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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책방 Apr 10. 2024

디그니타스, 존엄사 단체에 가입하다.

비탈진 내리막에서

나는 정신과에서 처방받은 우울증 약을 먹고 극심한 무기력증으로 3일 동안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강도 높은 우울감과 공포감, 자살충동에 시달렸고 그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우울증 약의 부작용이 아이러니하게도 우울증과 자살충동이라는 것을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살면서 힘든 일을 겪었을 때 문득 ‘죽고 싶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엄청난 강도의 우울감과 자살충동이었다. 당장이라도 창밖으로 뛰어내릴 것만 같았고 목을 매달아 죽는 상상이 계속되었다. 도저히 내 의지로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강한 감정이었다. 병원에 전화해서 항의를 했지만 처음 복용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이니 1-2주만 참고 계속 복용하면 효과를 볼 수 있을 거라는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당장 1분 1초도 견디기 힘든데 1-2주를 더 먹어보라는 말에 화가 솟구쳤다. 나는 그렇게 우울증 약 단 한 알을 복용하고 꼬박 3일 동안 일어나지도 못하는 무기력한 상태로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음식도 거의 먹지 못한 채로 물밀 듯이 밀려오는 강한 우울감과 자살충동으로부터 나를 지켜내고자 내 자신과의 치열한 투쟁을 하며 극도의 고통에 시달렸고 그렇게 3일이 지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극심했던 증상들이 사라졌다. 약이 안 맞는 경우에도 그럴 수 있다는 말에 약을 바꿔보기도 하고 병원도 옮겨봤지만 그때마다 끔찍한 부작용에 시달렸을 뿐이었다. 어떤 약은 부작용으로 엄청난 공포감과 불안감이 밀려왔는데 한시도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는 강한 불안감에 하루 종일 무섭다고 소리를 지르며 집안을 뛰어다니기도 했다. 그야말로 사이코드라마 한 편을 찍는 듯한 느낌이었다. 불안과 공포의 실체는 없었다. 환각이 보이는 것도 아니었고, 환청이 들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실체가 없는, 공포와 불안이라는 감정만이 극대화된 상태였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아무리 설명을 한다 한들 절대 이해하기 힘든 감정일 것이다. 우울증이 없는 사람이 우울증 약을 복용하면 부작용을 심하게 겪을 수 있다는데 내가 우울증이 맞긴 한 건지 의심도 들었다. 휴직을 하기 전에 갑작스러운 불면증으로 근무지 근처 정신과에서 처음으로 수면제를 처방받아 복용한 적이 있었는데 어떤 주의사항이나 설명도 없이 처방을 해주길래 별생각 없이 매일 한알씩 복용을 했다가 심하게 부작용을 겪고 나서야 수면제가 얼마나 무서운 약인지 알게 된 적이 있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정신과 치료에 대한 불신이 깊어졌다. 솔직히 우울증이라는 게 정확히 진단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무조건 병원에 온 환자들에게 약부터 처방하고 보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무분별하게 처방하기에는 너무나 무서운 약들이었다. 나는 정신과 치료는 더 이상 시도해보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다양한 신체증상들의 원인을 알 수 없으니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갑자기 팔다리에 힘이 빠지고 식욕이 너무 떨어져서 밥 한 숟가락을 뜨는 것조차 괴롭게 느껴졌고 속이 메스껍고 심장이 심하게 뛰기도 하는 등 다양한 신체증상이 매일 강도를 달리하며 나타났고 항암제 후유증으로 인한 갱년기 증상도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열이 오를 때면 머릿속부터 얼굴까지 땀범벅이 되었는데 수시로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대도 속눈썹에까지 땀이 맺힐 정도였다. 그러다가 금세 몸이 추워질 때면 마치 몸속에 얼음이 들어있는 것만 같은 강한 오한으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몸을 바들바들 떨 정도였다. 