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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샤 pacha Feb 22. 2022

코로나 시대의 경제 활동

 일을 하지 않으니 돈 받을 일이 없어졌다. 자연 현금을 만질 기회도 사라졌다. 계산은 늘 카드로 그것도 "접촉 없이(sans contact)"로 주로 한다. 코로나가 일어나기 전에는 주로 현금만 쓰고 현금을 계좌에 넣고 가끔 카드를 사용했다. 그런데 코로나가 터지면서 몇 년 전부터 프랑스 정부에서 적극 추진하는 탈물질화 정책에 본의 아니게 협조하게 되었다. 

 주로 카드로 결제하는 것은 정부가 지급하는 보조금이 통장 입금되어서 굳이 현금을 찾아 쓸 필요가 없어서이다.

한편 대중교통편을 이용할 기회가 별로 없는지라 5월부터 1년짜리 교통 카드를 중지시켰다. 감금 기간에 해당하는 4월은 환불을 해준다고 했다. 코로나와 더불어 흰색 바탕에 RATP(파리시 교통공사)와 SNCF(지금은 민영화된 예전의 국철)의 로고가 새겨진 쓰지 않던 종이 표를 다시 쓰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교통 티켓은 완전히 물질성으로 되돌아갔다.


 한 달 보름에 한 번씩 들러다가 세 달 넘어 한 번씩 가는 미용실에서는 카드로 계산하기가 뭐해 늘 하던 대로 현금을 낸다. 이때 지갑에서 꺼내 만져보는 지폐의 느낌은 이물질적이다. 눈에도 멀어진 터라 돈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아, 이게 돈이지!" 하는 반응마저 보인다. 제각기 일곱 가지씩 되어 외국 관광객이 지불할 때 어지간히 애먹는 유로 지폐며 동전은 이제 마치 저 먼 남의 나라 돈인 양 낯설어졌다. 


 새해 들어 처음 간 부르라렌(Bourg-la-Reine : 파리 외곽 정남 쪽 5킬로쯤 있는 도시로 오래전부터 파리에서 남쪽으로 가는 교통의 요지였다.) 중심가의 케밥집에서 생긴 일이다. 1월 3일 일요일이라 케밥집이 열렸을까 걱정하며 갔다. 대부분 가게는 다 닫혀 있고 연휴 끝이라 거리를 오가는 사람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올 때 지나친 빵집은 열려있었다. 빵집이 일요일에 여는 것은 이상할 게 없다. 케밥집 옆이 정육점인데 거기도 열려 있었다. 정육점은 월요일이 노는 날이니까. 암튼 케밥집이 열린 게 어디야 하고 속으로 뇌면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자주 가는 데라 전광판에서 "7일 내내"라는 광고를 기억하고 온 거였다. 늘 형제 둘이 일하는데 이 날은 동생만 나와 막 주방을 가동하는 중이었다. 아마 내가 첫 손님인 듯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쪽에서 먼저 인사를 건네 왔다. 나도 답례를 하고, "혹 닫혀 있음 어떡하나 걱정하고 왔는데 열려서 다행이에요."하고 덧붙였다. 손님은 나밖에 없었다. 얼마 지나자 바로 가까이 사는 사람인 듯한 청년이 나타나 식당 주인과 아주 친근하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 손님은 아예 현금을 손에 쥐고 식당에 나타났다. 이윽고 내가 주문한 케밥 세 개가 나왔다. 


"음료수 포함시켜요?" 

"아뇨. 카드로 계산할게요."

그러자 주인장 왈 "현금 없어요?" 하고 하질 않나. 

"오케이. 이게 마지막 현금이오!" 하고 십 유로짜리 두 장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터키 친구가 "농담도 잘하시네."하고 대꾸를 해왔다. 거짓말 보태지 않고 내 지갑에 든 현금의 전부였다. 

"그럼 다음부터 현금으로 계산할게요."

