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지성 Aug 19. 2022

결혼하고 비로소 얻은 힐링

중년결혼일기

나는 ‘지금의 나’가 좋다. 과거로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다. 물론 지금도 아주 가끔씩은 욱~ 하는 성질을 절제못하는, 미성숙한 자아가 불쑥불쑥 튀어나올 때도 있지만, 그래도 나는 대체적으로 괜찮은 인격을 가진 중년이라고 자평한다.      


이렇게 내가 스스로를 후하게 평가하는 것은 불과 몇년전만 해도 상상할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늘 스스로가 못마땅한, 자존감이 매우 낮은 사람이었다. 그랬던 내가 지금은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은’ 국화꽃이 되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항상 존중받지 못해 나 스스로를 인정하는 것에도 병적으로 인색했던 나지만 이제야 비로소 말할수 있을 듯하다. 지금의 나라면 나도 결혼하고 싶을 것 같다고...


나는 남편을 보면서 존중받는 환경에서 자라났다는 것이 얼마나 성격 형성에 중요한가를 거듭 실감한다. 나보다 더 가난한 환경에서 자라나 대학을 나온 것도 기적과도 같은 남편은 슈퍼 울트라 긍정맨이다. 과거를 늘 아름답게 기억하고 심지어 다시 돌아가고 싶어하기까지 한다. 어떻게 저럴수 있을까 가만히 관찰, 분석해보니 우리 둘의 차이점은 존중받는 환경에서 성장했느냐의 차이였다. 


"존중받으며 성장한다는 것의 중요성"


남편은 가난했지만 집에서나 학교, 교회에서 늘 존중받고 이쁨 받는 사람이었고, 그 존중받는 경험은 혹독한 가난이 그의 인성을 변질시키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가난은 가끔 다소 불편했던 기억 정도일 뿐이다. 과거와 현재 삶, 그리고 미래 전망까지도 죄다 긍정하는 축복을 받은 남편의 비밀은 존중받으며 살아온 삶이었다는데 남편도 동의한다. 


반면 나는 늘 어디에서나 심하게 존중받지 못한 삶이었다. 남존여비라는 시대적으로 일반화될수 있는 성차별의 차원도 일부 있었음을 인정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나는 가진 능력에 비해 너무 대접받지 못하고 살아왔다. 그래서인지 나는 늘 내가 부족하게 느껴졌고,  스스로를 인정하는 것에도 인색했다. 

 

이렇게 내가 오랜 고질병인 자기비하에서 벗어난 것은 중년에 경험한 두번의 큰 깨달음의 순간 덕분이었다. 그 두 번의 큰 깨달음이 나 자신을 진정으로 힐링해주어 비로소 편안함에 이르게 되었는데, 한번은 나 자신 스스로에게 최선을 다하면서 얻게 된 소위 ‘자가힐링’이었고, 또 한번은 남편과의 결혼 이후 경험한 ‘관계힐링’이었다.      


"자가 힐링"


나는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 순간을 선명히 기억하는데, 그때가 내 나이 42살이었다. 유난히 춥고 눈이 많이 내리는 클리브랜드의 겨울, 학교 프로젝트 연구실이었다. 그날도 생계를 위해 하고 있는 두 개의 연구프로젝트를 바삐 정리하며 시간을 쪼개 논문을 쓰던 평범한 날이었는데, 문득 나는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바라보다 순간, 내가 더 할수 없이, 정말 최선을 다해 살고 있다는 생각이 훅 하니 올라왔다. 

‘그래, 난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어. 더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할수 없을 만큼... 난 지금 정말로 최선을 다해 공부하고 있어’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순간 나 스스로에게 울컥 하는 감동이 일면서 나는 비로소 나 자신이 괜찮아졌다. 살면서 최초로 내가 대견해지고 안쓰러운 것을 인식한 경험이었다. 심리학자들이 자기실현의 욕구를 충족한 사람의 특성으로 언급한 절정경험을 한 것이다. 속에서 뭉클하게 올라오는 감동과 함께 진정으로 나 자신과 조우했던 그 순간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며 살고 있다. 나 자신이 초라해질 때마다 그 순간을 꺼내 읽는다. 이제부터는 진실로 나 자신을 사랑하며 살겠노라고 다짐한 그 순간을 곱씹으며 나는 이후 많이 편안해지고 내가 좋아졌다.   

