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지안 Sep 09. 2023

나도 그럴듯한 계획은 있었다. 결혼에 처맞기 전까지는.


나에게도 새로운 가족과 꿈꾸는 미래가 있었다. 그 계획이 실현되려면 가족들의 협조가 필요했다. 처음 내 꿈은 원대했다. 현명한 아내, 곰살맞은 며느리가 되고 싶었다. 남편을 키워주신 시부모님께 잘하고, 남편의 누님인 형님께도 자연스럽게 다가가고 싶었다. 밝게 웃으면서 근황도 이야기하고 남편의 어린 시절 이야기도 듣고 맛있는 것도 함께 먹는 시댁이 내가 꿈꾼 모습이었다. 하지만 다 내 마음 같지 않았다. 그 계획은 무너졌다. 


우선 시댁에 갈 때마다 인상 찌푸리는 아내가 아닌, 먼저 나서서 한 번이라도 더 가자고 말하는 아내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나에게 그런 기회는 오지 않았다. 결혼하자마자 시아버지께서 폐암 진단을 받으셨다. 상황이 좋지 않아 입원 기간이 늘어나고 횟수도 잦아졌다. 주로 시어머니와 남편이 번갈아가며 간병했고, 지방 근무 중이신 어머니 대신 남편이 가는 횟수가 점차 많아졌다.


어머니와 남편은 모든 일상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내가 끼어들 틈은 없었다. 남편은 회사 휴가까지 내고 시댁과 병원에 가는 일이 잦아졌다. 우리의 신혼은 신혼 같지 않았다. 솔직히 나는 그 상황이 이해가지 않고 버거웠다. 가장 큰 이유는 서로 경험한 가족 문화가 다르기 때문이다. 


친정 부모님의 경우 병원에서 치료할 일정이 있으셔도 웬만하면 언니와 나에게 말씀하지 않으신다. 왜 미리 말씀하지 않으셨냐고 여쭤보면, 자식들 걱정하게 굳이 다 이야기할 필요가 뭐 있냐며 어차피 치료는 병원에서 하는 건데 의사랑 상담하고 해결하면 된다고 말씀하신다.


친정 가족들이 병을 대하는 자세도 시댁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관적인 편이다. 엄마께서 수년 전 큰 수술을 하신 적이 있다. 그때도 엄마는 보호자 한 명만 있으면 된다고 유난 떨 필요 없다 하셨다. 그래서 아빠와 언니가 출근 후, 대학생이라 상대적으로 시간이 많았던 나만 보호자로 동행했다. 치료 기간에도 엄마는 미리 걱정해 봤자 할 수 있는 건 없다며 매번 웃고 계셨다. 그런 가정에서 살아온 나에게 병원은 슬프기만 한 곳이 아니었다.


반면, 시댁 문화는 누구 한 분이라도 아프시면 매번 모든 상황과 일정을 공유하고 가능하면 다 함께 시간을 보내는 방식이다. 미리 악화될 과정까지 예상하며 계속해서 병을 주제로 이야기했다. 물론 암이 무섭고 큰 병인 것은 맞다. 하지만 암에 걸려도 치료가 잘 된 경우도 주변에서 많이 봤고, 설사 예후가 좋지 않더라도 장기간의 싸움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런 내 눈에는 모든 에너지를 한꺼번에 쏟아붓는 시어머니와 남편이 걱정될 뿐이었다.


오히려 시아버지께서는 시어머니나 남편보다 내가 병문안 가는 걸 더 좋아하셨다. 며느리랑 있으면 잠깐이라도 떠들고 웃을 수 있어서 그러신 것 같았다. 아버님 입장에서도 아내와 아들이 늘 걱정하고 일상을 잘 지내지 못하는 모습이 마음 편하지는 않으셨던 것 같다. 나도 시어머니나 남편과는 생각이 달랐다. 어차피 의료적인 부분에서 가족이 할 수 있는 건 없으니 차라리 한 번이라도 더 웃게 해 드리는 게 좋을 거 같았다. 그래서 재미있는 이야기도 해드리고 말동무가 되어드리는 게 내 방식이었다.