씩 웃으면서 주인은 "선물입니다."하고 코카콜라 한 캔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고객이 되었다고 이런 서비스까지 제공하네 하고 싱긋이 웃으며 집으로 되돌아왔다.

미용실에 이어 케밥 집도 앞으로 현금을 내게 되었다. 


    ***

 코로나가 터지면서 인터넷으로 책 주문하는 것 빼고 온라인 결제할 일이 거의 없어서 가게에서는 무조건 카드결제를 한다. 집 보험 수표를 연말까지 도착하게 보낸다는 게 오늘내일하다가 결국 연초에 우편으로 부치게 되었다. 늘 우표 몇 장이 책상 한편에 나뒹굴었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1킬로 다리품을 팔아 부르라렌 우체국으로 갔다. 수표 써보기도 참 오랜만이었다. 지난번 집에서는 수표로 집세를 지불했지만 지금 사는 아파트로 이사 오면서 은행 계좌에서 자동 이체로 빠져나간다. 자영업자가 내는 납입금도 처음에는 수표로 내다가 카드로 결제한 지 이 년 이상 되었다. 각종 세금은 정부에서 몇 년 전부터 계좌 이체나 카드 결제로만 하게 만들어두었다. 카드 결제가 일반화되면서 탈물질화에 밀려 수표도 추억의 뒤안길을 걷고 있다. 슈퍼에서 가끔 프랑스 할머니가 수표를 쓰는 모습도 이제 점점 사라져 가는 풍경이다.


 전통을 자랑하던 프랑스의 국영기업 라포스트(La Poste : 프랑스의 우정국)는 채산성과 경쟁력이 떨어지면서 벌써 오래전 2010년에 민영화되었다. 이미 인터넷 시대와 함께 우편물이 명맥만 유지하는 수준으로 줄어든 상황이었다. 강제로 우편함에 쑤셔 넣는 종이 광고물도 웹페이지의 배너광고로 대체되면서 물량이 눈에 띄게 줄었다. 이래저래 우편함에 배달되는 우편물은 주로 관공서나 은행, 보험회사 등에서 보내는 공적인 편지류밖에 없다. 물론 이런 종류의 편지류 마저도 점점 전자서류로 대체되어 우편물은 신비한 상어가죽처럼 날이 갈수록 줄어든다. 대신 접촉 금지의 시대를 맞아 온라인 주문으로 받는 소포는 오히려 늘어났다. 소포 전달은 탈물질화할 수 없는지라 여전히 운송회사의 배달원이 배달한다.


 현금 거래를 줄이는 게 탈세를 막는 하나의 방법이다. 정치권에서 탈물질화를 외치며 금융 거래의 투명성을 내세우지만 세금을 악착같이 거둬들이자는 속셈도 숨어 있다. 그러면서도 잘 가나는 거부들이 오프쇼어에다 스톡옵션으로 요리조리 과세를 용케 빠져나가게 허용한다. 제도권 밖의 가상 화폐 보유도 과세를 빠져나가는 멋진 묘수다.

 전쟁에도 꼭 돈 버는 사람 따로 있듯이 코로나로 플랫폼 기반의 구글이나 아마존, 페이스북, 넷플릭스 같은 미국의 거대 기업들은 오히려 화수분이 되었다. 대면 접촉하는 분야는 하나둘씩 망해가도 접촉 없는 사업은 더욱더 잘된다. 


 파리에 뜸하게 나가니까 전철 탈 기회도 흔하지 않다. 부르라렌에서 파리의 레알까지 타는 RER B 노선은 탈 때마다 구걸하는 사람 한둘은 꼭 마주친다. 이젠 자주 보아 낯익은 사람도 여럿 된다. 내 주머니 사정이 나빠져 1유로도 줄 수 없지만 동전 지갑을 갖고 다니지 않아서 주고 싶어도 줄 수 없다. 코로나로 구걸하는 사람들은 훨씬 더 딱하게 되었다. 보통 사람들도 힘들어진 판에 그들은 오죽하랴.  


