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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쥬르 Jul 27. 2022

7. 달콤씁쓸 미국 정착 허니문

#7. 미국 대학원 시작 전 1달, 슬기로운 시간 사용법


8월 31일, 나는 미국 시카고 오헤어(Chicago O’hare)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일본 나리타 공항 경유 2시간 포함, 인천-나리타-시카고 약 15시간의 비행 후, 짐 가방 두 개와 함께 미국 땅에 착륙했다.


이민 가방 하나는 동대문에서 산 싸구려 옷 가방이라 그런지, 내용물이 튀어나올 정도로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경유 티켓을 산 것도 동대문 옷 가방을 산 것도, 모두 유학 비용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전 재산은 이미 탈탈 털어 유학비로 쏟아부었고, 당분간은 수입도 없을 테니 가난한 유학생 시절의 시작이구나.


유럽은 대학교 때 배낭여행 등으로 몇 번 가본 적이 있었지만, 미국은 생전 처음이라 모든 것이 생소했다. 어리바리 좌충우돌 끝에 집에 도착했다. 택시가 도착하고 짐을 내리는 소리가 들렸는지, 3층에서 룸메이트가 손을 흔든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미국의 낡은 3층짜리 아파트였다. 룸메이트는 위에서 가방끈을 잡고, 나는 가방 밑을 받치고, 둘이서 낑낑대며 3층으로 이민 가방을 옮겼다. 자취방은 3평 남짓, 침대, 책상, 옷 서랍장이 하나씩 들어가면 꽉 차는 아담한 사이즈였다. 방이 크든 작든, 상상 속에서만 그리던 미국에 도착했다는 것이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낯선 환경에, 흥분되는 마음에, 첫날은 잠을 설쳤다.



허니문 피리어드


‘허니문 피리어드(honeymoon period)’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한자어로는 '밀월기(蜜月期)’라고도 하는데, '결혼 직후의 꿀같이 달콤한 달', 즉 어떤 일을 새롭게 시작한 사람에게, 비판이나 평가하지 않고 적응할 시간을 주는 기간을 의미한다. 직장에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새내기(newbie)에게 ‘S/he’s in her/his honeymoon period’라고 하면, '그저 회사의 장점만 보이는 달콤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난생처음 와 보는 미국, 허니문 피리어드가 시작되었다. 할리우드 영화나 미드를 보면 오래된 나무가 드리워지고, 담쟁이덩굴이 벽을 타고 올라가는 고풍스러운 미국 캠퍼스가 나온다. 내가 정착하게 된 이곳, 에반스톤(Evanston)은 작지만 단정하고, 아기자기함이 곳곳에 숨겨진 대학 도시였다. 일을 보러 나갈 때마다 생경한 풍경에 설레었다. 교외의 장점을 살린 널찍한 평수의 미국 주택, 세심하게 가꾸어진 정원, 곳곳에 심어진 아름드리나무들. 외출할 때마다 걷는 길을 조금씩 달리해, 매일 새로운 풍경을 눈에 담고 특별히 기억하고 싶은 앵글은 카메라에 담았다.


하루는 도서관 출입증을 만들고, 그 참에 도서관 투어를 하다 'Deering Library'라는 곳을 발견했다. 여러 건물이 미로처럼 연결된 거대한 도서관이었다. 하루는 영어 과제를 하려고 자리를 잡았는데, 도서관의 고풍스러운 자태에 넋이 나가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햇살만 잔뜩 쪼이다 나왔다. 훗날 어려운 리포트를 쓸 때마다 성지처럼 이곳을 찾았다. 왠지 좋은 영감이 떠오를 것 같아서. 이도 근사했던 'Deering Library', 나에게는 'Dearing Library'가 되었다.


고풍스러운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아름다웠던 Deering Library   © 지나쥬르


학기 시작 전 1달을 공략하라


미국에 도착한 시기는 첫 학기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1달 전이었다. 일찍 도착한 이유는 나처럼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외국인 학생들을 위한 2주간의 영어 수업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많은 행정 업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허니문도 허니문이지만, 학기가 시작하기 전까지 끝내야 할 목록이 기다리고 있었다.

