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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쿨한 언니의 따뜻한 잔소리

Scene 1. 시간의 여백

by 쏘쿨쏘영

2013년 1월 즈음 없는 살림에 어렵게 샀던 오래된 삼성 노트북을 들고 아침 일찍부터 동네 근처 스타벅스 매장에 눌러앉았다.


원체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스타벅스 커피는 아무래도 비싸기 때문에 부담스러워서 매장에 자주 들르지는 않는 내가, 오늘은 왠지 이 매장에 눌러앉아 글을 쓰면 글이 술술 써질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이다, 라는 것은 변명이다.


그냥 스타벅스 매장에 앉아 컴퓨터 앞에서 글을 쓰고 있으면 스스로 멋져 보이지 않을까 하는 나만의 속물근성이 발동한 것이다.

그리고, ‘여는 글’을 쓴 후 도무지 진도가 안 나가는 글쓰기 작업에 무언가 나만의 재미를 부여해야겠다 싶었다.


겨울이 지나고 초봄의 기운이 찾아오는 요즘, 집에서 시간만 죽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초조함과 무료함에 나는 계속 슬럼프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남들은 바쁘게 출근하고 있는 오전 시간에 유한마담 (왠지 ‘신여성’이라는 단어처럼 구한말 시대에나 쓰던 단어이기는 하지만)처럼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는 것만 같은 이 불편한 여유.


오랜만에, 아니 어쩌면 내 인생에 처음으로 주어진 온전히 나만을 위한 여유 시간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마음 불편한 상태로 일상을 채우고 있는 듯한 느낌.


그래서, 글쓰기를 다시 시작했다.

아니,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잉여인간으로 살고 있지 않다는 내 방식의 항변이라도 해야, 이 초조함, 좌절감과 무력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에게 주어진 이 시간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화실에 나가 그림도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못 그리든 잘 그리든 그림을 그리고 있는 시간만큼은 온전히 도화지에 빠져 들었었다. 국민학교 시절에는 그림으로 상도 곧잘 타곤 했다.


다행스럽게도 동네 근처에 새로운 아뜰리에가 생긴 것을 산책길에 우연히 발견했다. 곧장 아뜰리에를 방문해서 취미반을 등록했다. 난 하고 싶은 것이 있을 때 시간 지체하지 않고 바로 해버리는 성격의 사람이다.

어릴 적 기억을 되살려, 나를 행복하게 해 주는 그림 그리기로 시간을 채우자 우울했던 기분이 그제야 나아지기 시작했다.


내가 다니는 아뜰리에의 원장님은 프랑스에서 오랫동안 유학하신 분이시다. 이 책의 제목을 제일 먼저 화실 선생님께 알려 드렸더니, 당장 읽고 싶어지는 책 제목이라고 칭찬해 주셨다.


젊은 나이의 원장님은 공감과 이해를 잘해주시는, 리액션이 순수하게 좋은 분이다. 그래서, 예술을 하시나 보다.

나이를 떠나 좋은 친구가 생긴 것 같아 기쁜 마음이다.


화실에서 그림을 그릴 때, 손으로는 붓을 열심히 놀리고, 잠깐 쉬는 시간에는 원장님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게 된다.


며칠 전 꽃 그림을 그리면서 장미꽃들과 유칼립투스 다발 사이의 흰 여백에 대해 원장님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선생님. 장미꽃들과 나뭇잎 사이의 흰 여백들을 이렇게 내버려 두어도 괜찮을까요? 배경 색깔로 좀 채워 볼까요?” 내가 질문했다.


원장님은 “꼭 안 채우셔도 괜찮아요.” 하고 대답했다.


“그렇겠죠? 그런데, 전 옛날 국민학교 미술 시간에 받은 교육 탓인지, 흰 배경 안 보이도록 빽빽하게 다 칠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있는 것 같아요.”라고 내가 다시 얘기했다.


이에, 원장님이 말했다.

“캔버스에 공백이 있어야 멋진 그림이 나오듯이, 시간에도 공백이 있어야 하는데……. 시간의 공백을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시간의 공백이 있는 게 옳은 것인지 죄책감이 든다는 사람들도 있고…….”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정말 마음속으로 울컥 눈물이 나왔다.


지금의 내 심정과 상황을 이보다도 더 따뜻하게 감싸주는 위로의 말을 해 준 사람은, 나 자신 외에는 이분이 처음이었다. 젊은 나이에도 깊이 있는 생각을 가진 분이로구나. 위로받고 있고 이해받고 있다는 느낌만으로도 마음이 평온해졌다.


집으로 돌아온 후, 마음속으로 그 화두를 계속 곱씹어 보았다.


캔버스에 공백이 있어야 멋진 그림이 나오듯이, 우리가 사는 시간에도 공백이 있어야 아름다운 인생의 그림이 나오게 된다. 하지만, 시간의 공백을 무서워하는 현대인들이 너무나도 많다.


나도 계속 마음이 바쁜 삶을 살아오다 보니, 지금 이 시간의 여백을 온전히 즐기지 못하고, 무언가에 여전히 쫓기는 마음이었다.


어떨 때는, 스케치의 흰 여백을 빽빽하게 채우지 않으면 야단맞았던 국민학교 시절처럼, 나에게 시간의 공백이 있는 게 옳은 것인지 죄책감이 들 때도 있다.

마치 쓸모없는 잉여 인간으로 전락해 버린 듯한 죄책감.


원장님이 프랑스에서 공부할 때 교수들과 외국 작가들에게 자주 받았던 질문이 있다고 한다.


‘여백은 한국화에서 만들었는데, 왜 요즘 너희 (한국)는 그 여백을 즐기지 않니?’


때로는 우리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우리 자신의 장점과 단점들을 외부인들의 객관적인 시각을 통해 알아가는 경우가 많다.


‘여백의 미’라고 흔히 일컬어지는 한국화의 여백.

그런데, 우리가 만든 여백을 왜 우리는 이제 즐기지 못하고 있는가? 의미심장한 화두이고 깨달음이었다, 지금의 나에게도.

시간의 여백을 온전히 음미하지 못하고, 어리석게도, 주어진 여백들을 꾸역꾸역 채워 가려고 노력하고 있는 내가 미련해 보이기도 하고 안쓰러워 보이기도 하는 화두였다.

누구에게나 휴식은 필요하다.

봄 여름 가을, 열심히 잎과 꽃들을 길러내던 나무도 겨울이면 쉬어간다. 겉으로 보기엔 죽은 듯이 보여도 혹독한 추위 속에 꿋꿋이 물줄기를 이어가며, 쉬어간다.


그 휴식은 죽어있는 시간이 아니라 따뜻한 봄을 기다리는 기다림의 시간이다, 나무에게는.


시간의 여백이 주어졌다면 그저 감사하게 생각하고 쉬자.

휴식. 거기에 뜻이 있다. 의미가 있다.


아니, 또 다르게 생각해 보니,

‘굳이 휴식에까지 의미를 부여해야만 하나?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쉬어도 괜찮잖아.’라는 생각까지 해보게 된다.


굳이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무거운 휴식이 아니라 가벼운 휴식을 즐겨 보도록 노력하자.


화실에서 나눈 일상의 대화들 속에서, 선한 눈빛을 가진 분들과의 대화에서 많은 영감을 받은 하루였다.

선한 사람들을 알아 가는 것, 인생을 살아가는 큰 행복 중 하나이다.

큰 선물을 받은 것 같아 오늘 마음이 따뜻해졌다.

감사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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