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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쥬르 Aug 03. 2022

8. 유학생의 발, 자전거를 사수하라

#8. 나의 포카리스웨트, 이젠 안녕


자전거를 타고 캠퍼스를 누비는 것은 나의 오랜 로망이었다.


한국에서 자전거를 타본 적이 있긴 하다. 어릴 적 단독주택에 살며 동네 친구들과 놀 때, 여의도 한강 공원에서 자전거를 몇 번 빌려 탔던 기억이 전부다. 대학원 합격 통지서를 받고, 출국 준비를 하는 동안 미국 생활을 상상하며 백일몽을 꾸곤 했다. 미국에 가면 가장 하고 싶었던 버킷리스트 1번은 단연코 자전거로 등하교 하기였다.


자전거 로망

역대급 여신 배우들이 등장했던 '포카리스웨트 광고 시리즈'를 알고 있는가. 그중 가장 잘 알려진 광고는 아마 2001년 배우 손예진이 등장한 우체통 편이 아닐까 싶다. 바람에 나풀거리는 하얀 원피스를 입은 그녀가 하얀 자전거를 타고 파란 하늘, 파란 바다, 파란 지붕의 산토리니를 누비는 장면은, Z세대들도 알고 있는 명장면이다. "그리운 소식은 나를 목마르게 한다!"라는 메시지와 함께, 우체통을 열어 파란 편지 봉투를 꺼내는 장면, 코발트 빛 파란 우체통 옆에 서서 포카리스웨트를 마시는 손예진의 리즈 시절 모습을, 우리는 아직도 기억한다.


추억 돋는 포카리스웨트 광고 (2001) - 손예진 <우체통 편>


이처럼 비현실적이면서도 달달한 장면을 떠올리며 내가 탈 자전거를 상상하곤 했다. 아이보리나 민트색의 밝은 색 몸체에 나무로 얼기설기 짜 만든 바구니를 달면 딱일 것 같았다. 심지어 유학 비용 리스트에 자전거 구매 비용을 미리 박아 넣어, 이 항목만은 절대 건드리지 못하게 했다.




1. 나의 '포카리스웨트'를 만난 날


2주 동안 나의 발이 되어 준 '포카리스웨트'.  © 지나쥬르

당시 내가 살던 아파트는 캠퍼스에서 도보로 3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띄엄띄엄 오는 셔틀버스가 있긴 했지만, 혹시 늦잠을 자거나 갑자기 미팅이 생기는 경우, 다른 이동 수단이 없으면 조금 곤란했다. 짧으면 1년, 길어봤자 고작 2~3년이 소요되는 석사 과정을 밟는 유학생들은 일반적으로 자가용을 사지 않는다미국에 남을지 한국으로 돌아갈지 거처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자가용을 사는 것은 매우 부담스럽다. 자가용이 있는 학생들은 대부분, 박사 과정을 밟아 체류 기간이 긴 학생들, 미국 현지인들, 집이 좀 사는 중국 학생들이었다. 나머지 학생들은 도보 또는 셔틀버스를 타고 통학했다.


통학뿐 아니라 운동도 할 겸, 계획대로 자전거를 사기로 했다. 앞으로 만 2년의 학교생활 동안 나의 발이 되어 준 이동 수단이니, 이왕이면 좋은 것을 사고 싶었다. 에반스톤(Evanston)의 여러 자전거 샵을 틈틈이 돌아다니며 고르고 고른 끝에, 포카리스웨트' 느낌이 나는 베이지 색상 자전거를 사 밝은 갈색의 나무 바구니를 달았다.


캠퍼스 호숫가, 사랑을 노래하는 바위  © 지나쥬르

영어 수업으로 캠퍼스에 갈 때마다 열심히 타고 다녔다. 친구들은 자전거 덩치에 비해 네 몸집이 너무 'tiny' 하다며 놀리곤 했다 (미국은 사람도 물건도 건물도 다 큼직큼직한 느낌이다). 수업이 끝나면 캠퍼스 주변의 미시간 호숫가를 한 바퀴 돌고 집에 돌아오는 것이 루틴이 되었다. 기분이 좋은 날엔 머리에 꽃을 단 뇨자처럼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신나게 몇 바퀴를 돌다 집에 오곤 했다. 호숫가에는 캠퍼스 커플의 사랑을 노래하는 바위들이 잔잔한 파도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미시간 호수 (Lake Michigan): 마음이 답답할 때 자주 갔던 곳. 지평선 너머로 시카고 스카이라인이 보인다   © 지나쥬르


2. 자전거 도둑


어느 늦은 밤, 아파트 공동 창고에 놓아둔 물건을 꺼낼 게 있어 지하에 내려갔다. 지하실에는 공용 창고뿐 아니라, 자전거 주차 랙 (rack, 땅에 박혀있는 쇠기둥), 공용 세탁기, 드라이어가 몇 대 놓여있는 세탁방이 있었다. 지하실 열쇠가 있는 아파트 거주민들만 드나드는 곳이니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지하실 문을 열었는데 한 남자가 서 있는 게 아닌가. 꽤 늦은 시간이라 조금 이상했지만, 자전거를 주차하러 왔거나, 공동 창고에서 물건을 찾거나, 아님 공용 세탁기에서 빨래를 찾으러 왔나 싶었다. 조금 어색하기도 하고 무서워, 눈을 마주치지는 않았다. 얼른 창고에서 물건을 꺼내 3층으로 올라갔다.