1. 거주지/방 세팅
2. 은행 계좌 트기
3. 핸드폰, 컴퓨터, 인터넷 세팅
4. 건강검진
5. 교재 구입
6. 네트워킹 (선배, 동기)
7. 캠퍼스, 동네 지리 파악


언뜻 보면 간단한 'to do list'처럼 보이지만, 1달 안에 이 리스트를 모두 마무리하려면 매일 뽈뽈거리며 바쁘게 몸을 움직여야 했다. 여기에 2주 영어 수업까지 있었으니, 일정은 더 빠듯했다.


1. 거주지/방 세팅


첫 IKEA 조립 완성작.  © 지나쥬르

내가 처음 착수한 것은 바로 자취방 세팅이었다. 미국에 도착했던 바로 그다음 날인 9월 1일, 고맙게도 룸메이트는 IKEA에 갈 일이 있으니, 이참에 같이 가자고 했다. 당시 교통수단도 없었으니, 당연히 오케이! 여독이 풀리기가 무섭게 IKEA에 떴다. 이래서 처음에는 룸메이트가 있는 집을 구하는 것이 좋다. 구입해 온 가구는 책상, 서랍장, 책장 - 짬 날 때마다 조금씩 조립해, 완성하는 데 총 5일이 걸렸다. 나머지 가구들(침대 프레임, 매트리스, 의자, 탁자)은 졸업하는 선배로부터 120불 정도에 구입했다.


IKEA 조립 고수가 되어보자.  © 지나쥬르


2. 은행 계좌 트기


I-20, F-1 비자, 예치할 현금 등을 포함해 필요 서류만 제대로 구비해오면 바로 통장을 개설할 수 있다. 이 부분은 어렵지 않았다. 미국은 법적 신분과 돈만 있으면 많은 것이 해결되는 나라다.


3. 핸드폰, 컴퓨터, 인터넷 세팅


가장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던, 골치 아픈 부분이었다. 특히 한국에서 쓰던 핸드폰이 있다면 반드시 ‘언락 (unlock)’해서 가져와야 미국 번호를 개통할 수 있다. 인터넷 뱅킹 관련 소프트웨어도 컴퓨터에 미리 다 깔고 오는 것이 좋다. 한국 인터넷 뱅킹은 미국에 비해 매우 까다로운 편, 이것저것 깔아야 하는 것이 정말 많은데, 이 소프트웨어들은 방화벽 때문인지, 미국에선 쉽게 설치되지 않는다. 본인 인증을 위한 아이핀이나 한국 알뜰폰 하나쯤은 준비해 오는 것이 좋다.


컴퓨터는 학교에서 사용하는 소프트웨어(예: MS Office, SPSS)를 묶어 파는 경우가 있어 미국에서 바로 구입하는 것이 낫다. 여력이 있다면, 한국에서 랩탑을 여분으로 하나 더 가져오는 것이 좋긴 하다. 같은 반 친구가 내 맥북에 물을 흘려 랩탑이 먹통이 된 적이 있다. 수리하느라 1주일 동안 도서관 공용 컴퓨터 앞에서 밤을 지새워야 했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 랩탑이 하나 더 있으면 좋다는 말. 


4. 건강검진


당시에는 동양계 학생들 대상으로 결핵 검사를 엄격하게 했는데, 요즘엔 달라졌을 수도. 한국에서 병력이 있으면 증명서를 가져오는 것이 좋다. 8월에 했던 수술 관련 서류를 혹시나 해서 가져왔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걸 제출해야 했었다.


5. 교재 구입


학기 시작 1~2주 전에는 교재 목록이 나왔던 걸로 기억한다. 미국 대학/대학원 교재는 가격이 어마어마해서, 한 학기 교재와 관련 도서를 구입하면 적어도 500불이 넘게 나온다. 다행히 알게 된 선배님이 있어, 교재 몇 개는 공짜로 물려받고, 남은 책들은 새 걸로 구입했다.