날로 심해지는 갱년기 증상과 알 수 없는 신체증상으로 결국 나는 요양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3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요양병원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입원을 해서도 수시로 나타나는 신체증상 때문에 서울에 있는 여러 대학병원을 찾아다니며 이상증상들의 원인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온갖 검사를 받아봐도 원인을 찾을 수가 없었고 이런 일이 반복되자 요양병원 의사 선생님들조차도 우울증을 의심하고 우울증 약을 다시 복용해 볼 것을 권하셨고, 그로 인해 입원 중에 또 한 차례 우울증 약 복용을 시도해 봤지만 약만 먹으면 무기력증과 공포감이 평소 증상이 심한 날보다 10배는 더 강하게 나타났기 때문에 약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자꾸 우울증으로 몰고 가는 의사 선생님들로 인해 나는 답답하고 억울한 마음이 들었는데 내 억울함이 풀리게 된 사건이 하나 있었다. 나한테 나타나는 신체증상들은 매일 다른 종류와 다른 강도로 나타났는데 상태가 조금 괜찮은 날이면 나는 분주하게 이것저것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책을 읽거나 영어공부를 하기도 했고 보고 싶었던 드라마를 정주행 하며 즐거워했고 같은 병실의 환자들과 폭풍수다를 떨기도 했다. 조금이라도 컨디션이 좋은 날은 활기차게 하루 종일 분주히 움직이는 나를 지켜본 다른 환자들과 간호사들은 내가 우울증 일리 없다고 확신했고 급기야는 의사 선생님께서 회진을 도실 때 간호사를 포함한 같은 병실 환자들 모두가 한 목소리로 내 편에 서서 이 환자가 우울증 일리 없다고 나를 대변해 준 것이다. 환자들과 간호사는 꽤 적극적으로 본인들이 지켜본 내 모습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했고 우울증 환자가 저렇게 의욕이 많고 하루 종일 분주할 수는 없지 않겠냐고 하면서 나를 대신해 항변을 해주었던 것이다. 그제야 요양병원의 의사 선생님들도 내 몸에 나타나는 이상 증상들에 대해 다른 가능성을 염두해 보게 되었고 의사 선생님들과 간호사들은 각종 추측을 내놓았는데 시름시름 앓고 있는 나를 안타깝게 지켜보던 중년의 간호사는 항암제 부작용으로 나타난 갱년기 증상 중 하나가 아닌지 추측을 했다. 갱년기 증상은 사람마다 강도가 다르게 나타나는데 심한 사람은 아예 앓아눕는다는 것이었다. 본인 또한 갱년기 증상을 심하게 겪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극심한 불안감과 함께 다양한 신체증상들이 나타났는데 본인이 겪었던 증상들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었다. 중년의 간호사는 한참 동안 나와 대화를 나누며 갱년기 증상으로 오랫동안 매우 힘든 시간을 보냈던 본인의 경험담을 얘기해 주었다. 이후로도 나는 내 몸에 나타나는 이상 증상들의 원인을 찾기 위해 여러 대학병원을 다니며 온갖 검사들을 하고 의료쇼핑을 하다시피 했는데 이렇다 할 원인은 찾지 못했고 내 증상은 점점 더 악화되어 갔다. 그러던 중 건강검진차 받았던 뇌 MRI 검사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뇌종양이 발견되어 나는 또 한 번 큰 충격에 휩싸였다. 청신경초종이라는 뇌종양으로 결국에는 한쪽 청력을 반드시 잃게 될 것이라는 사실과 심한 경우 안면마비등의 심각한 부작용을 겪을 수 있다는 진단을 받게 되었고, 그로 인해 내 불안감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어느 날은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침대가 흔들리는 느낌이 들어 지진이 난 줄 알고 잠에서 깼는데 알고 보니 침대가 흔들린 것이 아니라 내 몸에서 경련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 증상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증상 중 하나인데 강할 때는 경련, 약할 때는 진동의 느낌이었다. 마치 하루종일 시동 걸린 차에 앉아 있는 듯한 기분이었고 온몸에서 휴대폰 진동이 울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경련이 심할 때는 시야까지 흔들렸고 속이 울렁거렸으며 경련이 일어나는 부위의 근육이 움찔움찔거리거나 튀는 것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도대체 내 몸에서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황에 나의 불안감은 점점 증폭되어 갔는데 정신과약 부작용으로 느꼈던 실체가 없는 공포와 불안감이 아니라 유방암과 뇌종양, 그리고 원인을 모른 채 겪고 있는 다양한 신체증상들과 관련하여 질병이 악화될 상황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등으로 나의 불안감은 점점 구체화되어 갔고 그것은 급기야 죽음에 대한 공포, 정확히 말하면 죽음에 이르기까지 극심한 고통을 겪으며 처절하게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어려서부터 많은 드라마나 다큐를 통해 암환자가 얼마나 고통스럽게 죽어가는지를 봐왔었다. 