다음 날, 영어 클래스에 가려고 지하실에 내려갔다. 자전거 프레임(몸체)은 온데간데없고 바퀴 하나만 달랑 남아 있었다. 내 눈을 의심했다. 설마... 주변을 살폈다. 누가 자전거를 옮긴 걸까. 자물쇠에 묶여 있었으니 그럴 리는 없을 텐데.


그놈이 확실했다. 어제 그놈과 눈을 마주치고, 거기서 뭐 하고 있냐고 물어봤다면, 내 자전거는 무사했을까. 아니, 그랬다면 내가 뭔가 눈치챘다고 생각하고, 소리 없이 죽였을 수도 있었다. 충분히. 여긴 미국이니까.




우선 대학교 경찰 (University Police)에 신고하고, 아파트, 보험사에도 연락해 보상 가능한지 물어봤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자전거 샵, 중고 샵에 내 자전거의 일련번호와 모델명을 알려주고, 혹시 장물이 들어오면 연락을 달라고 부탁했다. 결국 에반스톤시 경찰서까지 가 신고했는데, 이 캠퍼스 동네는 자전거 천지고 워낙 도난 사고가 잦아서 아예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영화 <자전거 도둑 (The Bicycle Thief)>의 주인공 안토니오가 도둑맞은 자전거를 애타게 찾으며 온 도시를 헤매듯, 나 또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에 그 허무한 짓을 매일 반복했다. 경찰서에서 개무시당한 안토니오의 자전거 도난 리포트처럼, 내 리포트도 '접수는 되었지만' 철저히 까였다. 경찰의 무관심은 시대와 국경을 넘어 '유니버설(universal)'하다. 천편일률, 다른 것 하나 없어 보이는 자전거 프레임과 타이어, 부품 사이를 눈으로 세심하게 훑으며 만지작거리는 안토니오와 그의 아들, 브뤼노의 몸부림은 순진하고 절박해서 더 아리다.

'네오리얼리즘'의 거장,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의 영화 <자전거 도둑 (The Bicycle Thief)>


도난 사건이 있었던 다음 날,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있었다. 몸만 그 자리에 있었지, 혼은 반쯤 가출한 상태였다. 가출한 영혼은 도둑맞은 자전거를 찾아 미국 전역을 떠돌고 있었다. 학장님이 뭔가 감동적인 말씀을 한 것 같은데, 끝나고 나서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는 걸 보면 말이다. 당시 자전거는 맥북 다음으로 가장 비싼, 나의 재산 목록 1호였다. 월급을 모아 다시 살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수입이 없던 유학생 시절에 이런 도난 사건은 치명타였다.


달콤했던 미국과의 허니문 피리어드는 그렇게 끝나버렸다. 한껏 부풀었던 풍선은 팡 터져 프스스 쪼그라들었다. 다 때려치우고 한국으로 돌아가고픈 마음만 들었다.



3. 자전거 도둑 엿 먹이기 -  U락 활용법


이 트라우마 때문에, 가라지가 있는 집에 사는 지금도, 나는 자전거를 이렇게 보관한다. 자전거를 기둥에 U락(U-Lock)으로 한번 묶고, 프레임을 뒷바퀴나 앞바퀴에 U락으로 한 번 더 묶어 이중 락을 건다. 와이어는 맘먹으면 얼마든지 끊을 수 있어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 (물론 U락도 끊을 수 있지만 시간이 더 걸리겠지). 좀 더 철저히 하자면 1) 자전거 프레임과 기둥 2) 프레임과 앞바퀴 3) 프레임과 뒷바퀴, 이렇게 삼중 락을 거는 방법도 있겠다. 이중 락은 자전거를 도둑맞아 울먹거리는 나에게 자전거 샵 아저씨가 알려준 방법이다.


왼쪽, 가운데 사진: U락을 이중으로 걸어야 그나마 도난을 방지할 수 있다 | 오른쪽 이미지: 자전거 묶기의 정석 (출처: sfbike.org)


위에서 내가 묶은 방법도 완벽하진 않다. 기둥만 자르면 얼마든지 자전거를 가져갈 수 있으니까. 오른쪽 사진은 'sfbike.org'라는 샌프란시스코 자전거 보호 단체에서 가져온 이미지인데, 보다시피 '기둥 + 프레임+ 뒷바퀴'를 U락으로 한꺼번에 묶고, 앞바퀴는 와이어로 연결했다. 이처 'rear triangle'을 사용하는 것이 정석이다. 물론 이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도 '비싼 자전거'라면 소용없을 것이다.