 코로나가 터지고 나서 무료로 나눠주는 식료품 배급 줄에 길게 늘어선 대학생들 이야기가 심심찮게 미디어를 장식한다. 그들은 주로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서빙을 하다가 코로나로 업소가 닫히면서 수입이 없어졌다. 코로나 이전 부업으로 일하던 대학생들은 전체의 40%이고 수입은 월평균 274유로였다. 그중에는 자신의 생계 해결은 물론 가족까지 부양해야 하는 학생도 더러 있었다. 몇 연구 단체와 Linkee 협회가 연계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2020년 11월-2021년 4월 동안 식료품 배급을 이용하고 설문에 응한 3200명 대학생 가운데 3분의 2는 2021년 1월부터 거주지가 멀어서 1유로에 한 끼를 제공하는 학생식당(Crous)을 이용할 수 없었다고 한다. 반 이상은 한 달 생활비가 50유로 미만이고, 46%는 주머니 사정으로 끼니를 거르고, 40%는 학업을 중단할 생각이라고 한다. 이런 뉴스를 접할 때마다 씁쓸하기보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는다.


    ***

 손목시계 전지 갈 때 몇 번 이용했던 부르라렌 중앙통의 보석상이 없어진 지 이 년은 더 지났다. 유월 말 날 잡아서 전지를 갈 수 있다는 부르라렌 중앙통의 잡화가게에 갔다. 이날은 이른 아침부터 옆집과 윗집에서 집안 공사 소음에다가 잔디 깎는 소음까지 더해 도저히 집중해서 책을 읽을 수 없었다. 낮잠을 자고 깨어나 머리나 눈은 어지간했는데 소음 때문에 망쳐버렸다. 에라, 부르라렌 서점에나 가 보자. 손목시계 전지도 갈 겸.

 젊은 가게 직원은 어버버버 프랑스 말로 사흘 뒤에 오라고 했다. 베트남 여인인가 중국 여인인가. 금요일에나 전지 갈아 끼우는 직원이 온다나... 다시 오마고 대답하고 손에 들었던 멈춰버린 손목 시계를 다시 차고 발길을 서점 쪽으로 돌렸다. 서점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직원이 완강하게 가로막았다. 앗차, 마스크를 끼지 않았네! 문간에 서서 사려는 책을 계산대 직원한테 말했더니 컴퓨터로 검색하고 나서 서가에 없다고 대답했다. 친절한 말투가 아닌 강압적인 어조다. 오늘 오전 쏘(Sceaux) 시내의 빵집에서도 퉁퉁한 아줌마가 퉁명하게 대했는데 연달아 서점 직원까지 그러네. 주문하겠느냐... 일주일 만에 오는데... 그래 주문할 게. 일주일씩이나. 결국 아무 볼일도 성공하지 못하고 발길을 되돌렸다. 집에 되돌아왔을 때 아직도 공사 소음이 들려왔다. 