그 장면들이 내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여 깊이 각인되었고 그것들이 지금의 공포를 만들었으리라. 그렇게 나는 또다시 죽음에 대한 공포에 잠식되어 갔고 나는 마치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여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가장 무서웠던 것은 영원히 이 공포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평생 이러한 감정을 가지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앞으로 내가 얼마를 더 살든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 같았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인생길이기에 어쩌면 우리는 누구나 매일매일 삶과 죽음에 경계에 놓여 있는지도 모른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겪게 될지 모르는 끔찍한 고통에 대한 두려움. 이 문제는 누구나 한 번쯤은 인생에서 직면하게 될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동안 살면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생각은 끊임없이 해왔지만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계속되는 육체적 고통과 불안감으로 인해 나는 그동안 살면서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생각들을 하게 되었고 최소한 나의 죽음은 처절한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나를 지켜보는 가족들까지 고통 속에 몰아넣고 병원비와 간병비로 재산을 전부 탕진하고 생을 마감하고 싶지는 않았다. 태어나는 것은 내가 선택하지 못했지만 죽는 것은 내가 선택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한테 중요한 게 삶입니까, 생명입니까?” 존엄사에 대한 질문에 우리나라의 한 의사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그는 이어 말한다. “특히 말기 상황에서는 언젠가는 생명이 끝나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건 남아있는 삶을 어떻게 존중해 줄 것인가, 삶을 완성시킬 것이냐가 중요한 것이지, 그 시점에 생명 경시의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존엄사를 허용하는 국가들은 네덜란드, 스위스, 벨기에, 캐나다, 미국등 다양한 나라들이 있지만 스위스의 존엄사 단체만이 외국인의 가입을 허용한다. 존엄사를 시행할 수 있는 대상의 범위와 방법에는 단체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현대의학으로 치료가 불가능한 불치병 및 죽음이 예정되어 있는 중병말기등을 이유로 더 이상 치료를 지속하면서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의미 없다고 판단되는 경우 고통 없이 죽음에 이를 수 있도록 의사가 처방한 약물을 환자 스스로 복용하게 하거나 직접 주사기의 밸브를 돌림으로써 편안한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행위이다. 존엄사에 관한 영상을 찾아보던 중 스위스의 존엄사 단체에서 생을 마감한 한 할머니의 영상을 보게 되었는데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입고 침대에 누워 밝은 표정으로 지인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편안하게 생을 마감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내가 직접 선택할 수 있다면 이것만큼 이상적인 방법은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렇게 나는 주저 없이 스위스의 존엄사 단체에 가입할 것을 결정하게 되었다. 영어실력이 좋지 못했기 때문에 해외에 있는 단체에 가입을 한다는 것이 처음에는 막막하게 느껴졌지만 간절하면 못 할 것이 없지 않은가. 나는 번역기를 이용해 존엄사 단체의 홈페이지에 있는 소개글과 가입절차 등을 확인했고 혹시나 번역기의 오류가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가입서류를 작성할 때는 번역가에게 비용을 지불하고 번역을 의뢰해 서류를 작성하고 가입 신청서와 회원비를 스위스로 발송했다. 그렇게 나는 스위스에 있는 ‘디그니타스’라는 존엄사단체에 회원으로 가입을 하게 되었다.

