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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쥬르 Aug 17. 2022

10. 늦깎이 유학생의 애환

#10. 나이가 유학에 걸림돌이 될까?


"유학 가기 가장 좋은 나이는 언제일까?"


미국 유학을 고민하며 가장 고민했던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나이’였다. '지금에야 유학길에 올라 공부를 마치고 취직은 할 수 있을까? 과연 머리와 체력이 받쳐줄까? 결혼 적령기에 이렇게 훌쩍 떠나면 내 미래는 어떻게 될까?' 이런 질문들이 미국행을 결정할 때까지 꽤 오래 발목을 잡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고민하는 시간에 그냥 하루빨리 준비해서 올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늘 '너무 늦었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지금'이 가장 좋은 때입니다." - 모지스 할머니

76세에 시작해 101세까지 화가로 활동하며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예술가’로 꼽힌 ‘모지스 할머니’를 아는가? 그녀의 책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 제목처럼, "공부하기 늦은 나이가 있나요? 언제라도 시작하시면 됩니다!"라고 희망에 가득 찬 덕담을 해드리고 싶다. 하지만 다소 늦은 나이에 유학 생활을 해본 자로써, 그건 좀 무책임한 발언인 것 같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 본인이 미국에서 석/박사 과정을 한 것이 아니라, 석사로 '실용 학문'을 전공하고, 졸업 후 (미국이든 한국이든) 취업을 목표로 했다는 점을 고려하고 읽어주셨으면 한다.



적합한 유학 시기 결정을 위해 고려할 이것


유학 시기를 결정하는 데에는 여러 요소(재정, 경력, 나이, 체력, 결혼/자녀 여부 등)가 영향을 미치겠지만, 중요한 딱 하나를 집어 말씀드리자면 '졸업 후 미국에서의 취업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이다. 졸업 후 미국에서 취직하고 이곳에서 자리를 잡고 싶다면, 최대한 빨리 유학을 시작하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왜냐하면 1) 취업비자(H-1B Visa)부터 시작해 영주권을 획득하는 데 거의 적어도 3~5년이 소요되며, 2) 경력이 있더라도 미국에서 ‘취업비자’를 받아야 하는 상황 때문에, ‘주니어’ 레벨로 취직해야 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기 때문이다.


나이에 개의치 않는 미국인이라면 모를까, 초면에 ‘나이’부터 묻는 문화에서 자라온 한국인이 ‘취업비자’를 받기 위해, 기존 (한국) 직급을 포기하고 주니어 레벨로 ‘깔고 들어가야' 하는 상황은 충분히 자존심 상하는 일일 수 있다. 물론 취업비자와 관계없이 당신의 능력에 맞게 직급을 주는 좋은 회사도 있을 것이고, 영어 소통 및 실력/기술이 출중해, 전혀 깔고 들어갈 필요가 없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본 대부분의 (비엔지니어 계통) 외국인 학생들은 직급을 하향 조정해 취업비자를 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미국 유학/정착에 중요한 요소를 '실력, 기술, 체력'으로 꼽기도 한다.


'미국 학위'를 따는 데만 관심이 있어 ‘학위’만 취득 후 귀국하는 게 목표라면, 나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재취업’의 문제가 고민일 수 있겠지만, 주변인 중 대부분, 유학 후 귀국해 원하는 직장에 자리 잡았다.


직장 생활을 통해 유학 비용을 어느 정도 모은 후에야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던 만큼, 남들보다 늦은 시기에 유학 생활을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한창 젊은 나이였음에도, 당시 대학원 클래스의 평균 연령(25~27세)을 고려하면, 나는 늦깎이 유학생이었다.




1. 체력은 국력


유학 기간 내내 가장 큰 복병은 ‘체력’이었다.


학교 웹사이트를 찾아보니 내가 공부했던 석사 프로그램 평균 연령이 24세로 나온다. 학부 졸업 후 바로 미국 대학원에 입학하거나, 2~3년 직장 경력을 쌓고 비교적 어린 나이(26~27세)에 유학하러 온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친구들은 이팔청춘 나이답게 팔팔했다. 수업 끝나자마자 당일치기로 시카고 시내에서 폭풍 쇼핑과 외식을 하고 오질 않나. 주말엔 소개팅에 파티에, 엄청난 양의 과제까지 해치우는 대단한 녀석들이었다.


친구들의 파티 초대를 매번 거절하기 미안해, 세 번에 한 번꼴로 Yes를 했다. 젊은 친구들의 혈기 왕성함을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다. 유학을 고민하고 계신다면 (+ 미국에서 취업을 원하신다면 + 미국 생활도 즐기고 싶으시다면), 한 살이라도 어릴 때 가시는 것이 좋다. 공부에 나이 제한이 있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나는 20대만큼 머리가 말랑말랑하지 않았고, 어떻게 하면 체력을 아낄 수 있을지 고민해야 했다.


