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라는 자유, 그 벅차고도 버거운 시간들

비혼중년, 자유의 조건

by 백지성


지성씨는 ‘자유’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그녀 생애 찬란하고도 고독했던 이 순간이 떠오르곤 한다. 얼마전 지성씨 청춘의 한때를 함께 했던 싸이월드가 복구되어 꽤 많은 추억의 사진들을 복구해줬는데 지금 봐도 뭉클해지는 메모 하나가 지성씨 눈에 띄었다. 2009년 7월에 쓴 메모인데, 당시 41살 늦깎이로 박사과정을 하면서 안되는 영어와 외로움에 시달리며 가끔 슬럼프에 빠져 헤매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홀로 자동차를 몰고 미국 이곳저곳을 여행 다녔다. 이때도 박사과정 수료 직후 극심한 우울감에 시달리다 꽤나 먼 피츠버그까지 홀로 운전을 해서 갔던 것으로 기억된다. 피츠버그 강변에서 작은 유람선을 타다 불현듯 통찰했던 그 기분 좋았던 순간, 그 순간을 잊지 않으려고 싸이월드 사진첩에 사진과 함께 메모를 해뒀는데 그게 복구가 되어 2022년의 내게로 돌아왔다.


“그래 난 자유를 얻었다”


나는 자주, 불편하리만큼 자주, 내가 공부를 선택했기 때문에 잃었던 많은 것들을 떠올리곤 한다. 결혼, 가정, 적금... 그리고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많은 시간들...

이렇게 잃은 것만을 생각하면서 정작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에 대한 고마움은 생각조차 못했던 것 같다.

“자유”... 이 가슴 벅찬 단어!

그래 난 자유를 얻었다 대신...

홀연히 떠나온 피츠버그에서 난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얼마나 자유로운 사람인가를... 비록 내가 온몸으로 원해서 혼자인 자유를 얻은 것은 아니지만 분명 이 자유는 누구에게나 주어질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중략)

홀로 떠나온 피츠버그에서 난 비로소 자유가 준 고마움을 알았다. (2009년 7월 30일 피츠버그 강변에서...)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동경과 아쉬움, 남들보다 늦게 공부하는데서 오는 초조함, 그리고 지독한 외로움으로 비틀거렸던 당시 피츠버그 강변에서 얻은 이 깨달음의 순간이 전환점이 됐는지 이후 지성씨는 초고속으로 박사논문을 완성해 꿈에도 그리던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싱글의 장점으로 흔히 자유로운 삶을 꼽는다. 그 자유는 관계의 책임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맘대로 할 수는 없는 기혼자들의 여건에 대비해서 일컫는 말일 것이다.


혼자인 것은 실제로 자유롭다. 어느 정도의 여유와 한 줌의 용기만 있다면 혼자서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저질러 볼 수 있다. 책임져야 할 가정이 없다는 것은 나를 위한 삶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해준다. 지방의 가난한 집 둘째 딸로 태어나 지방대를 나와 역시 지방에서 직장 생활하던 지성씨가 36살의 나이에 미국행을 결심하고 실행할 수 있었던 것은 이후 생은 대학교수로 살고 싶다는, 자아실현 열망과 함께 그것을 실행할 용기를 내게 해준 두가지 조건, 즉 직장 생활하며 모은 삼천여만원의 종잣돈과 싱글이라는 홀가분한 상황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인생을 모두 거는 심정으로 36살에 감행한 미국행은 이후 고독이라는 거대한 허리케인 때문에 하마터면 난파될 뻔한 위기를 여러번 겪었다. 때때로 덮치는 고독감은 원치 않은 우울감으로 변했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본다고 낯선 땅에서 혼자 이러고 있나? ”하는 후회의 날들을 수도 없이 보내야 했다. 육아로 지친 친구들이 부러워했던 지성씨의 ‘자유로운 미국생활’은 자유가 주는 기쁨보다는 외로움이 주는 우울이 더 지배했다.


‘사람들은 자유를 부러워하는데 나는 왜 괴로운가?’

