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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책방 Apr 10. 2024

마음의 거짓말

비탈진 내리막에서

휴직을 하고 나서는 마음이 많이 편안해진 듯했다. 공무원으로 임용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난생처음 꾸었던 돼지꿈에 이끌려 모두가 말리는 아파트에 투자를 했었는데 휴직 후에 그 아파트를 매도해서 6개월 만에 5천만 원가량을 벌 수 있었다. 조금 더 가지고 있다가 팔았으면 수익을 더 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흔한 아쉬움이 조금은 있었지만 첫 투자치고는 꽤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했고 월급여 160만 원의 말단 공무원에게는 쉽게 모을 수 없는 돈이었기에 기분이 매우 좋았다. 휴직 중이라 100만 원도 안 되는 휴직급여로 생활을 해야 했지만, 지금이 아니면 언제 기부를 할 수 있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내가 어릴 적 살던 동네 주민센터에 약 100만 원가량의 미혼모를 위한 기저귀를 기부했다. 그리고는 이왕 이렇게 쉬게 되었으니 시험공부를 할 때 작성해 두었던 버킷리스트에 있는 것들을 하나씩 달성해 보기로 했다. 버킷리스트에 있는 내용들은 불교철학 공부해 보기, 재봉틀 배우기, 영어회화 공부하기, 미술학원 다니기, 친구와 놀이공원 가기 등 매우 소박하고 사소한 것들이었다. 나는 동네에 있는 작은 사찰에 불교대학 과정을 등록했고 영어회화 공부를 위해 책도 구입했다. 휴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급체증상으로 응급실에 갔다가 담낭에 있는 결석과 용종이 발견되어 급하게 담낭절제수술을 수술을 받기도 했고, 왼쪽 가슴에 무언가 딱딱하게 만져지는 게 생겨서 동네 유방외과에서 급하게 수술을 받고 조직검사를 받기도 하는 일로 고생을 좀 하기도 했지만 기분이 나쁘거나 우울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며칠에 한번 꼴로 팔다리에 기운이 심하게 빠지는 증상을 포함한 다양한 신체증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유방암 진단을 받기 전에도 기운이 빠지는 증상이 있었던 터라 무언가 내 몸에서 또 안 좋은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 아닌지 불안한 마음이 들어서 수술했던 유방외과도 가보고 이런저런 검사를 받아봤지만 검사결과는 이상이 없었다. 유방외과 선생님께서는 우울증 증상일 수 있다며 유방암 환자가 복용하는 항암제는 부작용으로 우울증이 유발되는 경우가 많아서 많은 환자들이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고 우울증 치료를 받은 환자들이 치료를 받은 후 삶의 질이 달라졌다면서 매우 만족해하는 경우가 많으니 정신과 진료를 받아보기를 권하셨다. 유방암 수술 후 한동안 불안감에 빠져서 조금이라도 이상 증세가 나타나면 선생님을 찾아가 괴롭혔던 일이 있었지만 그때의 일로 계속 나를 우울증 환자로 치부하는 것만 같아서 야속한 마음이 들기도 했고 나는 내 기분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신과 진료는 받지 않았다. 그런데 그 이후로도 내 몸에는 점점 더 다양한 이상증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고작 두세 개 계단을 올랐을 뿐인데 갑자기 호흡이 가빠지고 숨이 차면서 심장이 미친 듯이 뛰거나 통증이 느껴졌으며 어느 날은 하루종일 졸음이 쏟아지는 과다수면 증상이 나타났고 어느 날은 불면증으로 날밤을 새워야 했다. 이유 없는 구역감에 밥을 못 먹기도 했고 속이 심하게 쓰리기도 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증상에 따라 심장내과에 가서 심장 검사를 해보기도 하고 내과에 가서 위내시경 검사를 받아보기도 했지만 강하게 느껴지는 자각증상과는 다르게 모든 검사에서 ‘이상 없음’ 소견이 나왔고 그때마다 나는 해당과의 의사 선생님들로부터 정신적 문제일 수 있으니 정신과에 가보라는 말만을 들었을 뿐이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정말 정신적인 문제가 맞나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정신과 약은 복용하고 싶지 않아서 망설이고 있던 중에 지인의 동생이 심한 우울증을 앓다가 정신과 치료를 받은 후 상태가 많이 좋아져서 이제는 단약을 하고도 잘 지낸다면서 치료를 마친 동생이 이렇게 좋은 치료를 왜 더 빨리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면서 정신과 치료를 너무 부정적으로만 보지 말고 한번 상담을 받아보라는 권유를 받게 되었고 나는 용기를 내어 정신과에 방문을 하게 되었다. 정신과에 처음 가면 우울증 여부를 진단하기 위한 간단한 설문지 작성을 하게 되는데 설문지 항목에 있는 내용 중에 나한테 해당되는 내용이 거의 없었다. 예를 들면 ‘내가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느껴진다’ 라던지 ‘모든 일에 관심이 없고 자신감이 떨어진다’ ‘자신이 하는 일마다 실망스럽다고 생각한다’ ‘나는 실패자라고 생각한다’ 등의 내용들이었는데 나는 거의 대부분의 항목에 ‘전혀 그렇지 않다’에 체크를 했다. 설문지를 제출하고 조금 대기를 했다가 진료실에 들어갔는데 나는 진료를 받게 된 경위를 설명하면서 내가 기분이 괜찮은 상태였는데 여러 가지로 건강에 이상이 오면서 불안한 마음이 조금 든다는 말을 하였다. 정신과 의사 선생님과 나의 의견이 극명하게 갈린 것이 바로 이 포인트였다. 나는 건강악화로 인해 불안감과 우울감이 조금 생겼다고 생각했고, 의사 선생님은 우울증으로 인해서 건강이 나빠진 것이라고 하면서 마음의 병이 몸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나는 건강악화->우울의 순서로 생각을 한 것이고 의사 선생님은 우울-> 건강악화의 순서로 생각을 한 것이다. 내가 작성한 설문지는 들여다보지도 않은 채 무조건 우울증으로 단정 짓는 것 같아서 “사실은 제가 최근에 부동산 투자로 6개월 만에 5천만 원을 벌어서 기분이 매우 좋은 상태예요. 그런데 어떻게 우울증일 수가 있나요?”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너무 유치하게 느껴져서 그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나는 의사 선생님께 내가 느끼는 내 기분이 분명 나쁘지 않았는데 우울증일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면서 내가 모르는 내 감정도 있을 수 있는 거냐고 물었고, 의사 선생님께서는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면서 우울증 약을 처방해주셨다. 우울증 약을 처방받아 집에 돌아온 나는 계속되는 의구심에 의사 선생님께서 상담 중에 언급하셨던 ‘가면우울증’이라는 것에 대해 한참 동안 검색을 했다. 그리고 그제야 난, 내 마음이 날 속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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