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고독의 실체
“운동을 하고 열심히 일하고 주말엔 영화도 챙겨보곤 해,
서점에 들러 책속에 빠져서 낯선 세상에 가슴 설레지,
이런 인생 정말 괜찮아 보여, 난 너무 잘살고 있어, 헌데 왜?
너무 외롭다. 나 눈물이 난다. 내 인생은 이토록 화려한데.
고독이 온다. 넌 나에게 묻는다. 너는 이 순간 진짜 행복하니?
(대중가요 ‘사랑에 빠지고 싶다’ 가사 중)”
밖에서 보면 ‘화려한 싱글’로 보일, 지적인 싱글의 외로운 속사정을 이렇게 잘 표현한 노래가 있을까? 고독한 사람의 독백처럼 들리는 이 노랫말에 아마도 나뿐만 아니라 많은 싱글들이 깊은 공감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난 괜찮은 직업도 있고, 자기관리도 하며 모범생같은 삶을 살고 있는데... 아니 근데 왜 이렇게 외롭지?’ 하고 절규하는듯한 가사! 외로워서 별로 안행복하다는 메시지를 담은 이 노래를 지성씨는 지금도 가끔 듣곤 한다. 화려한 싱글을 꿈꾸고 있는 20대의 후배 여성들은 이 처절한 감수성을 이해할까?
지성씨 역시도 어느날 우연히 이 노래를 들었을 때 뭔가 훅하니 올라오는 공감과 함께 길고도 길었던 수십년의 외로운 주말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클리브랜드 유학시절 절대 고독에 헤매였던 그 무수한 시간들, 꿈을 이루고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이 고독감을 이 노래가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며칠동안 아무하고도 말 한마디 않고 고독하게 지내며 '고독'과 '몰입' 사이에서 안간힘을 쓰던 그때, 문득 지성씨는 ‘절.대. 고.독.’이라는 단어를 떠올린 적이 있었다. ‘아~ 나는 절대 고독을 맛보았다’라고 조용히 탄식하던 그 순간이 지금도 선하다. 사뭇 당황스럽기도 한 성찰이었는데, 그때의 기억은 지성씨에게 고독이라면 나도 한 고독한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마치 ‘니들이 고독을 알아?’라고 의기양양할 만큼 그 시절 나는 참 고독했고, 행복하지 않았다.
지성씨는 그렇게 고독 때문에 고통스러웠지만, 고독은 많은 철학자들에 의해 추앙된다. 특히 싱글 철학자들에 의해 추앙된다. 제라르 마크롱은 “우리가 인생에서 겪게 되는 온갖 일들을 큰 무리 없이 받아들이고 그것을 내면화하려면 고독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고독은 인생의 한 부분이다” 고 주장하고 있으며, 노명우는 “혼자일수 있는 능력은 자기밀도를 높이기 위한 치밀하고 집요하며 장기간의 끈질긴 노력을 통과해야만 획득할 수 있는 권능”이라고 하면서 “혼자일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자기밀도 제로의 사람에게 혼자라는 것은 고립의 형벌에 다름 없지만 타자관계와 자기관계의 균형을 회복하고 싶은 사람에게 ‘혼자’라는 것은 균형 회복을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고 하였다. 혼자 사는 사람은 이렇게 능력 있는 사람이며 타자관계에서 자유로운 ‘단독인’이라고 추앙하는 듯하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인류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인물들도 의외로 많다. 그 유명한 칸트에서부터 데카르트, 뉴턴, 로크, 파스칼,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쇼펜하우어, 니체, 키에르케고르, 비트겐슈타인까지... 철학자들만으로도 이렇게 많은데 예술가들을 비롯해 위인들을 합하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결혼이 당연시됐던 시대에 결혼을 안하고 혼자서 자아실현을 통해 위대한 족적을 남긴 것이다.