     

존엄사 단체에 가입 후 우연히 보게 된 한 블로거의 글을 통해 내가 한 결정에 대해 다시금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었는데, 그는 존엄사법의 제정을 위해 홀로 외로운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가 그런 활동을 하게 된 이유는 폐암으로 극도의 고통에 몸부림치며 돌아가셨던 선친의 죽음을 경험하고 나서부터였다고 한다. 폐암말기가 되면 폐가 점점 그 기능을 상실하여 숨을 쉬는 것이 힘들어지면서 생사의 경계를 드나들게 되는데 마치 누군가 서서히 내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극한의 고통과 공포를 경험한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고통스러운 얼굴과 몸짓으로 숨을 헐떡이며 질식의 고통을 호소하시다 돌아가셨는데 가족들을 위해 평생을 고생하셨던 아버지께서 죽을 때마저 지옥 같은 고통을 경험하고 가셨다는 생각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수년간 잠자리에 누울 때마다 아버지의 고통스러운 임종이 떠올랐다고 한다. 그리고 본인과 남은 가족들도 그러한 죽음을 맞을 수 있다는 생각에 두려운 마음이 들었는데, 우연히 존엄사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본 후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고통 없이 편안하게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비참하게 떠나보내야 했다는 사실에 후회와 분노, 아쉬움이 밀려왔고 ‘나를 비롯하여 나의 가족, 그리고 세상의 어느 누구도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지 않게 하리라’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입법청원을 위한 법안을 미리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존엄사 관련 법안의 초안을 작성하였고, 존엄사법 제정을 위한 온라인 청원뿐만 아니라 직접 광화문 광장에 나가 피켓시위까지 하며 존엄사법 제정을 위한 서명을 촉구하기도 했으며 국회의원들에게 이메일을 보내고 직접 사무실로 찾아가 존엄사법 제정의 필요성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급기야는 2017년 12월 18일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 심판까지 청구하였다. 헌법소원은 각하되었지만, 그는 국민들에게 존엄사법 제정의 필요성을 알리기 위해 블로그 활동에 집중하며 현재까지도 다양한 노력들을 하고 있었다.    

  

고통 없는 죽음인 것인가. 신의 영역에 대한 도전장인 것인가. 2022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회에 존엄사(조력사망) 법을 발의했다. 그리고 존엄사 법이 발의된 다음 날 노인단체에서 존엄사법 발의를 지지한다는 내용의 집회가 열렸다. 많은 노인들이 죽음 그 자체보단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직면하게 될 육체적 고통과 경제적 빈곤, 돌봄 등의 문제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존엄사에 반대하는 의견들에는 생명경시풍조를 가져올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있으며 경제적 지위와 사회적 관계 면에서 취약한 계층의 경우 자의가 아니라 떠밀리듯 죽음을 택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지만 국민의 82%가 존엄사법에 찬성한다는 여론 조사 결과가 나왔고 한국존엄사협회(Korea Association of Right to Die, KARD)가 설립되었다. 기사 글을 인용하면, 한국존엄사협회(Korea Association of Right to Die, KARD)는 죽을 권리에 관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존엄사가 제도화되는데 앞장서고자 2022년 2월 성균관대학교 법과대학의 교수님을 중심으로 몇몇의 의료인과 정치인 및 언론인, 법조인 그리고 여러 분야의 학자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되었다. 이들 모두는 모든 인간은 국적, 직업, 종교적 신념, 윤리적 및 정치적 견해에 상관없이 인생의 끝에서 다양한 선택의 가능성을 가져야 한다는 공통의 이념을 갖고 있다고 했다.   