 칠월 초 산책을 하다가 집에서 2킬로 떨어진 쏘 시내의 보석상에 들어갔다. 이 때는 감금 기간도 통금 기간도 아닌 자유로운 시기였다. 대신 가게 안에 들어갈 때 마스크 착용이 권장되던 때였다. 출입문 바로 안쪽에 검은 양복 차림의 흑인 안전요원이 푸른 마스크를 낀 채 들어오는 손님을 감시하였다.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 여인은 시계를 맡기고 가라고 했다. 전지 가는 것도 예약해야 하나? 단 몇 분도 안 걸리는 일인데. 집이 멀어서 그러기 곤란하다고 했더니, 도도해 보이는 이 여인은 삼십 분 뒤에 찾으러 오라며 선심 아닌 선심을 베풀었다. 근처 서점에서 이 책 저 책을 건성으로 훑어보다가 삼십 분이 지나자마자 보석상으로 얼른 되돌아왔다. 그런데 계산할 때였다. 으레 신용카드를 내밀었더니 그 액수(10유로)는 카드를 받을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의외였다. 빵집에서는 그보다 적은 액수도 다 카드로 계산하는데. 다행 지갑에 이 십 유로짜리 지폐가 한 장 남아 있었다. 보석상은 탈물질화에 역주행이네. 반정부 가게군. 보석상 주인이 유태인이라서 그런가. 사실 여부를 모르면서 이렇게 지레짐작하는 것은 지독한 편견에다 인종차별적인 발상이다. 프랑스에서 아시아계는 너나없이 통째로 "시누아(chinois : 중국 사람)"로 놀림당하듯 보석상이라고 다 유태인은 아니지 않은가. 아무튼 한 달 이상 가지 않던 손목시계를 되살려 놓아 기분이 개운해졌다. 그래 보아야 손목시계는 책꽂이 앞에 놓여 탁상시계로 주로 쓰일 텐데… 


 봄의 1차 감금 기간 중 약국이나 담배가게, 생필품 파는 가게를 빼고 웬만한 가게들이 다 닫혀서 하는 수 없이 인터넷상으로 책을 두 번 주문했다. 감금이 해제되고 두 번은 부르라렌 동네 서점에서 책을 주문하고 일주일 뒤에 찾으러 갔다. 불편해도 대형 서점보다 동네 서점을 이용하자는 의도였다. 루브르 근처 서점에서도 책을 한 권 산 적이 있다. 지난 연말 레알의 프낙 서점에 책 사러 갔다가 현장에 없어서 두 번 주문해서 집으로 배달받았다. 가능하면 플랫폼 거대기업 아마존을 피하자는 생각에서였다. 웹 사이트를 검색하고 서점에 있는 것으로 알고 갔는데 없다고 했다. 첫 번째는 주문받은 역사서 쪽 직원이 말한 대로 일주일 만에 무사히 배달되었다. 두 번째는 같은 직원한테 주문했는데도 배달 사고가 나서 일주일이 아니라 한 권은 3주 만에 한 권은 4주 만에 받았다. 이유인 즉 옛날 집 주소로 부쳤으니! 먼저 현장에 가서 항의를 하고 이어 애프터서비스에 몇 차례 전화를 걸어 그나마 그 정도로 마무리되었다. 이러니 아마존과 경쟁이 안되지. 아마존은 빠르고 정확하게 배달해주었다. 어쨌든 프랑스에서는 모든 게 다 느리다. 단 돈 받아 가는 것 빼고는. 그것만은 득달같다.

 이미 플랫폼으로 검색하고 클릭하여 책을 구입하는 게 일반화된 지 오래다. 불편한 자세로 서가에 기대거나 비좁은 복도에 쭈그리고 앉아 종이와 잉크가 어우러져 내는 냄새를 맡으며 책을 기웃거리는 사람은 나 같은 구세대뿐이다. 자신이 디지털 세대라고 우기려고 그러는지 전자책만 보는 사람도 점점 늘어난다. 코로나 이전 자투리 시간 활용은 주로 루브르 안에 있는 서점이었다. 사지 않을 책도 훑어보고 다음에 살 책도 물색하며 서점 한편 책상에 앉아 책 읽던 시절이 벌써 아득하다.


 크리스마스 이브날 저녁 이웃집에 초대받아가서 이런저런 화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빵 이야기가 나왔다. 또 원료인 밀 이야기로 넘어갔다. 


 "당시 빵이 네 등급(최고급 빵, 흰 빵, 보통 빵, 흑빵)으로 나뉘었는데 최고급 빵을 만드는 밀은 역시 프로방스산이나 랑그도크 산 프랑스 밀 이래. 수입 밀 중에서 프랑스산을 대체할 수 있는 밀은 영국산이나 네덜란드산 뿐이고, 해외 밀이라고 부르는 중동산이나 북아프리카산은 싸기는 해도 깡촌 사람들이나 죄수들이 먹는 최하급인 흑빵 원료로만 쓰였나 봐."