드라마 <미생>의 한 장면


젊은 아이들이라 그런지 ‘암기력’에서 특히 월등했다. 늦깎이 유학생이 단 하나 내세울 게 있었다면, 그건 아마, 직장 경력을 통해 쌓아 온 이해력(understanding context)과 약간의 통찰력이 아니었을까 싶다. 예를 들어, 친구들은 Consumer Insight 수업에서 배운 개념과 용어를 달달 외울 수 있었지만, 그 개념에 해당하는 예시를 찾거나, ‘왜’에 대한 답을 하지 못할 때가 종종 있었다. 즉, 각각의 데이터 포인트는 잘 이해하고 암기할 수 있으나, 그 데이터들을 연결해 정황을 이해하는(connecting the dots) 부분에서 막히곤 했다. ‘그간의 직장 생활이 허송세월은 아니었군’ 하며 나 자신을 위로하면서도, 어린 친구들의 쌩쌩한 체력과 초고속 두뇌 CPU가 한없이 부러웠던 시간이었다.



2. 하지만 궁극적인 복병은 영어였던가


모든 수업에 그룹 프로젝트가 하나씩 있었다. 동양인 동기들과 짝이 되어 팀워크를 하는 것과 미국 현지 학생들과 함께 팀워크를 하는 것은 확실히 달랐다.


© markusspiske, 출처 Unsplash

첫 번째 프로젝트팀은 공교롭게도 나만 빼고, 모두 미국인들로 구성되었다. 그중 유난히 내게 까칠하고 틱틱거리는 동기가 한 명 있었다. 원어민 영어가 아닌 발음이 듣기 싫었던 것인지, '네까짓 동양인보다 미국인이 훨씬 우월하다'라고 생각한 건지 잘 모르겠지만, 그의 멸시는 내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그가 나를 무시하니, 다른 미국 친구들도 덩달아 무시하는 듯했다. "너희들도 남의 나라에 가서 공부해 봐. 그게 어디 쉬운가" 한 마디를 쏘아주고 싶었다.


한 친구는 “너희 그룹에 미국 애들만 있어서 그래. 우리 팀은 중국 애들이 많아서, 아예 중국어로 토론해. 너무 신경 쓰지 마”라며 나를 위로했다. 미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 품었던 희망과 자존감은 바닥으로 떨어지고 어떻게 하면 이 상황에서 서바이벌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소화하기도 전에 지식을 삼켜버려야 했던 1, 2학기가 지나고 3학기가 되었다.



3. 패자부활전


3학기의 수업 과목 중, 브랜드 커뮤니케이션(Brand Communications)이라는 수업이 있었다. 미국의 온갖 유명 광고 에이전시 및 소비재 기업 임원으로 일하셨던 교수님이 담당하는 수업이라 기대가 컸다. 상반기에는 BMW, Land Rover, Reebok 등 다양한 브랜드의 ‘케이스 스터디’를 바탕으로 작성하는 총 7건의 개인 리포트로, 후반기에는 팀별 과제로 학점을 매겼다. 10포인트의 글씨와 재무제표가 빼곡히 들어찬 30여 장의 ‘케이스 스터디’를 읽고, 내용 요약 및 교수님의 질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A4 3장에 담는 것이 과제였다.


선배로부터 학점 받기 쉽지 않다는 얘기를 들었던 터라, 리포트를 작성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생각이 잘 나지 않을 때는 나의 아지트, Deering Library에 가서 리포트를 썼다. 그곳에 가면 없던 영감도 솟는 것 같았다. 리포트 숙제가 있던 주에는 어김없이 도서관 종료 시간이 되어서야 집에 갔다.


Deering Library의 밤 풍경


두 번째 과제를 제출했던 그다음 주, 교수님은 수업 시간에 프린트물을 나눠주셨다. 본인이 여러 해 동안 수업하며, 본 케이스 스터디에 대해 이렇게 간결하고 논리적으로 쓴 리포트는 없었다면서, 여러분들이 다 읽어봤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프린트가 전달되며 클래스는 술렁술렁, 아이들이 내 쪽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왜 저러지, 얼굴에 뭐가 묻었나?’ 프린트물이 전달되는 순간,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나의 영어 이름이 적혀 있었다. 드디어 굴욕의 시간에서 벗어나는 것인가. 유학 생활에도 봄이 찾아온 것일까...