아무튼 이런 상황에서 내가 나서서 먼저 시댁에 가자고 말할 기회는 없었다. 그전에 시어머니의 요청이 있거나 남편이 먼저 나서서 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효자 아들 옆에서 좋은 며느리가 되기는 쉽지 않았다.


형님의 존재 역시 어려운 과제였다. 봉사활동도 많이 해봤고 장애인에 대한 편견도 없었기 때문에 잘할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리고 그동안 어머니와 남편을 통해 들어왔던 형님은 장애인 중에서도 순하디 순한 장애인이었다. 그런데 그 생각은 아주 어릴 때부터 30년 넘게 형님을 돌봐온 시댁 가족들의 시선에 불과했다. 내가 처음 형님을 마주한 후 느낀 점은 180도 달랐다. 거대한 체구에 본능적인 욕구가 강해서 상대하기 버거운 장애인일 뿐이었다.


상당수의 발달장애인들은 비만이라는 질병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장애라는 병 자체에 원인이 있기도 하겠지만 당사자가 먹는 양을 스스로 조절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움직임도 제한적이라 활동을 통해 소화시키는 데에 익숙하지 않은 이유도 있다.


아무튼 나는 형님의 큰 체구에 한 번 놀라고, 거동이 불편하셔서 누군가 항상 부축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두 번 놀라고, 깨어 있으신 동안 계속 특유의 소리를 내시는 것에 세 번 놀랐다. 분명 그동안 남편과 시어머니를 통해 들었던 형님을 상상하면 건강관리가 잘 되어 있고, 잘 걸어 다닐 수 있고, 돌발행동 없이 순하기만 한 모습이어야 한다.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식사할 때 시어머니는 형님을 먹여야 해서 동시에 식사하는 데 어려움이 있으셨다. 형님께서 내시는 끊임없는 소리에 다른 가족들은 일상적인 대화조차 편하게 할 수 없었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시기 때문에 활동에도 제약이 있었다. 식사하시다 앉은 채로 소변 실수를 하시기도 했다. 평범한 일상 자극에도 형님은 예민하게 반응하시기도 했다. 다 같이 외출을 하고 돌아올 때 집에 들어가기 싫다고 고집을 부리셔서 현관문 앞에서만 1시간 동안 어머니와 실랑이를 벌이시는 경우도 있었다. 원하는 요구를 가족들이 바로 반응을 해주지 않으면 바닥 장판에 펜으로 낙서를 하기도 했다. 적어도 내가 본 형님은 이런 모습이다.


물론 시댁에서 나에게 그 역할을 함께 하자며 부담을 주신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하지만 그 공간에 24시간 같이 있는 것 자체가 나에게 버거운 일이었다. 전해만 들었던 형님의 모습과는 괴리가 너무 컸고, 당황스러웠다. 어린 아이라 내가 놀아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보다도 체구가 큰 성인 장애인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저녁이 되면 시어머니와 남편은 지친 모습이 역력했다. 그런 시댁에 다녀오는 길은 늘 우울했다.


신혼 초에는 이 어두운 상황을 밝게 바꿔보고 싶어서 새로운 제안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댁 문화 자체가 내가 살아온 환경과 너무 달랐다. 내가 아무리 좋다고 생각한 아이디어를 제안하더라도 거절당하기 십상이었다. 시댁 가족이 그동안 만들어 온 문화와 생활방식에는 맞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다. 


