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 때문에 거세당한 꿈
살면서 부모 탓을 해본 적을 손에 꼽는다. 특히나 아빠는 나의 아버지이기 전에 할머니의 자식이었기 때문에 쉽게 탓할 수 없었다. 나는 할머니가 싫어할 만한 짓은 웬만해선 하지 않았고, 내가 티끌만큼의 잘못을 해도 득달처럼 달려드는 고모들 때문에 눈칫밥을 많이 먹고 자랐다. 그래서 인생을 살며 아빠를 탓하는 것은 내게 허락되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죽고 난 지금, 나는 ‘감히’ 아빠 탓을 ‘대놓고’ 해보려고 한다. 아빠는 알코올중독자였다. 하루에 막걸리를 여덟 병에서 열 병을 마셨다. 말 그대로 중간이 없는 사람이었다. 알코올중독이 되기 이전에도 상당히 이기적이고 자기 자신 밖에 모르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어서 자신이 돈을 얼마를 벌든 간에 가족과 절대로 나누지 않았다. 여기에는 당연히 나도 포함된다. 아빠는 자식인 나에게도 자신의 돈을 나누어주지 않았다.
초등학생, 중학생 시절은 말 그대로 엉망으로 흘려보냈지만 고등학교에 입학함과 동시에 정신을 차린 나는 3년 내내 열심히 공부한 결과 꽤 높은 성적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수시전형으로 웬만한 전문대는 다 갈 수 있게 되었는데 문제는 아빠가 예치금을 주지 않았다. 자식에게 헌신적인 아버지는 늘 그랬듯 남의 집 이야기였다. 그날 벌어 그날 먹고사는 할머니에게 30만 원은 너무나도 큰돈이었고, 무엇보다 나 대학 보내기 위해 모아 놓은 돈을 아빠가 훔쳐가서 썼던 터라 할머니가 나에게 줄 수 있는 돈이 없었다.
당시 아빠는 새엄마라는 사람과 집에 들어와 내 방을 빼앗아 살고 있었다. 아빠에게는 30만 원이라는 돈이 있었다. 술값이었다. 아빠는 끝끝내 자신의 술과 나의 대학을 바꾸어주지 않았고, 예치금을 내야 할 날이 당장 코앞이라 아르바이트도 구하지 못했던 나는 결국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 후 나는 엄청난 탈력감을 느끼며 대학을 포기하고 바로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러한 지금까지 나는 고졸이다. 그 당시 대학이라는 꿈을 거세 당해 다시는 대학이라는 꿈을 꾸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남들은 사이버대나 방통대라도 가는 게 어떻겠냐 말했지만 이미 내 안에서 대학은 끝난 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 그런 말들은 나에게 너무나도 폭력적으로 느껴졌다. 쉽게 마음을 고쳐 먹고 갈 수 있었으면 진즉 갔겠지. 고졸 학력으로 여기저기 떠도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라는 자기 연민에 빠져 있던 것이다. 너무나 당연히 대학이 아닌 취업을 택하라는, 네 주제에 무슨 대학이냐는 집안의 분위기 속에서 나는 나 자신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싶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서른이 넘은 지금의 나는 ‘감히’ 대학 생활을 다시 꿈꿔본다. 아빠와 고모들, 특히 둘째 고모에게는 미안하지만 (큰 고모는 나와 별 접점이 없었다.) 그들이 죽고 난 다음 생긴 여유다. 실제로 나는 아빠가 죽었을 때 아빠가 나에게 행사했던 언어와 물리적 폭력들을 생각하며 울었지, 단명한 아빠가 불쌍해서 울진 않았다. 너무 오랜 시간 남들 눈치를 봐가며 살아온 나를 위해 시간과 여유가 허락이 되면 방통대라도 들어가 볼 생각이다. 활발한 캠퍼스 생활은 누리지 못하더라도 (낯을 많이 가려 불가능에 가까움) 대학생이라는 이름표는 가지고 싶다.
이렇게 가난하고 부모를 잘못 만나면 거세당하는 꿈이 한 가지씩은 생기기 마련인 것 같다. 말 그대로 단순 포기가 아니라 ‘거세’라서 웬만한 계기가 없는 한 다시는 그 꿈을 껴안지 못하게 되기도 한다. 나 또한 아빠와 고모들의 죽음으로 다시 꿈을 꿀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들 중 하나라도 살아 있었으면 나는 대학도 글쓰기도 다 포기한 채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삶을 연명했을 것이다. 아빠와 고모들에게는 잔인한 말이지만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렇다.
