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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진 Jan 03. 2023

말 그대로 '혼자'가 되었습니다.

천애고아가 사는 방법






2020년 1월 6일 나는 혼자가 되었다. 원래도 인생 혼자 사는 거라지만 정말 혼자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렇다. 나는 할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천애고아가 된 것이다.


책임감이 없는 부모에게서 태어나 다섯 살부터 이십 대 후반까지 할머니와 단둘이 살았다. 자식들에게 짐이 될 수 없다던 할머니는 집 앞 옷 공장에서 12시간 노동을 했고,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작은 영화사에 취직하여 경리 일을 했다. 둘이 모진 세상 열심히도 살았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나에게 돌발성난청이라는 병이 찾아왔다. 오른쪽 귀의 청력을 아예 잃은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도 현재진행 중이다. 주기적인 어지럼증으로 인해 일을 어쩔 수 없이 그만두게 된 나는 몇 년 동안 쿠팡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며 간간히 살아갔다.


몸은 힘들었지만 그래도 할머니와 나는 행복했다. 겨울엔 따뜻했고, 여름엔 에어컨이 없어도 선풍기만으로도 시원했다. 소박하지만 먹고 싶은 것을 먹었고, 입고 싶은 것을 입었다. 이건 오로지 할머니의 12시간 노동으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소중한 것들이었다. 내가 쿠팡에서 포장 일을 하며 벌어온 돈도 생활비로 들어가긴 했지만 혼자 생활을 책임지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다. 그래서 할머니는 일흔아홉의 나이에도 공장 노동을 그만둘 수 없었다.


할머니가 여든을 한 해 앞두고 있던 4월, 자꾸만 붓는 발과 갑작스레 올라온 두드러기 때문에 병원을 찾았을 때 암진단을 받게 되었다. 우리 집 앞에는 대형병원이 있어서 응급실에 쉽게 갈 수 있었는데, 그 때문에 할머니가 가지고 있는 암세포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하지만 주말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알았을 땐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었다. 간의 전부를 암세포가 까맣게 둘러싸고 있었다.


할머니는 암 진단을 받은 날의 오후, 다니던 회사에 퇴사를 고하고 키우고 있던 강아지 까망이를 안았다. 그리고 동네 교회 앞으로 갔다. 벚꽃이 한창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한참을 서서 꽃을 바라보던 할머니는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다. 내년이면 볼 수 없는 풍경이라고. 그래서 나는 눈물을 한 바가지 흘리며 사진을 찍었다. 엄청나게 흔들려서 몇 번이고 다시 찍어야 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5월까지는 괜찮았던 몸이 6월이 되자 복수가 차기 시작하면서 눈에 띄게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누운 자리에서 한 번에 일어날 수 없었고, 무엇을 먹든 설사를 했다. 그래도 할머니는 먹고 싶은 것을 먹었고, 있는 힘을 짜내 나에게 남기고 싶은 것들을 영상이나 편지로 남겼고, 일기를 썼다. 나는 할머니를 위해 노트나 펜 같은 것들을 사다 나르며 눈이 붓도록 울었다. 내 인생에 최고로 많이 울었던 해를 꼽으라면 당당히 2019년을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11월 말까지 열심히 일기를 쓰던 할머니가 펜을 다시 들 수 없게 된 건 12월 둘째 주의 일이었다. 할머니는 화장실에서 주저앉아 더는 일어나지 못했다. 작은 방에 앉아 짧은 글 같은 것을 쓰고 있던 내가 우당탕 소리를 듣고 화장실로 갔을 땐 할머니가 쓰러져 있던 상태였다. 황급히 뒤처리를 하고 할머니를 안아 안방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자리에 눕게 된 할머니는 눈을 감을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단 한 발자국도 걷지 못했다.


항상 부지런한 할머니였다. MBTI가 ISFJ인 사람답게 (괜히 심심해서 해본 날이 있었다.) 할머니에게는 정해진 루틴이 있었다. 새벽 4시 반에 깨서 강아지 물 주고, 밥 주고, 화초에 물 주고, 믹스 커피 한 잔 마시고, 씻고, 화장을 하고, 아침밥을 먹고, 양치를 하고, TV 드라마를 보았다. 하지만 주저앉고 나서부터는 그 모든 일들을 하지 못했다. 그저 누워서 천장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를 지나치게 의존하기 시작했다.


할머니 옆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못하고 집에 눌어붙어 있던 나는 답답함을 느꼈다. 그래선 안 될 것 같은 자괴감과 함께였다. 내가 눈앞에서 잠시만 사라져도 나를 찾는 할머니 때문에 샤워도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불편함을 느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어떻게든 버텼다. 할머니 옆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나지만 할머니마저도 혈육이라고는 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고, 2015년에는 할머니의 아들이자 나의 아버지가 죽었다. 2006년, 2016년에는 할머니의 딸이자 나의 고모들이 눈을 감았다. 넷 다 간경화였다. 간에 뭐가 있는 집임에는 분명하다. 그들의 딸이자 가족인 나도 항상 간수치가 다른 이들보다 높아서 술은 입에도 못 대고 있다.


자식을 하나가 아니라 셋이나 앞세운 할머니는 마지막 끈으로 나를 붙잡고 있었다. 그래서 가난했기 때문에 호스피스도 가지 못한 할머니를 집에서 내 나름대로 열심히 보살폈다. 기저귀도 갈고, 죽도 쑤고, 시를 좋아하는 할머니를 위해 시집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어주었다.


누워 있었지만 말은 할 수 있을 때의 할머니는 어느 날 갑자기 신을 찾았다고 했다.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79년 간 하나님이라는 신을 믿어 온 할머니가 했던 말이기에 나는 기저귀를 갈며 귀를 기울였다. 할머니는 자신의 신이 나라고 했다. 오랜 시간 그토록 찾아 헤매던 신이 분명 나일 것이라고. 


그 말을 들은 나는 고개를 푹 숙였을 뿐, 대답하지 못했다. 입이라도 조금 열면 끝도 없는 울음이 대답 대신 터질 것 같아서였다.


그 후, 할머니는 효과도 없는 약을 먹어가며 병과 싸우다가 2020년 1월 6일 오전 12시 15분 내 앞에서 숨을 거뒀다. 죽기 일주일 전부터는 섬망에 시달리느라 나도 알아보지 못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으, 으, 으, 소리만 냈을 뿐이었다. 그랬던 할머니가 죽기 직전 내 말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말했다. 할머니 우리 다시 만나자. 어딘가에서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세상에 혼자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눈도 못 감고 숨을 거둔 할머니의 눈을 감겨주면서 나는 예전만큼 맘 편히 울지 못했다. 그때부터 혼자로서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었다. 장례 회사도 불러야 했고, 얼마 안 되는 사람들에게 연락도 돌려야 했다.


할머니가 집에서 죽었기 때문에 그 당시 곁에 있던 내가 경찰서에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였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 퀭해진 눈을 하고 장례식장의 직원을 찾아 물어보았다. 경찰서를 가야 한다고 하던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제가 정말 아무것도 몰라서요. 그러자 직원은 나를 한참 빤히 쳐다보다 답했다. 좀 쉬세요. 그 말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할머니를 보내주고 강아지 한 마리와 혼자 남게 된 집에 돌아왔을 때에도 눈물은 나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지? 같은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일단 강아지를 안았다. 그리고 잠시 작은 방에 강아지를 놓아두고 마스크를 꼈다. 할머니가 누워 있던 곳을 청소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나는 엉엉 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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