이런 의문이 언젠가부터 똬리를 틀었다. 자유는 소중한 것인데 나는 왜 자유의 함정에 빠진 듯 괴로운 걸까?

그에 대한 해답의 일단은 자유라는 것이 정말 중요한 가치이지만 어느 용량치 이상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마치 경제학의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처럼 자유가 박탈된 사람에게는 자유는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나 일정 부분 충족된 사람에게 자유의 가치는 이전에 비해 별것 아니게 된다. 특히 그 자유의 기간이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 작동될 정도의 긴 기간이 주어진다면 효용은 급속히 줄어든다. 너무도 긴 자유로운 시간은 효용이 생각보다 적다는 것이 지성씨가 내린 잠정 결론이다. 뭔가 돌아가 누릴 수 있는 안전망이 있고 한시적으로 혼자 마음대로 살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 시간은 세상 더없이 축복의 시간이 될 것이다. 그러나 끝을 알 수 없는 혼자만의 유랑 같은 자유는 어느덧 버거운 짐처럼 느껴진다.


또 하나 중요한 질문은 싱글의 자유에 담긴, 즉 가족이라는 진득한 관계로 얽히지 않은 자유가 그렇게 중요한 자유인가 하는 물음이다. 결혼으로 형성된 가족들과 부대끼며 사는 것은 진정 탈출하고 싶은 그 무엇인가? 해방되어야 할 족쇠같은 것인가? 이것이 마치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류의 그런 로망은 아니지 않은가?


개인의 가치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으나 중요한 것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아는 것이다. 혼자 사는 삶을 추구하는 본질적 이유가 무엇인지, 그것이 진실로 자신이 원하는 일인지 진지하게 물어야 하고 그 답을 얻어야 한다.


나 혼자 진공상태로 존재할 수 없는 게 인간 삶의 진실이다. 직업적으로 성공하고 돈을 많이 벌어도 그것을 같이 누릴 사람이 없다면, 내 성공을 같이 향유해줄 사람이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불행도 같이 나눠야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듯 성공도 같이 나눌 사람이 없으면 그 성공의 열매는 생각보다 달지 않을 수 있다.


내 성공을 무조건적으로 기뻐해 줄 수 있는 사람은 그 성공의 결과를 같이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다. 성공의 과실을 공유하여 내 행복을 증폭시킬 관계는, 사실상 가족이지 않은가? 태어난 원가족은 점차 나이가 들어가고 중년이 되면 그런 과실을 향유할 대상으로서 존재감이 확실히 약화된다. 나 말고 다른 형제들은 가족을 이루었기 때문에 각자 가족의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중년 즈음이 되면 부모는 두분다 존재하는 경우도 드물지만 돌봐야 할 대상으로서의 의미가 커지기 때문에 행복을 공유한다는 것에 한계가 있다.


중년엔 친구도 내 행복을 마냥 기뻐해 주고 과실을 공유할 존재로서는 한계가 있다. 친구의 눈부신 성공이 나의 초라한 현실을 자각하게 하는 것이 얄궂은 진실이다. 그래서 중년이 되면 끼리끼리 어울린다. 사는 것이 차이 나는 친구끼리는 관계가 지속되지 않는다. 또 반대로 친구의 불행에 마음껏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도 많지 않다. 어떤 것을 가지고 싶고, 어떤 것을 하고 싶은가도 사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것을 인정해주고 같이 누릴 수 있는 존재가 있기에 더 염원하고 노력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혼자여서 자유롭다는 것은 때론 극심한 고독을 견뎌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혼자서 모든 것을 결정하고 책임지는 것이기도 하다. 해서 때론 구속받아도 좋으니 좀 외롭지 않았으면, 누군가 의지할 사람이 좀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종종... 사실 꽤 많이 든다.


자유란 그것을 진정으로 원하고 그것을 누릴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가치 있고 의미 있다. 진정으로 혼자 사는 삶을 원하는가? 이 질문은 고독이라는 괴로움을 기꺼이 껴안을 능력이 있는가 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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