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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제 Oct 12. 2023

힘들다는 건 장어덮밥을 먹기 위한 핑계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힘들 때만 먹자고 스스로 약속해 버렸다

혼자서 하는 해외생활.

처음으로 해보는 자취.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도쿄.

돈이 부족해서 아껴먹고 아르바이트의 시간을 늘리는 순간들.

고장 난 보일러와 부러진 커튼걸이.

복잡한 지하철과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많은 유동 인구.

덥고 습한 날씨.

이렇게 힘든 날이면 나는 장어덮밥을 먹으러 간다.


사실대로 말해보자면 이 모든 순간들이 그렇게 힘들진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어째서 힘든 날이라고 말하는 걸까?

이사를 하고 기운을 회복할 수 있는 음식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에 와서 이사하고 아르바이트도 구하고 힘든 건 아니었지만 원기보충을 하고 싶었던 걸까 옛날부터 좋아했던 장어덮밥이 먹고 싶어졌다.

구글맵을 통해 맛있어 보이는 장어덮밥 가게를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찾은 이케부쿠로 역 옆에 있는 장어덮밥집.

시간을 내서 곧바로 방문해보았다.


장어덮밥


가게에 들어가서 생맥주 한잔과 도시락형태의 장어덮밥을 주문했다.

지금까지 먹어본 장어덮밥 중 가장 맛있었다.

적당하게 볶아진 밥 위에 올라간 달달하면서 짭짤한 두툼한 장어.

장어덮밥은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장어덮밥


특히 장어덮밥을 받고 나서 먹는 첫 입의 맛은 그 어떤 음식과 비교할 수 없이 압도적이다.

부드러운 장어가 입에서 녹아내렸다.

몇 입 먹다 보면 살짝 느끼해지는 게 장어 덮밥의 단점이지만 그마저도 같이 나온 무절임이 깔끔하게 잡아주었다.

생선의 껍질을 굉장히 좋아하는 나에게 장어의 껍질은 진미 중에 하나였다.

짭짤하면서 바삭하게 씹히는 식감이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장어덮밥


그리고 부드럽고 달달한 장어계란말이.

아이스크림을 먹은 거처럼 계란말이가 입 안에서 녹아내려갔다.

마지막 밥알까지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항상 최고의 한 끼를 선물해 주는 장어덮밥이었다.

물론 다른 식사류에 비해 조금 가격대가 있었기에 기운이 없는 날에만 먹자고 스스로 약속했다.

그때의 나는 기운이 없는 날이 금방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누군가와 함께 뭔가를 하고 즐기고 공유하는 걸 굉장히 좋아한다.

그래서 친구들과 여행을 가거나 가까운 쇼핑몰로 쇼핑을 하러 가는 일이 많았다.

저녁에 드라이브를 하거나 카페에 가서 같이 그림을 그리는 날들도 많았다.

일주일에 적어도 1~2 일은 친구들과 약속이 있었던 거 같다.

그리고 한국에서 살 때는 집안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

요리실력이 좋으신 어머니께서 매일같이 챙겨주는 아침, 점심, 저녁.

저녁 11시가 넘어도 뭔가 먹고 싶다고 하면 야식을 만들어주셨던 어머니.

아무리 방을 어질러도 밖에 나가서 친구들과 놀고 오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는 방.

빨래나 설거지 그런 것들은 해본 적도 없었다.

집에서는 즐기고 싶은 것들만 즐기던 삶을 살고 있었다.

이런 삶에서 이제는 친구가 없는 매일이 혼자인 삶.

혼자서 밥을 해 먹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는 삶.

뭔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도와주는 이 없이 전부 스스로 혼자서 해야 하는 삶.

그런 삶을 살게 되었다.

분명 엄청 스트레스를 받고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순간은 길어야 30분이었다.

뭔가 짜증이 나도 산책을 하거나 가만히 앉아서 커피를 마시면 행복해졌다.

힘든 날이 하나도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결국 기억에 남은 건 좋았던 기억들 뿐이었다.

아무리 길어도 한 시간이면 마음속에는 즐겁고 행복하다는 감정만이 넘쳤다.

나라는 사람이 원래 이렇게 긍정적이었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이렇게 매일이 행복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정도로 이 생활은 나에게 아주 잘 맞았다.

덕분에 첫 장어덮밥을 먹고 한동안은 장어덮밥을 다시 먹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장어덮밥이 먹고 싶었다.


장어덮밥이 먹고 싶어진 나는 힘들다고 생각하는 날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4일 연속으로 아르바이트를 해서 힘들어... 장어덮밥을 먹어야겠다.

연속으로 출근을 했던 날들의 마지막날 퇴근을 하고 장어덮밥을 먹었다.


친구들이 놀러 와서 일주일이 넘게 안내를 해주니까 힘들어서 기운을 회복해야겠어... 장어덮밥을 먹어야겠다.

두 차례나 친구들이 우리 집에 놀러 왔고 친구들을 이곳저곳 안내해주고 나서 장어덮밥을 먹었다.


오늘은 멀리 여행을 가야 해서 앞으로 힘들지 않을까?… 장어덮밥을 먹어야겠다.

1박 2일 여행을 떠나기 전에 앞으로 힘들어질 거라고 생각해서 장어덮밥을 먹었다.


어쩌다 보니 나의 매일매일이 행복하다는 걸 깨닫게 해 준 건 장어덮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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