절대 죽이지 않는다.’ 히어로물을 조금이라도 좋아한다면 모두가 아는 배트맨의 철칙이다. 그만큼 전작들은 죄책감과 배트맨의 신변에 초점을 맞춘 경우가 많다. 본인이 의도를 했든 안했든 죽음에 엄격했고, 심지어는 불가항력적인 죽음에도 죄책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 에너지를 배트맨의 어두움을 부각하는데 사용한다. <다크나이트>에서 조커의 죽음을 통해 배트맨의 내면갈등을 일으키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더 배트맨>의 배트맨은 생각보다 죽음에 동요하지 않는다. 리들러의 피해자들을 보고 흔들림은커녕 되려 매우 침착하다. 그의 어린 시절을 보는 듯한, 죽은 시장의 아들로부터 느낀 동질감만이 그를 움직였다. 그리고 이 감정은 부정적인 영향은커녕 그를 잠시뿐이지만 양지에서 선한 행동을 하도록 이끌었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았을 때도 그의 태도는 생각보다 이성적이다. 이 영화에서 나온 죽음은 전부 배트맨의 원동력으로 이용됐다. ‘죽이지 않는다.’는 철칙은 지키면서 모순과 갈등에 빠지는 것이 아닌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는 점에서 꽤 재밌는 전개였다.
배트맨의 정체는 외부적인 갈등을 일으킨다. 대부분의 배트맨 사가에서 그의 정체는 꽤 중심에 놓인 화젯거리다. 이 화젯거리는 배트맨과 웨인의 모순을 극대화시키면서 두 존재 자체에 위협이 되곤 한다. <더 배트맨>에선 영화가 끝나기 전까지, 배트맨의 정확한 정체를 아는 사람은 본인과 알프레드, 그리고 리들러 뿐이다. 또한 단지 리들러가 그를 협박하는 수단으로만 이용될 뿐, 이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갈등은 없다. 배트맨의 정체를 부수적인 소재로 취급하다보니, 배트맨은 누구인가라는 의문보다 배트맨은 어떤 존재인가에 초점을 맞출 수 있었다. 처음부터 배트맨이 고민하는 부분과 맞지 않는 소재는 적절하게 축소시키며 3시간이나 되는 스토리동안 한 가지의 논점에서만 풀어간다. 그리고 주변 인물 또한 이 전개를 돕는다. 고든 경감도, 캣우먼도 그가 누구인지에 대한 의문은 가볍게 넘기지만, 그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궁금증은 매우 심오하게 접근한다. 동시에 이들은 배트맨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 한다. 질문의 방향을 전환함으로 영화는 각자에게 타인이 누구인가가 아니라 어떤 사람인가에 초점을 맞추는데 꽤 간단하게 성공한다.
브루스 웨인의 아버지 토머스 웨인의 적절한 활용도 여타 배트맨과 다른 전개를 이끌어 가는데 큰 역할을 했다. <조커>전까지, 영화 내에서의 토머스 웨인은 선량하고 정의로운 기업가로 등장한다. <조커>에서는 정반대로 권위주의적이며, 한편으론 매정하지만, 결국에는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으로 나온다. 그리고 이 설정의 실루엣이 <더 배트맨>에서 보인다. 토머스 웨인이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장면은 단 한 장면도 없다. 그는 오로지 대선 연설장면과 리들러가 퍼뜨리려는 SNS영상에만 모습을 보인다. 매체로만 얼굴을 비추는 인물인데 영화 중반부를 넘어가면서 그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토머스 웨인은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비밀을 숨기려 했으며, 누굴 죽였고 누가 죽였는지는 <더 배트맨>에서 배트맨의 갈등과 모순, 고민을 일으키고 해소하는 꽤 중요한 실마리로 작용한다. 팔코네의 폭로로부터 시작된 토머스 웨인에 대한 이야기는 브루스 웨인의 가치관을 거칠게 흔든다. 배트맨 스토리의 주요한 에너지인 모순이 가장 극대화된다. 배트맨은 정의를 실현하는 인물이다. 그 활동의 출발점은 정의로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복수’에서 시작된다. 자신을 ‘복수’라고 소개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런 브루스 웨인에게 토머스 웨인의 정치적 협박과 암살 지시는 매우 큰 혼란을 초래한다. 정의 실현의 목적이자 이유였던 사람이 사실은 범죄를 저지르고, 심지어 사람을 죽였다. 거기서 오는 모순은 그의 행동의 목적과 이유를 재정립하기 시작한다. 그가 여태 해온 자경단 활동은 정말 복수였을까. 리들러 같은 토머스 웨인의 피해자를 잡아 아캄에 집어넣는 것이 아버지의 복수일까. 알프레도가 브루스에게 한마디 한다. “그는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악행과 악인은 다르게 봐야한다는 주장을 깔끔하게 관철시키는 대사다. 그의 행동, 그리고 아버지의 행동에 대한 이유와 목적의 해답은 이 한 마디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영화가 마무리될 때, 그의 행동은 더 이상 복수로 정의할 수 없게 된다.
‘<다크나이트>가 더 낫다’는 평은 어느 배트맨 영화가 나오든 떼어낼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다크나이트>라는 작품은 히어로물을 넘어 영화사에 큰 족적을 남긴 작품이다. 맷 리브스 또한 제작 과정에서 이 부분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크나이트>보다 훌륭한 배트맨이 아닌 <다크나이트>와 다른 배트맨을 만들어낸다.’가 그 고민에 대한 그 나름의 해답이다. 배트맨의 기존 설정을 살짝만 비틀어 새로운 느낌의 배트맨이 탄생했고, 우직한 올드스쿨 액션과 꼬지 않고 직선적으로 가는 스토리 전개는 또 다른 묵직함을 선사했다. 배트맨 특유의 철학적이고 모순적인 갈등을 좀 더 쉽고 직관적으로 풀어내 복잡함을 줄이고 긴박감을 높였다. 악역과의 대립구도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고(실제로 리들러와 배트맨이 몸으로 부딪힌 장면은 하나도 없다.) 수수께끼와 추적 위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며 이야기 자체에서 새로움을 느끼게 해줬다. 그 과정에서 히어로물이 아닌 탐정 추리 영화를 본 것 같다는 평을 얻었지만, 어쩌겠는가. 애초에 ‘Detective Comics’라는 회사 이름에 가장 충실한 영웅인 것을. 그러니 이 영화를 봤다면, 또는 볼 것이라면, 마블의 <스파이더맨>과 소니의 <스파이더맨>의 관계처럼 바라봐줬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