이렇게 고독은 미덕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고독이 추앙될 수 있는 것은 그 고독이 가진 성격에 달려있다는 점이다. 자발적인 고독인가, 비자발적이며 상황적 고독인가? 고독의 기간이 일시적인가, 아니면 오랜 동안 지속될 것으로 보이는가? 특히 고독의 자처를 통해 실제로 달성할 목표가 있는가?... 이처럼 각자가 가진 고독의 성격에 따라 고독은 축복이기도 하고 형벌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 한가지 ‘무엇을 위한 고독인가’ 하는 것이다. 고독의 시간이 주는 유익, 즉 몰입도를 높이고 자기에게 집중해 성찰하는 계기를 준다는 것은 '가끔 고독도 필요하다'는 정도로 읽혀야 하지 고독을 추앙하는 조건이 될수는 없다.
고독은 애써 실천해야 할 것이 아니라 닥치면 극복해야 하는 성격으로서 그 의미를 띠지 않을까? 사회적 삶을 되도록 회피하면서 은둔형 외톨이처럼 사는 것은 자기밀도를 높일지는 모르나 그저 사회 속에서 상처받을수 있는 위험을 회피한다는 효과 외에 가져올 개인적인 성장은 별로 없을 것이다. 고독한 상태가 되면 고독에 적응하고 불행감을 덜기 위한 삶의 지혜가 필요한 것이지 고독에 대한 철학자의 주장에 헤깔려하며 굳이 고독에 잔류할 필요는 없다.
물론 독신으로 사는 사람들이 모두 내내 고독하다는 것은 아니다. 부단히 사회적 관계를 확장하며 공동체의 삶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면서 혼자 사는 일상적 고독을 그때그때 잘 즐기는 사람도 있다. 또한 가정을 이룬 사람도 가장 존중받고 이해받아야 하는 배우자나 가족들로부터 이해받지 못해 처절하게 고독감을 느끼는 경우도 많다. 일부의 연구에서는 혼자 사는 사람이 두명 이상으로 구성된 가족보다 오히려 다양한 인간관계망을 형성하며 살아가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물론 주로 서구사회에서 나온 연구지만 말이다.
중년이 되면 고독을 느끼지 않으려고 해도 자연적으로 고독해진다. 이는 마치 중년 여성들의 다이어트와도 비슷한데, 식사량을 줄이고 밤낮으로 등산이며 걷기 운동을 해도 뱃살이 잘 안빠지는 것처럼, 노화로 인한 대사능력 감소와 호르몬 감소로 살도 안빠지지만 자꾸 기분이 가라앉고 고독해진다. 왠만해선 기분이 업되지도 않고 자꾸 우울해져서 아무 것도 아닌 일에 서러워지고 통속적인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줄줄 흘리는 일이 잦아진다. 이 즈음 평생 안봤던 인간극장, 극한직업 같은, 고생하며 열심히 사는 평범한 사람들 다큐를 즐겨보며 위안을 받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래 나만 힘들게 사는게 아냐 하면서...
따라서 안그래도 고독해서 우울해지는데 애써 고독한 자신을 포장하고 이를 지속시킬 필요는 없다.
고독함으로써 얻는 유익은 한시적인 고독일 경우에만 가능하다. 고독은 대부분이 고통의 형태로 존재한다. 고독의 순간이 곧 행복의 순간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마도 그런 사람들은 칸트나 데카르트처럼 진리 탐구를 위해 고립하고 집중해야만 하는 미션이 있는, 아주 비범한 사람들일 것이다. 학문을 하거나 예술을 하거나 자기몰입이 필요한 사람들이나 고독한 상황을 애써 만들 뿐 사회적인 삶이 곧 먹고 사는 일로 이어지는 우리같은 평범한 직장인들에게 고독력은 그렇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중년여성에게는 고독력이 필요한게 아니고 ‘고독해지지 않는 능력’이 필요하다. 특히 싱글의 중년 여성들에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