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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진 Jan 06. 2023

내 나이 스물아홉, 기초 생활 수급자가 되었다.

어떻게 어떻게 살아는 간다



할머니가 숨을 거두기 전 나에게 남겨준 돈은 600만 원 정도였다. 정확히는 637만 원. 그 돈을 가지고 장례를 치르고 나니 내 손에는 백만 원 조금 안 되는 돈이 남아 있었다. 허무했다. 분명 할머니는 내가 몇 달이라도 고생하는 게 싫어서 이 돈을 모아두었을 텐데 가난은 너무나도 빨리 찾아왔다. 가만히 서 있어도 입김이 폴폴 나는 겨울, 나는 다시 쿠팡 물류센터로 나가야 했다.


당시 살던 집의 월세는 25만 원이었다. 지어진 지 33년 된, 방 두 개짜리 주택이었다. 이 마저도 이사를 오던 날 할머니와 나는 드디어 방 두 개라며 엄청 기뻐했던 기억이 있다.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방 한 칸에서 살았었기 때문이다. 옆집에서 옆집으로의 이동이었지만 그래도 드디어 갖게 된 내 방은 나에게 커다란 해방감을 안겨줬었다. 그 집에서 꼬박 십 이년을 살았다. 할머니가 숨을 거둔 해가 정확히 이사 온 지 십 년이 되는 해였다.


방세가 상당히 쌌기 때문에 이사를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월 30만 원이 안 되는 방세는 생활에도 부담이 덜 되었다. 하지만 부담이 ‘덜’ 되었던 것이지 돈이 없는 상황은 어쨌거나 저쨌거나 부담이긴 했다. 쿠팡에는 일주일에 한두 번 밖에 나가지 못해 버는 돈이 한정적이었고, 나가는 돈은 매달 정해져 있었다.


그렇기에 결국 2020년의 여름, 행정 복지센터를 찾았다. 그리고 직원 분의 안내에 따라 기초 생활 수급자 신청을 했다.


3개월은 기다려야 한다는 말을 듣고 나와서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땐 그 어떤 하늘보다 맑게 개어 있었다. 내 나이 스물아홉에 기초 생활 수급자가 되는구나. 아주 살짝 넋이 빠져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내 머릿속에 기초 생활 수급자는 70세 이상의 독거노인들이 신청하는 것으로만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젊은 내가 기초 생활 수급자가 될 수 있다니. 이게 다 의지할 부모도 친척도 없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며칠 후, 행정 복지센터에 다시 들러 엄마와 인연이 오래전에 끊겼다는 진술서 같은 것을 한 번 써내고 나서 두 달 정도가 지났을 때쯤, 나는 정식으로 기초 생활 수급자가 되었다. 의료 보험 1종, 일반 수급자였다. 통장으로 160만 원가량의 돈이 들어왔다. 두 달치였다. 그 돈으로 일단 방세를 냈다. 그리고는 전기, 가스비를 차례대로 내고 채우지 못하고 있던 냉장고를 채워 넣었다. 그러고 나서 남은 돈은 쿠팡 일을 하루라도 덜 나가기 위해 어떻게든 아껴 썼다.


그렇게 2020년을 일반 수급자로 지내며 일을 쉬고 있을 때였다. 매달 들어오는 돈이 있어 분명 마음이 편해야 하는데 편하지 않았다. 내 곁에 있어주는 친구에게 수시로 울며 떼를 쓰고, 화를 냈다. 어쩔 때는 말이 너무 많았고, 어쩔 때는 말이 너무 없었다. 친구는 이런 나를 뭐라 하지 않고 묵묵히 견뎌주었다. 나는 나아질 기미 없이 2021년이 될 때까지 허구한 날 울며 불며 굴러다녔다.