예를 들면, 나는 어머니와 남편이 체력을 적절히 안배하며 아버님을 간병하는 게 더 좋을 거 같았다. 그래야 가족의 일상도 무너지지 않고 장기적인 싸움에 대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전문 간병인을 고용하는 걸 고려해 보자고 했지만, 어머니의 뜻이 너무 완강하셨다. 참고로 시댁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어느 정도 있다. 돈 때문에 그 제안을 거절하신 건 아니다. 단지, 어머니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가족이 시아버지를 케어해야 한다는 생각을 굽히지 않으셨다. 그래야만 본인이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실 것 같다는 게 이유였다. 어머니의 뜻이 완강하시니 결국 그 몫은 남편이 고스란히 나눠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일상은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형님에 관해서도 아이디어를 제시한 적이 있다. 형님은 30대 중반 이후부터는 이미 집이 아닌 다른 생활시설에 입소해 생활하고 계신다. 나는 형님과 다 함께 추억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끔은 형님 없이 가족들이 보내는 시간도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다. 나에게는 아직 남편과 시부모님에 대해서도 알아갈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편하게 시댁 가족들과 대화하고 싶었다. 길게 보더라도, 그 이해부터 바탕이 되어야 내가 형님과 함께 하는 시간에도 적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문화도 바꾸기 어려웠다. 시댁 가족들은 형님을 제외한 채 시간을 보내는 것에 엄청난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남편과 내가 시댁에 가는 날이면 어김없이 생활시설에 계신 형님을 집으로 데리고 나와계셨다. 어머니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게 내 눈에도 뻔히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해야만 어머니 스스로 딸에 대한 죄책감과 미안함을 잠깐이나마 해소하시는 것 같았다. 코로나 시기에는 형님이 생활시설에서 나오지 못한 때도 있었다. 하지만 형님이 외출하지 못하시는 날에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어머니께서 그 슬픔과 아쉬운 감정에 잠기셔서 시댁 전체가 우울한 분위기가 됐다. 그때조차 가족들이 편안하게 대화하기는 어려웠고 다들 어머니 눈치를 보기 바빴다.


나도 시댁에 가면 점점 할 말이 없어졌다. 아버님의 병세는 악화되고, 형님은 계속 소리를 지르셨다. 어머니와 남편의 지쳐가는 모습에 나도 더 이상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내가 꿈꾸던 계획은 모두 무너졌다. 지금 생각해 봐도, 완전한 내부인이 아니라 근처를 서성거렸던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최종 결정권이 있는 어머니나 그에 맞대응할 수 있는 남편이 내 고민을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는 상황에서 나는 무기력해졌다.


그렇다고 나도 가만히 참고 있는 성격은 아니다. 좋은 아내나 참한 며느리가 될 위인은 아닌가 보다. 나는 희생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집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큰 애교 많은 둘째 딸이다. 성질도 더러워서 따박따박 할 말 다 하면서 가족들을 휘어잡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자기주장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게다가 아빠는 본인이 본가에서 장남으로 희생한 것에 넌덜머리가 나신 분이다. 그래서 본인의 딸들이 희생하는 상황은 가능하면 만들지 않으셨다. 덕분에 나와 언니는 각자 인생의 주인공으로만 살아왔다.


그런 나였기 때문에 은연중에 같이 희생하자는 시댁 분위기는 감당이 안 됐다. 감당하고 싶지도 않았다. 물론 어머니나 남편이 대놓고 나에게 희생을 강요한 적은 없다. 하지만 시댁의 닫힌 문화, 그리고 어머니와 남편의 가치관이 바뀌지 않는 한 그 희생적인 문화는 언젠가 내 몫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되도록 가만히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아버님의 암투병 사건과 장애인 형님의 상황에 대해 장황하게 불만을 토로했다. 하지만 그 사실 자체를 견디지 못한 건 절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아플 수 있다. 언젠가 모두 죽는다. 장애도 선천적인 경우만 있는 게 아니다. 모든 인간은 후천적으로 장애인이 될 가능성이 있다. 그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불만을 토로하려는 게 아니다. 내가 정작 힘들었던 진짜 이유는 그 상황을 대하는 시어머니와 남편의 태도, 그리고 은연중에 나에게까지 희생을 바라는 모습이었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의 목차 중 “12. 가족은 건드리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 어려운 걸 내가 해냈다.” 편에서 내가 전쟁을 선포하게 된 계기다.

이전 09화 내 결혼은 특별할 줄 알았다. 개뿔이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