가난은 시야를 좁혀놓는다. 무언가를 향해 달려가고, 꿈을 찾고,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은 어쨌거나 다 주변 상황의 풍족함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주 드물게 불에 타는 의지가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보통은 주변 상황의 풍족함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정말, 정말 너무나도 가난하면, 그리고 가난으로 인해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있다면 다시 일어서는 것은 물론이요, 달려갈 힘조차 허락해주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도 지금은 유튜브와 브런치 같은 것으로 ‘갓생(부지런하게 사는 인생)’을 주제로 하는 동영상들과 글, 이미지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 덕분에 가난한 사람들이 예전보다 더 성공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나부터도 좁아터진 생각을 조금이라도 넓히기 위해 여러 갓생 사는 사람들의 동영상을 보고 글을 읽는다. 따라 해보기도 한다. 예를 들면 미라클 모닝이라던지 자기 확언, 감사일기 등등. 확실히 하고 나면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 같아 뿌듯함을 느낀다.
책의 중요성도 빼놓을 수 없다. 나는 실제로 가난에 대한, 대학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라앉히기 위해 어릴 때부터 많은 책을 읽었다. 이사를 오면서 줄인다고 줄였는데도 백 권이 넘는 책들을 소유하고 있기도 하다. 책에는 가만히 있으면 알지 못하는 정보들이 아주 많이 담겨 있다. 작게는 맞춤법을 알려주기도 하고 크게는 자기 관리 비법이나 인간관계의 비법을 알려주기도 한다. 어떤 책은 부자가(!) 되는 법을 알려주기도 한다. 꿈을 포기당하지 않고, 거세당하지 않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도 분명 있을 것이다. 어린 날의 나는 그런 책을 유감스럽게도 찾지 못해서 그렇지.
억지로 포기당하고 거세당한 꿈이 있다면 일단 속는 셈 치고 ‘갓생’을 가까이해보는 것이 어떨까? 흔해 빠진 말이지만 흔해 빠진 말일수록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갓생을 사는 데는 (무엇을 배우지만 않는다면) 돈이 들지 않는다. 남들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 그저 바뀐 수면패턴을 다시 제대로 바꾸고, 털지 않았던 이불도 털어보고, 하지 않았던 산책을 해보고, 읽지 않았던 책을 읽으며 마음에 와닿는 구절을 필사해보는 일일 뿐이다. 심지어 책은 시립도서관이나 구립도서관에 가면 무료로 대여해서 읽을 수 있고, 신간을 바로 대출하여 읽을 수 있는 바로 대출 시스템도 있다.
갓생을 작게나마 실천해보고 나면 버려두었던 꿈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잡고 싶어 진다. 어제보다 더 나은 내가 되고 싶은 것이다. 내가 지금 너무 가난하다면, 가난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면 일단 다 제쳐두고 이불부터 개보자. 나는 이것을 깨닫기까지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징그러운 자기 연민과 자기혐오만 끌어안고 살았던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가난은 90%의 확률로 나 자신 때문이 아니다. 주변 때문은 있을 수 있다. 나는 우리 집이 가난했고 지금까지도 내가 가난한 이유가 전적으로 아빠에게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아빠는 자신의 돈을 나누기는커녕 모아둔 돈을 훔쳐가는 사람이었으니까. 죽을 때도 나에게 빚만 안겨놓고 가서 한정승인을 하게 만든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빠 탓도 3년 가까이를 하다 보니 이제 지겹다. 더는 하고 싶지 않다. 나 자신에게나 열중하고 싶다. 그래서 아빠 탓을 하며 우는 대신 갓생을 산다. 일찍 일어나서 약을 먹고, 이불을 개고, 청소를 하고, 책을 펴고, 읽는다. 샤워를 하고 밥도 꼭꼭 씹어 먹는다. 그럼 내가 어쩔 수 없이 포기했던 꿈들이 다시 나에게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진다. 그와 동시에 나는 열등감과 콤플렉스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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