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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샤 pacha Feb 24. 2022

코로나식 파리 외출

 일할 때 매일 나가던 파리인데 코로나와 함께 그렇게 먼 곳이 될 줄 몰랐다. 일단 일이 없으니 나갈 필요가 없어졌다. 한국 식품점에 가거나 친한 사람을 만나는 경우가 아니면 나갈 이유가 사라졌다. 1차 감금 기간(2020년 3월 16일-5월 10일) 중에는 예외적인 경우를 빼고는 자신이 거주하는 도(département) 안에서 이동만 허락한 터라 한 번도 파리에 나가지 않았다. 감금 조치가 해제되고 2주쯤 지나서야 한국 식품점 들른다고 처음 파리로 나갔다. 3월 11일이  마지막이었으니 두 달 열이틀만이었다. 

 

 토요일 오전 열 시에 집에서 출발했다. 기차 안은 선 사람 없이 네 자리에 두 명 아니면 한 명씩 앉아 있었다. 완전히 빈자리는 없어 그냥 서서 가기로 했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역 안내 방송은 무척 낯설다. 도무지 현실이 믿기지 않는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됐지? 그 사이 황수선화는 지고 개양귀비꽃이 한창이다. 계절이 바뀌었다. 마스크 낀 사람들의 얼굴은 하나 같이 무덤덤하다. 거리 유지한다고 서로 경계하는 눈치마저 보인다. 이야기 소리도 들리지 않아 기차 안은 조용하다 못해 적막하다. 기차가 파리의 첫 번째 역을 다가가는데 가슴이 뭉클했다. 시테 위니베르시테르, 시테 위니베르시테르 ! 


 5월 말일에 두 번째로 파리로 나갔다. 날씨가 따뜻해서 바깥에서 사람을 만나도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아직 튈르리나 뤽상부르 같은 큰 공원은 닫힌 상태였다. 그때는 대중교통편이나 가게 안, 사람이 붐비는 도심 일부 지역에서만 마스크를 끼게 되어 있었다. 메트로에서 내려 팔레 루아얄 광장으로 나와 루브르 쪽을 보며 사진 몇 장을 찍었다. 제 집 드나들 듯했던 루브르는 철문을 굳게 잠가두어 폐가처럼 보였다. 광장 한가운데 3월 초 설치한 사랑의 자물쇠로 만든 감금된 집만 덩그마니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날[1] 약속 장소인 코메디 프랑세즈 앞에 다들 약속이나 한 듯 마스크를 끼고 나타났다. 얼굴을 알아보는데 시간이 걸렸다. 카페와 레스토랑이 닫혀 있으니 김밥과 음료수를 사들고 다행 열려 있는 팔레 루아얄 공원에서 먹기로 했다. 나오기로 한 한 사람이 나오지 않아 모두 다섯이 모였다. 친한 김 선배가 영구 귀국하는 환송회 모임이었다. 6월 1일 귀국인데 그 이튿날부터 카페와 레스토랑, 큰 공원이 열게 되어 있었다. 피나무 그늘 아래 설치된 벤치는 빈 곳이 드물었다. 점심을 먹는다고 마스크를 벗으니까 좀비에서 온전한 사람의 얼굴이 되었다. 다들 집에만 붙어 지낸 처지라 혈색은 나빠 보이지 않았다. 햇빛은 쨍쨍하고 꽃향기며 풀 냄새가 날려왔다. 


 "누구는 코로나가 시작되기 직전에 영구 귀국했고 또 누구도 짐 싸들고 서울로 들어갔고 또 누구누구는 일이 없으니까 다니러 한국에 들어갔다." 

 "누구는 한국 가서 그 새 일자리를 찾아 일하고 있다."

 "그 참 재주도 용해."

 "그래도 선배는 들어가서 할 일이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나도 돌아갈 데와 할 일이 있으면 당장 들어가고 싶구만…"


두 시간 반쯤 보냈지 싶다. 선배는 며칠 전 코로나 검사 결과 음성 판정을 받기는 했는데 이상하게 열이 나서 떨어지지 않는다며 걱정을 했다. 