   

유튜브에 ‘존엄사’로 검색을 하면 관련된 영상으로 일명 ‘저주받은 병’으로 불리는 CRPS(복합부위통증증후군) 환자들의 영상이 항상 같이 뜨는데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고통 중에 최상위 등급의 고통으로, 바람만 스쳐도 칼로 베는 듯한 고통을 느끼고 통증이 시작되면 기절을 할 정도라고 하니 그들의 고통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존엄사 관련 영상에 달린 댓글들 중에 기억에 남은 댓글이 하나 있었다. 자신을 요양병원에서 근무하는 직원이라고 소개한 그는, 중환자들만 모아놓은 방을 처음 봤을 때 그 어떤 영화를 봐도 그렇게까지 소름 끼치는 기괴한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모두가 똑같이 흰 짧은 머리에 뼈와 가죽만 앙상하고 줄줄이 인공호흡기와 각종 의료장치들을 달아 놓은 것을 보고 ‘이게 과연 인간인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누구나 그 방을 보게 된다면 왜 존엄사가 필요한 건지 알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치매는 또 어떠한가. 언제 갑자기 자아가 사라졌는지도 모른 채 서서히 내가 사라져 간다.

     

누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 하였는가. 요양병원에서 각종 의료장치의 줄을 주렁주렁 매달고 죽어가는 것이나 병상에 누워 어떠한 선택권도 없이 극한 고통 속에서 하루종일 투입되는 모르핀과 수면제에 취해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앙상하게 뼈만 남은 채로 죽어가는 것이 환자 자신이나 남은 가족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영국 켄트주 세븐오크스시 출신의 76세 노인은 스위스 바젤에서 친구와 동료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토록 원하던 존엄사(조력사망)를 맞이했다. 그의 마지막 길에는 음악과 샴페인 사랑하는 사람들이 동행했다. 즐겨 듣던 음악을 배경으로 샴페인 잔을 기울이고 아끼는 사람과 마지막 포옹을 나눈 노인은 침대에 누워 편안히 눈을 감았다.     


영국 태생의 호주 식물학자이자 생태학자인 데이비드 윌리엄 구달 박사는 104세에 스위스에서 존엄사로 생을 마감했다. “나는 늙고 있습니다. 시력을 포함해 내 모든 능력은 퇴화했습니다. 이제 나는 집에 24시간 갇혀있거나, 양로원에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행복하지 않아요. 죽고 싶어요.

슬프냐고요? 아뇨. 내가 슬픈 건, 죽어야 해서가 아니라 죽을 수 없어서입니다.”     


앞으로는 기대수명이 140세가 된다고 한다. 노인인구가 많아짐에 따라 간병의 문제도 빼놓을 수 없는 문제가 되었다. 2016년 이후 간병살인의 가해자의 수는 총 154명이라고 한다. 희생자 수는 213명에 달한다. 인구 10명 중 3명이 노인인 일본에선 해마다 40-50건씩의 간병 살인이 발생하고 있다. 요즘엔 특별한 뉴스 취급도 못 받는 흔한 일이라고 한다. 간병은 슬픔을 사육한다고 한다. 가해자들은 모두 희생적인 부모이거나 배우자, 효자, 효부로 불리던 사람들이었다. 끝 모를 간병의 터널에서 결국은 무너지고 만 것이다.    

 

많은 의료인들과 종교인들의 반대가 있을 것이고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시기상조가 될 것이 불 보듯 뻔하지만 의학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은 너무 길어졌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 분명한 이 길에 대해서 준비를 하고 시대가 변함에 따라 죽음의 방식도 변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한 번쯤 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존엄사는 최고의 사회복지일지도 모른다.     


존엄사단체에 가입을 한 이후 나는 두려움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마치 보험을 가입해 놓은 것 같은 든든한 마음이 들었고 육체적 고통은 계속되었지만 극도로 불안정했던 마음은 조금씩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아래는 디그니타스에 가입한 84세 한국인 회원의 인터뷰 기사글의 일부를 발췌한 내용이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셨나요.     


“인생을 충분히 살았다고 생각해요. 평생 행복했다 말하긴 어렵지만, 안타깝고 뭘 더해야겠다 싶은 것도 없습니다. 좋은 집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받고 차별대우를 받지도 않고 행운을 누렸어요. 삶을 순순히 놓을 수 있는 것, 우리 나이에 그게 되면 잘 산거라고 생각해요.”    