 

 이어서 나는 페스트가 터질 무렵 1720년 초반 마르세유에서 밀 부족 사태가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더욱이 밀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마르세유 주변 지방의 밀 작황이 좋고 창고에 밀이 있는데도 한 동안 부족 사태가 일어났다. 특히 밀을 수출하는 외국에서 은행 지폐를 받지 않으니 무역상들도 밀을 제때 들여올 수 없었다. 페스트가 번졌을 때 시 당국도 밀을 구입 하여 공급해야 하는데 가진 돈이라고는 지폐밖에 없었다. 현금을 확보하기 위해 당국은 온 가족이 다 죽어 상속자가 없는 집의 현금을 취하고 도매상인들이 보유한 현금을 압류하기도 하였다. "은행 지폐는 쓸데없는 돈이었다. 종이 쪽 가지고는 밀도 가축도 기대할 수 없었다. 절대적으로 현금을 보내야만 되었다."하고 1720년 8월 8일에 지로 신부가 쓴다. 그리고 마르세유의 밀값은 현금 지불과 지폐 지불 가격이 따로 형성되었다. 결국 지불할 현금이 없어서 일시적으로 밀 공급 부족이 생긴 셈이었다. 강제 유통시킨 지폐 가치는 금세 떨어지고 물가가 치솟으면서 구매력이 떨어지는 인플레이션이 만든 현상이었다. 



    로 시스템과 은행 지폐


 오를레앙 공의 섭정(1715-1723) 초기 프랑스는 루이 14세 때 거듭된 전쟁과 과도한 건축 공사로 누적된  엄청난 국가 부채로 인해 극심한 재정난에 닥뜨린다. 그때 스코틀랜드 귀족 출신 괴짜 금융가 존 로가 파리에 다시 나타나 재정위기를 대번에 해결할 방안을 오를레앙 공한테 소개한다. 


 17세에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로는 에든버러에서 공부를 하다가 21세에 런던에 정착한다. 얼마 가지 않아 여성 편력으로 전 재산을 다 써 버린다. 비상한 기억력과 특출한 계산력을 갖춘 그는 확률 계산법을 동원하여 내기와 도박으로 먹고산다. 1796년 23세 때 그는 여자 문제로 결투에서 영국 왕의 측근 젊은 댄디를 죽인 살인범으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과실 치사로 사면되지만 상대편 가족의 항고로 투옥될 뻔하던 중 대륙으로 탈출하여 암스테르담으로 온다. 거기서 그는 금융 공부를 한다. 프랑스와 네덜란드를 왔다 갔다 하다가 1705년 스코틀랜드로 되돌아가 펴낸 [통화와 상업에 관한 고찰]에서 "한 나라의 번영은 지불 화폐를 충분하게 보유하느냐에 달려 있어서 금속 화폐를 위탁하고 은행 지폐를 사용하면 경제 발전을 가져온다."는 주장을 편다. 그가 생각한 은행 지폐의 보증은 가격 변동이 심하지 않은 토지 자산이었다. 계속 경찰에 쫓기는 신세를 면하지 못하다가 다시 대륙으로 피신한다. 스코틀랜드에 이어 파리에서도 자신의 이론이 거절당하자 이번에는 이탈리아로 간다. 시칠리아 왕국과 사브와 공국에서도 받아들이지 않자 그다음에 베네치아로 간다. 로는 베네치아에서 도박과 미술품 구입으로 거액을 끌어모은다. 결국 이탈리아에서 지지자를 찾지 못하자 다시 네덜란드로 간다. 그곳에서 도박과 복권으로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인다. 대단한 부자가 된 그는 1714년 파리에 정착한다. 


