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4)

by 고캣

숨이 차올랐다. 다리도 조금씩 아파지는 듯했다. 승민은 그때 급수대를 발견했다. 승민은 속도를 줄여 급수대 앞에 멈춰 섰다. 간이 플라스틱 탁자 위에 수많은 종이컵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 많은 종이컵에는 물이 들어있었다. 승민은 아무 종이컵이나 집어 들어 마셨다. 이렇게 꿀맛 같을 줄이야. 승민은 자기도 모르게 캬 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다시 달렸다. 아직 한참은 달려야 했다.


급수대를 지나니 다리가 보였다. 한강을 건너게 해주는 커다란 다리였다. 여기가 무슨 다리인지 승민은 알지 못했다. 평소라면 기억해 냈을, 아니면 지도 앱을 켜서 확인했겠지만, 승민에게 그런 여유는 없었다. 승민은 그저 다리를 움직이는 것만 생각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풍경은 눈에 들어왔다.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한강은 웅장함이 느껴졌다. 평소라면 순식간에 지나쳤을 지하철 밖 풍경이었겠지만 오늘만큼은 이렇게 큰 강을 내 다리로 지나가고 있다는 생각에 승민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꼈다. 그렇게 커다란 다리를 건넜다. 이제야 겨우 반을 달렸다.


한강 다리를 건널 때 승민은 신이 난 상태였다. 숨이 차지 않았고 아팠던 다리에서 통증은 사라져 있었다. 힘들기보다는 오히려 재밌고 신나는 상태. 이게 말로만 듣던 러너스 하이인가 뭐시기인가 싶었다. 내가 러너스 하이를 느끼다니. 승민은 자기가 진정한 러너가 된 거 같아 뿌듯함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언제나 좋은 상태일 때 터졌다. 승민이 회사에서 모든 서류를 마무리했다고 생각해 정리를 마치고 퇴근 준비를 할 때쯤에 책상 구석에 숨겨져 있는 작은 서류 봉투를 발견했을 때처럼. 승민은 급격히 피로를 느꼈다. 발바닥에 물집이 터져 따끔거렸다.


특히 오른쪽 다리가 아팠다. 무릎에는 이상이 없었지만 종아리가 심하게 아파졌다. 처음에는 참고 달리려던 승민이었지만, 이내 더 커진 고통에 결국 주저앉고 말았다. 그렇게 승민은 6km 지점을 알리는 간판 앞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승민은 연석에 앉아 오른쪽 종아리를 풀어주었다. 하지만 큰 진전은 없었고 자신이 만질수록 더 아파지는 듯했다. 여기까지인가. 승민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승민은 자신을 지나쳐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바라봤다. 분명 자신보다 한참은 뒤에 있었을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여유롭게 승민을 지나쳐 결승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괜히 마음이 안 좋아서 고개를 푹 숙였다. 혼자 있고 싶어졌다.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으면 했다. 그러려면 조용한 곳으로 가야 하는데 다리가 아프니 아무 곳도 갈 수 없었다. 승민은 큰 한숨을 내뱉었다. 너무도 쉽게 나오는 한숨이 슬펐다. 차라리 뛰면서 급하게 몰아쉬는 날숨을 더 원했다. 그러다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괜찮으세요?

-네?

-속이 울렁거려요? 아니면 쥐가 나셨나요?

-어... 오른쪽 종아리가

-파스 뿌려드릴까요?

파스를 들고 있는 여자였다. 따뜻한 차림에 배 번호도 없는 걸로 보아 마라톤 대회에 참여한 사람은 아닌 듯했다. 여자는 자연스럽게 파스 통을 흔들더니 승민의 종아리에 파스를 뿌려줬다.

-어때요?

승민은 일어나서 조금씩 몸을 움직여봤다. 여전히 아프지만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어쩌면 결승전까지는 갈 수 있을 거 같았다. 승민은 감사의 인사를 했다. 하지만 여자는 인사를 받기보다는, 어서 가요! 화이팅! 이라는 말로 답했다. 승민은 멀어지면서도 고개를 꾸벅거렸다. 그러는 게 예의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승민에게는 그러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이제 승민은 다시 달릴 수 있게 되었다.

숨이 차올랐다. 최대한 호흡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 짧은 날숨을 내뱉었다. 평소보다 아주 느리지만 승민의 다리는 착실히 움직이고 나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승민은 9km 지점에 이르렀다. 하지만 승민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숨을 쉬는 것이 고통스럽고, 다리는 아프다 못해 감각이 없어진 듯했다. 한 발을 내딛는 것, 날숨을 한번 내뱉는 것, 승민은 모든 동작이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여태 달려온 반동 때문인지 승민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승민은 9km 간판을 지나치고 나서 생각했다. 고작 1km라고. 그렇게 승민은 엉망진창인 상태로 결승선을 넘었다. 그러고선 비틀비틀 걸어 길가에 누웠다. 그리고 숨을 쉬었다. 살기 위해서 숨을 쉬는 것에만 집중했다.


조금 힘이 난 승민은 메달과 간식을 받았다. 간식으로 받은 음료수와 빵을 먹으면서 메달을 이리저리 쳐다보며 뿌듯해하고 있었다. 처음 받아보는 메달을 보니 웃음이 나와 헤죽거리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풀 마라톤 주자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모두가 지쳐있는 상태였다. 누군가는 구석에서 토를 하기도 하고, 주저앉아 급하게 숨을 쉬는 이도 있었다. 반대로 여유롭게 들어온 듯한 사람도 있었고, 더 뛰고 싶어 하는 이도 있었다. 그중에 승민에게 비닐 우비를 건네준 사람도 있었다. 그 사람은 굳이 따지자면 후자에 속한 사람 같았다. 승민은 대회가 끝날 때까지 그곳에 남았다. 그곳에 남아서 사람들을 구경했다. 시상식이 끝나고 설치된 구조물을 해체할 때까지 그곳에 남아서 사람들을 바라봤다.


다음날 승민은 어김없이 출근을 했다. 어제 쌓인 피로가 풀리지 않아 졸음이 몰려왔다. 이 부장은 그런 승민을 보고 무슨 일 있었냐며 핀잔을 주었다. 승민은 어제 느낀 뿌듯함을 자랑하려고 했지만 굳이 그러지 않았다. 고작, 10km 달리기를 했을 뿐이라고. 승민은 그렇게 생각했다. 승민의 심장은 달리고 있지 않는데도 열심히 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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