 

-남편과 사별하신 지 40년이 됐습니다. 혹시 남편이 계셨어도 같은 생각을 하셨을까요?     


“남편은 화장이 탄소를 너무 많이 쓴다고 그냥 땅에 조용히 묻히는 게 좋다던 사람이에요. 둘이 함께 신청했을 겁니다.”     


-인류는 오래 살기 위해 애써 왔습니다.     


“과거에는 사람이 일찍 죽으니 살아있는 것을 좋게 생각했습니다. 장수가 축복만은 아니라는 것, 이제 많이 알고 있잖아요. 삶과 죽음에 대한 데피니션(정의)을 새롭게 내려야 하는 시대예요. 최소한, 제게 좋은 삶이란 건강하게 움직이고 이성과 감성이 완전하게 작동되는 상태입니다. 저는 연명치료거부 의사를 밝혔는데요. 꼼짝 못 하고 요양원에 갇혀 살기 싫습니다. 다만 저는 다른 사람들의 선택을 재단하지는 않습니다.”     


-신체의 불편함을 이긴 분도 많습니다.     


“젊은 분들은 계속 잘 살아야 합니다. 이런 결정은 나이가 매우 중요하지요. 저는 나이가 충분합니다.”

    

-그래도 보통은 적극적으로 안락사(조력 자살) 기관을 찾지는 않습니다.     


“디그니타스에서는 ‘마지막 출구(final exit)’라는 표현을 쓰는데요. 출구는 선택지가 있다는 거잖아요. 여러 선택지 중의 하나라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죽는 걸 최고로 칩니다.     


“자다가 아침에 못 일어나서 보니 돌아가셨더라. 이걸 최대 홍복이라 하는데. 불교에서는 5대에 걸쳐 적선을 해야 한다고 하거든요. 그건 정말 운이에요.”    

 

-종교에서 죽음은 신의 영역입니다. 이런 시도는 종교인들의 강한 반발을 부릅니다.     


“종교와 가장 첨예하게 대립되죠. 저도 신자예요. 다만 날라리 신자입니다. 성자가 되는 고통을 당하느니 그냥 안되고 말겠다 생각하는 쪽이지요. 생명의 소중함을 가르치기 위해 종교가 생사에 관여한다 봅니다. 탄생을 선택할 수는 없지만, 마지막 선택은 인간의 몫이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부모가 이런 결정을 하면 자식은 졸지에 불효자가 됩니다.    

 

“맞아요. 주위에서도 ‘자식이 안 말리나’ 많이들 물어옵니다. 아들의 손자들이 장성한 나이입니다. 제 설명에 동의해 줬고, 훗날 자기네도 그렇게 하고 싶다고 합디다.”     


-회원자격을 유지하니 어떤 생각이 듭니까.  

   

“작년에 아파서 입원을 여러 번 했어요. 내가 스위스에 못 갈 수도 있겠다 깨달았어요. 아파 죽겠으면 어떻게 가겠어요? 지부가 없어요. 법적 문제가 있으니 못하는 거죠.”   

  

-실제로 스위스에서 끝낼 확률은 매우 낮은 거네요.     


“모순이 있어요. 멀쩡할 때는 거기 가고 싶은 마음이 안 들고, 너무 아프면 못 가는 처지가 되지요. 사실 이건 일종의 사상운동으로 봐야 해요. 내 마지막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 나는 다른 선택지가 있다, 선언하는 거죠.”     


존엄사법을 시행하는 나라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존엄사법이 시행되어 극심한 고통으로 인해 열차에 뛰어들거나 죽음관광을 하러 스위스까지 가게 되는 일이 없기를. 삶의 마지막 여정에서 지난날을 되돌아보고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생각도 정리하며 날이 좋은 날, 스스로 죽음을 결정하고 편안하게 삶을 끝낼 수 있기를. 존엄한 인간이기에 죽음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존중하고 존엄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되는 날이 오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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