 마침내 로는 섭정 오를레앙 공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1716년 그는 개인적으로 주식을 발행한 자산으로 일반 은행(Banque générale)을 설립하고 언제라도 금화로 환금할 수 있는 은행 지폐를 발행하여 대성공을 거둔다. 그는 일반 은행에서 지폐로 간접세를 받을 수 있는 특권도 따낸다. 사업을 확장하여 세네갈 회사, 중국 회사, 동인도 회사를 병합하고 회사 이름을 서양 회사로 바꾼다. 1718년 일반 은행은 국가가 보증하는 왕립 은행(Banque royale)이 된다. 국가부채를 줄이는 방안으로 서양 회사에서 500 리브르 상당의 주식을 발행하여 단기 채권과 함께 왕립 은행에서 이 주식을 사들일 수 있게 한다. 국가가 거의 지불정지 상태가 되자 주식은 150 리브르 수준으로 떨어진다. 1719년 루이지애나 투자 회사 미시시피 회사를 사들인 다음 서양 회사도 인도 회사로 이름을 바꾼다. 이 회사는 9년간 프랑스의 금속 화폐 발행 독점권을 따낸다. 1719년 국가 부채를 줄이는 방안으로 장기 국채를 발행하고 3% 저금리로 12억 리브르를 섭정한테 빌려준다. 1717년 150 리브르, 1719년 12월에는 10000 리브르까지 폭등한다. 이렇게 되자 투기꾼들이 은행 본부로 몰려가 지폐나 주식을 사서 되팔거나 환금 조치하려고 레알 일대는 벌집 쑤셔 놓은 듯한 난장판으로 변한다. 


 그런데 연말에 인도 회사의 주가는 떨어지기 시작한다.


 1720년 1월 5일 재무장관이 된 로는 주가 하락을 막으려고 자신의 주식 일부를 사들이고 인도 회사가 일반 은행을 흡수하여 왕이 보유한 10만 주를 회수한다. 반대파가 로 시스템을 무너뜨리기 위해 투기를 통해 주가를 2만 리브로로 폭등시킨 다음 환금 조치를 취하자 환불해 줄 금화는 금방 바닥이 나고 곧바로 주가는 폭락한다. 이에 맞서 로는 지폐 사용을 권장하고 금화 축재를 막기 위해 한 가구당 500 리브르 이상 금화 보유를 금지시킨다. 3월초 로는 주식을 사들이기 위해 금속화폐 재 주조를 발표하고 주식 상한가를 9000리 브르로 고정시킨다. 또 금과 은의 운송을 금지시키고 지폐로 세금을 내면 조세 감면의 혜택을 준다. 3월 11일 그해 12월 31일부터 금은화의 법정화폐 중지를 발표하자 바로 불만이 쏟아져 나온다. 이미 3월 24일부터 로 은행이 파산할 거라는 내부 기밀이 밖으로 새 나간다. 지폐 가치는 많이 떨어지고 물가는 치솟으면서 구매력은 줄어든다. 급기야 로 은행의 파산 소문이 퍼지면서 7월 17일 폭동이 일어나 17명이 죽는 사고까지 일어난다.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보유 주식은 내다 팔고 가진 지폐는 환불 요청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곧 로 시스템은 한계에 이른다. 결국 11월 1일부터 지폐 사용이 정지된다. 로 시스템이 파산하자 그는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12월 14일 파리를 떠나 망명길에 오른다. 네덜란드의 우트레히트와 브뤼셀을 거쳐 빈털터리로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1726년 베네치아로 간다. 거기서 1729년 감기에 걸려 폐렴으로 죽을 때까지 도박으로 연명한다.


 로 시스템의 실패로 은행 지폐와 국가 신용도는 떨어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국가와 개인의 부채는 줄어들고 무역이 발전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주식이나 지폐를 대량 소지한 사람들(국채를 가진 사람이나 대금업자)은 엄청난 손해를 보지만 건축공사가 생기면서 일 자리가 늘어나 일부 서민층들이 부자가 된다. 