자전거 보관 시 기억할 5가지

1. 기둥 + 프레임 + 뒷바퀴 'rear triangle' 활용
2. 자전거 프레임과 바퀴 함께 묶기
3. 지면에 고정된 폐쇄형 시설에 묶기
4. 끊기 쉬운 와이어 대신 U락(U-Lock) 사용
5. 안 탈 때는 집 안에 보관 (밖에 놓아두면 그냥 가져가란 소리)


미국에 어떤 연고도 없이 막 랜딩한 나 같은 새내기 (newbie) 들은, 대학 도시와 캠퍼스에 자전거 도둑이 득실댄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다. 그래서 U락으로 자전거 바퀴만 랙(rack)에 묶거나, 끊기 쉬운 와이어를 사용하는 등, 허술함을 남긴다. 이 허점을 잘 아는 자전거 도둑들은 랙에 묶인 바퀴는 놓아두고, 비싼 몸통만 쏙 훔쳐 가거나 자전거 파트를 모두 해체해 장물로 내다 판다.


하지만 위의 사진처럼 이중 락을 사용하면, 적어도 타이어만 빼고 몸체만 쏙 훔쳐 가는 놈들에게 엿을 먹일 수 있다. 뭐 훔칠 마음을 먹었다면야 무슨 일인들 못 할까만, 이 쇳덩이 U락 2개와 자전거 프레임을 전기톱으로 분리해 가져 가려면 꽤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무거운 교과서가 든 가방에 U락을 두 개나 가져 다니기는 부담스럽다. 하지만 자전거 도둑이 득실거리는 미국의 대학도시에서, CCTV 하나 없는 공용 가라지에서,  이 정도 오버는 해야 유학 기간 내 발이 되어 줄 소중한 자전거를 지킬 수 있다. 그게 싫다면, 갖다 줘도 버리고 싶은 고물 자전거를 타던가.



4. 샌프란시스코의 자전거 시체들


자전거 도난 사건, 이것은 단지 미국 대학 도시만의 문제는 아니다. 워낙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학생들이 많으니, 대학 도시가 자전거 도둑들의 주 표적이 되긴 하지만, 치안이 허술하고 CCTV 없는 (프라이버시 문제로 CCTV 규정이 까다로움) 미국에서는 대도시, 소도시 가릴 것 없이 번번이 일어나는 사건이다.


미국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전거 시체

가끔 샌프란시스코 거리를 산책하다, 바퀴는 댕강 날아가고 자전거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있는, 몸통은 온데간데없고 바퀴 하나만 달랑 묶여 있는 자전거 시체를 종종 목격하곤 한다. 남의 일 같지 않아 그 황량함을 그냥 지나치질 못한다. 어느 불쌍한 한 영혼이 자전거를 도둑맞고 안절부절못하고 있겠구나. 복수심에 끓어올랐다, 무기력에 빠졌다를 반복하고 있겠구나. 자전거를 도둑맞은 헛헛한 상실감은 그걸 당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어쩌면 미국은 ‘치안’ 면에서 결코 믿을 곳이 못 된다는 경고장을 너무 일찍 받은 것일지도 모른다. 미국에 10년째 살면서 이곳이 안전한 나라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안전’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를 차지한다면, 미국행을 다시 고려해 볼 법하다. 특히 한국, 싱가포르와 같이 높은 수준의 치안을 이미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뭐 이런 나라가 다 있어. 미국, 강대국 맞아...?’ 하는 생각이 불쑥불쑥 올라올 것이다. 끊임없는 총기 사건, 살인, 도난 사건에 굳은살이 박여, 어떤 사건에도 시큰둥한 미국 경찰을 보면, 정나미가 뚝 떨어져 (그나마 안전한) 한국이 절로 그리워진다.


달콤씁쓸 허니문 한 달이 가고...


2주 동안 나의 발이 되어 준 '포카리스웨트'는 그렇게 떠났고, 울며 겨자 먹기로 저렴이 버전, 중고 자전거를 샀다. 이로써 오래 품어온 ‘자전거 로망’은 와장창 깨지고 초기 유학 자금에도 펑크가 났지만, 대신 몇 가지를 건졌다. 구름에 동동 뜬 마음에, 유학 기간만큼은 미니멀리스트가 되자던 나의 결심은 온데간데없어졌다는 걸 깨달았고,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1) 유학 기간 소유욕은 제발 갖다 버리자

2) 정 물건이 필요하다면, 그 누구도 탐내지 않는 저렴이 버전으로

3) 미국 경찰은 절대 믿지 말자 (범죄와 한 편인 인간들도 많다 하니)

4) 앞으로 내 몸과 물건은 내가 지킨다

5) 돌이킬 수 없는 일은 얼른 흘려보내고 앞으로 나아갈 것


미국의 탁 트인 자연환경, 널찍한 단독 주택이 끝없이 펼쳐진 거리, 고풍스러운 캠퍼스에 취해, 순진하게 꿈에만 부풀어있던 서울 촌년의 어리숙함은 내려놓고, 냉정한 현실을 직시했다. 학교 등록과 거주 관련 행정 업무가 마무리되었을 무렵, 첫 학기가 시작되었다. 달콤씁쓸 미국 정착 허니문 한 달은 이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가을, 첫 학기가 시작되었다.


가을의 캠퍼스   © 지나쥬르


※ 이미지 출처: 지나쥬르 사진첩, ggwash.org, thebestbikelock.com, sfbik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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