6. 네트워킹


시간이 허락한다면, 학교 선배나 동기들을 미리 만나, 교수님이나 수업 내용, 과제의 종류에 대해 미리 알아두자. 꼭 정보를 ‘취득’ 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정보와 함께 사람을 두루두루 알아두면, 알게 모르게 도움이 된다. 아직 미국에 살면서도 가장 힘든 부분이 바로 ‘사람 찾기’다. 뭔가 물어보거나, 일을 맡기거나, 도움을 요청할 '사람 찾기' 말이다. 무조건 인맥을 넓힌다기보다, 진정성 있고 믿을만한 친구를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7. 캠퍼스, 동네 지리 파악


학기가 시작하면 돌아다닐 시간이 별로 없다. 캠퍼스 건물, 도서관, gym, 문구점, 음식점, 동네 슈퍼마켓, 철물점 등 기본적인 샵들은 어디에 있는지, 지역 파머스 마켓(Farmers' Market)은 언제 들어서는지, 미리 알아두는 것이 좋다. 공부 못지않게 먹고사니즘도 중요하다. :)


에반스톤 (Evanston) 파머스 마켓, 적당한 가격에 신선한 제품이 많다   © 지나쥬르


시간이 허락한다면 동네 탐방도 해보시길. 공부 스트레스가 심할 때 찾아갈 만한 카페라든지, 힐링 스팟을 찾아두어도 좋다. 여름의 끝자락, 선선한 가을이 성큼 다가오던 어느 주말, "나, 정말 멋진 곳을 발견했어!" 라며 흥분해 전화한 친구와 함께 '바하이 템플(Bahai Temple)이라는 곳을 찾았다. 알고 보니, 작은 도시 에반스톤의 꽤 유명한 관광지라고 한다. 이국적인 건축물, 작지만 산책하기 좋았던 정원, 분수에서 쏟아지는 시원한 물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평안해지는 시간이었다.


바하이 템플 (Bahai Temple)   © 지나쥬르


위에서 언급했던 2주간의 영어 수업은 학교에서 외국인 학생들에게 제공하는 ‘옵션’이었다. 한마디로 본인이 영어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되면 그냥 스킵해도 되는 ‘준비 운동’ 클래스다. 학교마다 수업 제공 여부는 조금씩 다르겠지만, 만약 옵션이 있다면 꼭 들어볼 것을 권한다. 특히 나처럼 미국 체류 경험이 없는 사람들을 이 ‘준비 운동’ 기간을 통해, 미국에서의 생활력을 기르고 학기를 시작하는 것이 좋다.


수업 때 배우는 내용도 내용이었지만, 동네 상점 직원 인터뷰, 팀 프레젠테이션 등의 과제를 통해 6, 7번 (네트워킹, 동네 지리 파악)을 해결할 수 있었다. 쿠킹 클래스나 시카고 유람선 투어 같은 ‘재미’와 ‘소셜라이징’ 측면이 많긴 했으나, 이때 친해진 친구들은 학교 다니던 내내, 의지가 되었다. 미국에 별 연고가 없는 국제 학생들에게는 서로 으쌰 으쌰 하며 도와줄 수 있는 우군을 만들 수 있는 장이기도 했다. 이때 자주 뭉쳐 다니던 친구들이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80%가 미국에서 취직하고 영주권을 받아 이곳에 남았다. 물론 개인적인 노력이 컸겠지만, 초반부 영어 수업을 통해 얻은 안정감과 자신감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싶다.


2주간 영어 수업을 함께 했던 친구들, 지금 보니 여초 현상이군... ㅎ


이 수업에서 최종 과제로 했던 동네 상점 직원 인터뷰는, 사실 1학기 (악명 높았던) Consumer Insights 수업의 준비 과정이기도 했다. 에반스톤의 상점 중 본인이 원하는 곳을 선택해 직원을 인터뷰하고, 인터뷰 내용을 정리해 발표하는 것이 미션이었다. 지금 막 미국 땅에 랜딩한 외국인 학생이, 처음 보는 상점 직원에게 다가가 생뚱맞게 '나 인터뷰 좀 해주쇼' 하고 부탁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미션이었다. 하지만 이 과정을 미리 예습했기에, 인터뷰 리포트가 학점의 50% 이상을 차지했던 Consumer Insights 수업에 자신감을 가지고 임할 수 있었다.




1주간의 준비 기간, 2주간의 영어 수업이 끝날 무렵, 곧 가을 첫 학기 오리엔테이션이 있을 거라는 공지를 받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에게 미국은 그저 자유롭고 광활하고 아름다운, 기회의 땅이었다.


인생은 장밋빛, 마음은 구름에 동동. 그런데 이 허니문 기간도 그리 길게 가지는 못했다.




※ 이미지 출처: 지나쥬르 사진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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