 로 시스템(주식의 매입과 매도, 투기, 투자, 배당금, 자금 지원 등)은 당시로는 그야말로 시대를 너무 앞지른 적어도 2백 년은 앞서간 획기적인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로는 예견적 금융가인가 아니면 희대의 투기꾼인가? 금은화 본위의 화폐 체계에서 신용 거래인 은행 지폐와 유가 증권인 주식을 발행한 것이었으니... 신용의 바탕에서 유통되는 것이 지폐인데 당시 사람들은 금은화밖에 몰랐다. 지폐나 대출, 증권이며 주식 투기는 프랑스와 프랑스 사람한테는 너무나 낯설고 급작스러운 일이었다. 지금도  프랑스 사람들은 침대 매트리스에 현금을 꽂아 저금하는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 있는데 말이다.

  

    ***

 이제는 탈물질화 정책에 편승하여 은행 화폐 사용도 많이 줄어들었다. 이런 추세로 간다면 멀지 않은 장래에 은행화폐가 사라질 거라고 한다. 벌써 금융 시장에서 비트코인 같은 가상 화폐가 서서히 재래 금융시장을 잠식하고 있다.  

 어쩌다가 지갑을 열어본다. 한때 현금으로 배가 불룩했던 지갑은 지금 신분증과 의료 보험 카드, 신용 카드를 빼면 무슨 무슨 회원 카드만 잔뜩 꽂혀 있다. 돈 들었던 칸에는 카드 영수증 몇 개가 덩그러니 자리를 차지하고 그 수북한 현금은 다 어디 갔는지 알 수 없다. 고작해야 10유로나 20유로짜리 지폐 서너 장만 말라비틀어진 종이 쪽처럼 손때 타지 않은 채 숨죽이고 있다. 현금 지불을 하지 않으니 지폐에 손댈 일도 없어졌다. 카페에서 커피 마실 때면 요긴한 동전을 넣어 다니던 동전 지갑은 아예 책상 서랍에 처박아버린 지 오래다. 사실 지폐용 지갑도 지금은 지폐를 쓰지 않으니 카드 꽂이 구실만 하는 셈이다. 한 번은 카르푸르 마켓(프랑스의 슈퍼마켓 체인)으로 짐수레를 끌고 장 보러 가다가 가게 백 미터쯤 앞에서 지갑 없이 나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젠장! 휴대전화기에 애플 페이 기능이 있기는 한데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어 그걸로 계산할 자신이 없었다. 눈물을 머금고 1킬로가 넘는 거리를 되돌아왔다. 신기술에 익숙하지 않은 구세대는 아날로그라야 안심한다. 탈물질화는 어쩐지 불안하다.

 

 케밥집 주인이 거슬러준 3,5유로는 마땅히 쓸 일이 없어 한 동안 바지 호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그러다가 호주머니에서 빼내어 책상 한편 책꽂이 모퉁이에 얹어두었다. 2유로 동전 하나, 1유로 하나, 50센트 하나. 오늘 오전 거의 네 달만에 파리에 있는 미용실에 간다. 오랜만에 파리 가는 전철도 타고 현금으로 지불도 할 참이다. 2차 파고가 누그러들지 않고 바다 건너 영국에서 발생한 변종 바이러스가 기승을 떠는 판국이라 한국에서 부쳐온 94퍼센트 보호되는 마스크도 꺼내 들었다.


 아주 쌀쌀한 날씨는 아니지만 가능한 한 접촉을 피하려고 가죽 장갑까지 챙겼다. 물론 알코올 손 소독제도 잊지 않고 잠바 호주머니에 넣었다. 이러고 보면 그 옛날 페스트 의사에 가까운 무장을 하고 외출하는 셈이다. 파리 나들이가 무슨 전쟁터로 나서는 출정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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