© aniket940518, 출처 Unsplash


4.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그대의 이름은 미국


© Claudio_Scott, 출처 Pixabay

교수님의 ‘call-out’은 조금 효과가 있었다. 그동안 나를 멍멍이 무시하고 투명 인간 취급하던 미국인 동기들이 내게 뻘쭘하게 인사라는 걸 하기 시작했다. 수업 중 내 리포트가 읽히고, 후반기 그룹 프로젝트에서 우리 팀이 1등을 먹으며, 그제야 미국인들은 멸시의 눈빛을 거두었다. 이로써 브랜드 커뮤니케이션 수업은, 영어가 달려 개 무시당하던 늦깎이 유학생의 ‘패자부활전’이 되었다. 말로만 듣던 ‘강자에는 약하고, 약자에는 강한’ 미국 문화를 느끼는 순간이었다. 말이 딸리면, 다른 실력으로라도 승부해야 하는구나.


얘기하면서도 닭살이 막 돋는 이 에피소드를 굳이 꺼낸 이유는, 유학이라는 것 자체가 모든 외국인 학생에게 쉽지 않다고 얘기하고 싶어서이다. 나이와 관계없이, 처음에는 다 힘들다. '나는 왜 이렇게 적응을 못 할까, 내 영어는 왜 이것밖에 안 될까?' 자책하겠지만, 모두들 속에서는 다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약'이라고, 학기를 거듭할수록 더 잘하게 될 거라고, 타지 생활도 점점 재밌어질 거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30대가 되어서야 직딩을 탈출해 공부 모드에 돌입한 이 늦깎이 유학생도 해냈으니, 여러분은 더 잘할 수 있을 거라고.



5. 유학에 적합한 시기


늦깎이 유학생의 에피소드를 열심히 떠들었는데, "그래서, 유학에 정말 적합한 나이는 언제입니까?"라는 질문에 한마디로 답해야 한다면, 그건 아마도 졸업 후 2~3년 정도 직장 생활을 한 '시점'이 아닐까 싶다. 또한 '나이'보다는 '시점'이라고 강조하고 싶다. 사람마다 졸업과 취직 시점이 다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각자의 상황이 다를 것이니, 하나의 ‘데이터 포인트’ 정로도 참고하셨으면 좋겠다. 대학원 졸업 후 친구들의 취직 과정을 지켜보며 깨닫게 된 것은 다음의 세 가지이다.


취업과 연결되는 ‘실용 학문’을 전공할 경우,


1) 졸업 후 미국에서의 기나긴 ‘취업 및 비자’ 과정을 '견디는' 데 필요한 체력과 멘탈이 허락할 때 유학을 하는 것이 좋다.

2) 본국에서의 2~3년 직장 경력이 미국에서 취업할 때도, 공부할 때도 유리하게 작용한다.

3) 졸업하자마자 대학원에 온 외국인 친구들은, 졸업 후 대부분 본국으로 돌아갔다.


미국 유학과 취업 과정에서 가장 고민이 많았던 부분이 ‘나이'와 '유학 시점'이었기에, 본 주제를 한번 다뤄보고 싶었다. 그렇다고 "본국에서 무조건 경력을 쌓고 오세요. 경력 없이는 미국 취업이 절대 불가합니다!"라고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경력 없이 취직한 친구들도 있었다. 개인이 처한 상황(재정, 경력, 나이, 체력, 결혼/자녀 여부 등)이 모두 다르기에, 유학에 적합한 나이도 천차만별일 것이다. 나는 쓸데없는 '고뇌의 시간'과 '유학 자금 마련'으로 총 9년의 경력을 쌓고 뒤늦게 미국에 왔음에도, 어찌어찌 취직해 자리를 잡았다. 그러니 정답은 없다. 각자의 상황에 맞게 ‘유학 시기’를 잘 결정하시길 바라며. 건투를 빈다.


꿈을 이루는 데 결코 늦은 '시기'는 없다


늦깎이 유학생의 애환은, 모두 추억이 되었다.

남들보다는 늦게 왔지만, 어렵게 이루어 낸 기회라 하루하루가 소중했고, 한 땀 한 땀 낭비 없이 살았다.

마지막으로 이 글의 부제목 "나이가 유학에 걸림돌이 되나요?"에 답하자면,


1) 실력과 체력이 받쳐준다면,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2) 유학에 ‘적합한’ 시기는 있으나, 결코 ‘늦은’ 시기는 없다.


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세요. 신이 기뻐하시며 성공의 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당신의 나이가 이미 80이라 하더라도요."


모지스 할머니의 말씀처럼

꿈을 이루는 데 결코 '늦은' 때는 없다.




이미지 출처: 지나쥬르 사진첩, Unsplash, Pixabay, 드라마 <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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