  

"관계가 준 힐링"

 

주말부부로 사는 우리는 금요일 밤이 데이트날이다. 물론 토요일, 일요일도 외식을 자주 하지만, 아무래도 각자 떨어져 살다 만나는 금요일 밤의 외식이 열심히 산 한주의 보상처럼 느껴져 둘다 선호한다. 우린 코로나가 극심하던 시기를 제외하고는 으레히 좋은 맛집을 찾아서 맛난 음식에 술을 꼭 곁들이는게 삶의 낙이 되었다. 이렇게 맛난 음식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먹으며 느끼는 행복도 행복이거니와 특히 알싸하게 취기가 올라오는 즈음이면 으레 지난 세월 에피소드가 화수분처럼 솟아나오곤 하는데, 그때마다 말을 잘 들어주는 남편 덕에 가뜩이나 말 많은 나는 천일야화와 같은 이야기보따리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풀어내곤 한다. 그럴 때면 아무래도 상처받고 흑역사였던 에피소드도 많이 나오는데 남편은 적극적 경청과 깊은 공감, 성의있는 리엑션으로 화답하는 것은 물론 그 시절 내가 경험한 상처있는 기억들을 역경속에서 잘 극복해낸 성공담으로 바꿔놓는다. 나를 대단한 사람으로 격상시키면서 진심 존중의 눈빛을 발사한다.  


‘아~ 행복이 이런 거구나! 정말 행복하다!’ 

그 순간 나는 비로소 행복을 알게 되었다. 행복이라는 것의 정체는 이렇게 부지불식간에 확하고 밀려오는 감정임을 체험하게 되었다. 내 뇌의 행복회로가 번쩍 켜지며 행복해 행복해 하고 빛나는 것을 느낀다. 행복 호르몬이 뿜어져나와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낀다. 나는 언제 이렇게 행복했었나? 이전에 나는 한번도 이런 행복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예전에 설익은 연애를 했을 때도, 노력해서 박사가 됐을 때도, 가족과 함께일 때도, 한번도 이런 행복감을 느끼지 못했었다. 나는 비로소 행복의 길에 이르렀음을 깨달았다. 


뿐만 아니라 어느날 남편은 내게 이렇게 불쑥 감동을 안겼다.

 ‘나는 살아오면서 한번도 이렇게 적극적인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어. 더 할수 없이 충만한 사랑을 당신한테서 받고 있는 느낌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나는 생애 두번째로 스스로에게 울컥 하는 감동이 밀려왔다.  

‘나도 누구를 충만하게 사랑할수 있는 사람이구나! 나도 이렇게 누구를 온전히 품을 수 있는 존재였어! ’하는 깨달음... 이 깨달음은 흑역사와 낮은 자존감으로 점철됐던 내 과거 자아에 대한 진정한 이별식을 하게 해주었다. 나는 이날 이후 긍정적 자아가 내 안에 들어왔음을 느낀다.  


"사랑고백으로 넘치는 중년의 결혼생활"


나는 지금도 남편에게 무지막지하게 사랑고백을 한다. 자존심이고 뭐고 할것 없이 행복의 기운이 밀려올 때마다, 남편이 사랑스럽다는 느낌이 들 때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사랑한다고, 행복하다고 고백한다. 고백도 세계 각국 언어로 다양하게 표현하는데, 최근엔 터키를 다녀온 이후 '쎄이 쎄비어 룸' 하며 터키어 사랑해를 입에 달고 산다. 이러는 내가 나도 어이없을만큼 신기하고 웃기기도 하다. 불쑥 불쑥 잦은 사랑고백에 어리둥절하던 남편도 내 고백 횟수 만큼이나 행복이 증폭되는 것이 느껴진다. 나는 이렇게 서서히 중년 결혼예찬론자가 되었다. 

이전 05화 예민한 여자와 둔감한 남자의 결혼생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