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은 과연 현실이 될까3

by 이정표

상황이 이쯤 되자, 우리는 사뭇 비장해졌다. 앞으로 남은 버킷리스트들은 꼭 성공시키리라 굳게 마음먹었다. 세 번째 버킷리스트는 챠키 언니의 놀이공원 가기로 정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저, 마음이 바뀌었어요. 놀이공원 말고, 백화점 가서 제 옷을 사보고 싶어요. 생각해보니, 그동안 가족들 옷만 샀지, 제 옷은 한 번도 못 사봤거든요. 제 옷 살 돈 있으면, 가족들 어디서 기죽지 말라고 더 좋은 물건으로 사줬거든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까, 오직 저만을 위한 선물을 주고 싶어요.”

그렇게 다 같이 백화점에 모인 날, 언니는 설렘으로 잔뜩 상기된 얼굴이었고, 나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백화점 안으로 들어선 언니는, 본래의 목적은 잊고 자꾸만 가족들이 입을 만한 옷들을 고르고 있었다.

“남편 출장 갈 때 입을 양복이 필요한데, 딸도 바람막이 하나 사줘야 하는데.”

그럴 때마다 우리들이 나서서 언니가 이곳에 온 이유를 상기시켜줘야만 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가격표만 들여다보는 언니를 발견하곤 했다.

백화점을 둘러보다 화장품 코너 앞을 지나가며 내가 말했다.

“향수님도 향수 하나 사세요. 향수 좋아하시잖아요.”

“아니 글쎄, 나는 그 ‘칙칙 뿌리는’ 향수가 아니라, ‘넓은 벌 동쪽~’ 그 향수라니까요.”

내가 저 말을 꺼낼 때마다 아저씨는 늘 답답하다는 듯이 또박또박 설명해주었다.

이번에도 어김없었다.

‘뿌리는 향수’를 말할 땐 검지손가락을 구부려 허공에 칙칙 뿌리는 시늉을 하고,

‘노래 향수’는 짐짓 가수처럼 목을 가다듬고 한 소절 흥얼거렸다.

그 반응이 너무나 재밌었던 나는 몇 번을 반복했던 말장난이었지만, 앞으로도 절대 멈출 생각이 없었다.

언니는 이제 마음을 다잡고 맘에 드는 옷을 고르는 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영 맘에 드는 게 없는 눈치였다. 이 옷 저 옷 살펴만 보는 언니에게 어느새 점원이 다가왔다. 그리곤 언니 나이에 맞는 단정하고 편한 옷들을 골라서 권하고 있었다. 하지만 언니는 딱히 맘에 들지 않는지, 지루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언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한 옷을 집어들었다. 하늘하늘한 원단의 노란색 원피스였다. 옷을 갈아입고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거울 앞에 선 언니는, 뭔가 마음에 안 드는지 인상을 치푸린 채 몸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거울에 비춰보았다. 원하는 핏이 나오지 않아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점원은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언니 나이대에 맞을 법한 우중충한 옷들을 다시 권했다.

보다 못한 내가 나섰다.

“챠키님, 이거 맘에 들지 않아요? 이 옷 볼 때 언니 눈이 가장 반짝였어요.”

칼이 거들었다.

“그래요. 이 옷 입었을 때 제일 행복해 보였다니까요. 더 고민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아요.”

“그치만 이 옷은.. 내 나이에 입기엔 너무 어려 보이지 않아요? 날씬해야 핏도 예쁜데... 난 살도 많이 쪄서 후덕해보이지 않을까요?”

“네, 고객님. 그 옷은 주로 20대 젊은 여성분들이 주로 입으시고요. 고객님 나이대와 체형에는 아무래도 이 옷들이 더...”

내가 점원의 말을 끊고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하나쯤은, 그냥 입고 싶은 옷을 사보는 건 어때요?”

내 마지막 말을 들은 언니의 눈빛이 변하더니, 뭔가 결심했다는 듯 점원을 향해 당당히 말했다.

"이 옷으로 주세요.“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쇼핑을 마치고 뿌듯한 마음으로 다같이 식사를 했다. 우리는 마음에 드는 옷을 산, 언니의 결단을 칭찬했고, 언니 또한 모든 유혹을 뿌리친 채 버킷리스트를 달성해서 뿌듯해했다. 언니는 원피스가 담긴 쇼핑백을 마치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양, 옆에 꼭 끼고서 사랑스러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근데 챠키님, 닉네임이 왜 차키가 아니라 챠키에요?”

문득 궁금증이 생긴 내가 물었다.

“남편이 차키 잃어버릴 때면 어디다 뒀냐고 꼭 나한테 호통을 치면서 찾았거든. 자기가 어디다 뒀으면서, 난 운전도 못 하는데. 그럴 때 보면, 꼭 차키가 챠키처럼 들려.”

“여보! 내 챠키 못 봤어? 챠키 말야 챠키. 당신이 치운거 아냐? 아니면 이게 어딜 간거야 대체.”

남편 흉내를 내며 우스꽝스럽게 따라하는 언니를 보고, 우리는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근데 차키나 챠키나 무슨 차이가 있죠? 둘 다 비슷하게 들리는데.”

의문을 제기하는 향수 아저씨에게, 언니가 자랑스레 대답했다.

“자세히 들어보면 얼마나 다른데요.”

“무슨 간장공장 공장장 그런 거 같네요.”

칼이 그렇게 말하고선, 어설프게 발음을 따라했다.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우리는 또다시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기분 좋게 식사까지 마치고 헤어지려던 우리는 혹여나 언니가 환불하거나 가족들 옷으로 바꿀까 걱정돼서, 언니에게 영수증을 건네받아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각자 집으로 헤어졌다.

오늘도 가족들과 마주치지 않고 집에 일찍 들어왔다. 밖에 한번씩 나갔다 올 때면 이불에서 나는 냄새와 방 한가득 쌓인 쓰레기와 먼지가 더 코와 눈을 자극하는데, 오늘은 유독 거슬렸다. 가족들이 오기까지는 시간도 많이 남고, 날도 좋은데다, 즐거운 시간까지 보내다 와서 활력이 샘솟은 나는, 두 팔 걷어붙이고 오랫동안 미뤄왔던 이불 빨래와 청소를 하기로 했다.

한창 정신없이 물걸레질을 하던 와중에 메시지 알림 소리가 자꾸 났다. 잠시 숨도 돌릴 겸 핸드폰을 확인해 보았다. 단체 채팅방에 챠키 언니가 올린 사진과 메시지가 올라와 있었고, 그 밑으로 사람들이 줄줄이 남긴 메시지가 달려 있었다.

내용을 읽어보니, 백화점에서 산 원피스를 집에서 다시 입어봤더니 사이즈가 좀 작다는 것이었다. 함께 올린 사진을 보니 정말 그랬다. 나는 아차 싶었다. 영수증은 이미 버려서, 환불도 교환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저게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 어차피 곧 죽을 마당에. 그냥 기분 내본 걸로 만족할래요."

언니는 못내 괜찮다며,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위로했다.

결국 이번 버킷리스트도 실패로 끝났단 생각에 씁쓸함이 밀려왔다.

어느새 나는 집안일을 모두 마치니, 이마엔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기진맥했다. 하지만 이 기분이 싫지만은 않았다. 침대 위로 누우니, 새로 간 이불에선 향긋한 냄새가 나고 뽀송뽀송한 감촉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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