병원에 첫 발을 디딘 것은 2021년 2월의 일이었다. 내가 자주 다니는 서점은 한 건물의 지하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그 건물 5층에 신경정신과가 있었다. 보통 층에 있는 병원들을 소개하는 안내판을 잘 읽지 않는데 이상하게 그날은 읽고 싶었다. 5층에 희망이라는 이름이 들어가는 신경정신과가 있었다. 나는 갓 대여한 책을 가방에 넣고 입술을 구겼다. 가보고 싶었다. 저 희망이라는 이름이 들어가 있는 병원에. 그럼 조금이라도 희망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당시 나는 친구에게 제대로 친구 노릇을 하고 있지 못하다는 이유로 엄청나게 자괴감을 느끼고 있었어서, 친구를 위해서라도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바로 당일에는 가보지 못했다. 용기가 부족했다. 병원을 발견하고 꼬박 일주일이 지나서야 나는 희망 신경정신과에 첫 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 나는 양극성정동장애, 즉 조울증이라는 병명을 얻게 되었다. 조울증과의 길고 긴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약을 복용하게 되고 난 후부터 나는 친구에게 짜증과 화를 내지 않게 되었다. 워낙 눈칫밥을 먹었던 세월 때문에 틈만 나면 친구의 눈치를 보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나와 친구는 서서히 예전의 생활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둘 사이에 웃음을 되찾았다. 엄청난 쾌거였다.


2021년 6월, 일반 수급자에서 조건부 수급자로 전환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하지만 나는 조울증을 앓고 있었으므로, 그것도 꽤 심각한 수준이었으므로 몇 가지 서류를 내고 근로 능력 없음 평가를 받게 되었다. 다시 일반 수급자의 삶으로 돌아왔다. 저번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엔 투병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2주에 한 번씩 꼭 병원에 가서 약을 타와야 했고, 약이 없으면 하루종일 울고 잠들지 못했다. (이건 지금도 그렇다.)


서류를 복지센터에 제출한 날, 집으로 돌아와 이불을 덮고 누웠다. 약도 챙겨 먹었거늘, 괜히 눈물이 나왔다. 한창 일을 해야 할 나이에 정신병과 귀 병 때문에 일을 하지 못하는 나라니. 엉망이었다. 나를 엉망으로 키운 부모의 탓도 했고, 그렇게 키워진 내 탓도 했다. 탓과 탓이 꼬리를 물었다. 자기 연민과 자기혐오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러다 문득 할머니가 보고 싶었다. 할머니가 가고 난 뒤 사는 게 바빠 할머니와의 생활을 그리워할 시간도 없었는데 그날 처음으로 할머니와의 생활을 그리워했다. 열심히 살던 날이 있었다. 나에게도. 분명 그런 날이 있었는데.


곧 눈물을 닦았다. 누군가를 탓한다고 해서, 나 자신을 혐오한다고 해서 내 생활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이럴 때일수록 힘을 내야 했다. 그래서 치킨을 시켰다. 나는 이상하게도 치킨을 먹으면 힘이 조금 났다. 그때도 치킨을 우물거리며 힘을 냈다. 닭다리살 하나에 슬픔을, 닭가슴살 하나에 분노를 그렇게 삭혀나갔다.


나에겐 여전히 들리지 않는 오른쪽 귀와 조울증이라는 정신질환이 있다. 나는 이것들과 조용히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싸움에서 조금, 아주 조금이라도 이기고 있는 것인지 개미 눈물만큼이라도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있게 되어 이렇게 글도 쓰게 되었다.


병과 가난과의 싸움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의사 선생님은 나를 처음 본 날 말씀하셨다. ‘리진 씨는 지금 마법에 걸린 거예요. 마법에 걸린 리진 씨의 모습은 진짜 리진 씨가 아니에요.’


그래서 마법에 걸린 나는 나를 조금씩 찾아가고 있는 것일까. 아직까지 온전히 나 자신을 받아들이기는 힘이 들지만, 그래도 기초 생활 수급자인 나 자신이 부끄럽지는 않다. 언젠가 나와의 싸움에서 완전히 이겨 당당히 벗어나기 만을 기다릴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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