 "음성인데 거부당하기야 하겠어요."

 

 비행기 타기 전에 돌리프란(해열제)을 챙겨 먹고 타라는 충고를 해주었다. 실제 미국 유학생 한 명이 탑승 거부당할까 걱정되어 타기 전에 해열제를 잔뜩 복용하고 탄 사례가 있었다. 


 "현지 적응하려면 시간 좀 걸리겠어요."

 "적응이고 자시고 할 거 없어. 도착하면 이튿날부터 바로 일터로 나가야 하니까."

 "하긴 그렇네."

 "한국 가게 되면 꼭 한번 찾아갈게요. 압니까, 계절노동자로 일하러 갈지도..."


 생리적인 현상을 해결할 방도가 없으니 더 이상 버티기도 힘들었다. 기념사진을 몇 장 찍고는 공원을 빠져나왔다. 코메디 프랑세즈 앞쪽에서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7월 중순 토요일 아는 사람을 만나려고 파리에 나갔다. 만나는 장소는 코메디 프랑세즈 앞 콜레트(Colette : 1873-1954, 프랑스의 여류 작가, 배우, 신문기자. 말년에 팔레 루아얄의 아파트에 살았다.) 광장. 6월과 달리 파리 본연의 모습에 가깝게 쏟아져 나온 사람들로 붐볐다. 쇼핑백을 든 러시아 관광객 한 무리가 우리 앞을 지나갔다. 이러다가 바이러스가 확산되면 어쩌나 걱정도 되지만 모처럼 활기찬 모습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날은 팔레 루아얄 정원 안에 있는 카페의 테라스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테라스를 꽉 매운 사람들은 환한 얼굴에 목소리를 높여 이야기 꽃을 피웠다. 우리 바로 옆 좌석에서는 젊은 남녀 둘이 대낮부터 삼페인을 마시고 있었다. 바캉스지에 사람이 몰리면서 1차 감금 기간 중 감염자가 비교적 적었던 부르타뉴와 부르고뉴 지방 쪽에서 감염자가 크게 는다고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7월 말 무렵 다시 문 열고는 처음 아는 사람 둘과 함께 팔레 루아얄 광장에서 가까운 빌라 카페로 갔다. 차도 일부를 급조하여 테라스로 만든 일본 식당이 즐비한 생탄길이나 카페가 많은 생토노레길 풍경은 무척 낯설었다. 사회적 거리 유지 때문에 가용 면적을 넓혀 영업할 수 있도록 식당들이 도로 일부를 점령하고 테라스 공간을 늘일 수 있게 허락한 결과였다. 관광객으로 보도가 북적였을 오페라 대로나 루브르 근처는 주로 일하거나 볼일 보러 나온 시민들이 띄엄띄엄 오갔다. 파리가 아니라 한적한 지방 소도시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지배인 디디에는 하루 매출이 너무 형편없어서 8월부터는 닫을 생각도 한다고 말했다. 꽉 차면 백 석은 넘는 큰 식당에 테라스에 손님 몇이 달랑 앉아 있었다. 실내는 우리가 독차지하였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생겼다. 구면지기인 서빙하는 친구의 이름이 좀체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딴 사람들의 이름은 다 생각나는데 유독 이 친구의 이름만 입에 맴돌았다. 나이 탓인가, 오랜만이라 그런가. 세 음절인데 그 알제리 친구 이름이. 안 지가 십 년도 넘는데. 그 참 희한하네. 다른 종업원들 이름은 멀쩡하게 떠오르는데 이 친구 이름만 생각나지 않으니… 로랑, 디디에, 아미드, 다비드, 사브리나… 다른 종업원들은 없고 디디에와 이 친구만 있었기에 이 친구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게 이상했다. 카페를 나올 때 최 선배가 라시드 이름을 부르는 통에 아 맞아 라시드지 하고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9월 초 바캉스가 끝나고 감염자가 크게 느는 시점이었다. 아는 사람을 만나 팔레 루아얄 정원에서 피크닉을 하고 빌라로 갔다. 이번에도 라시드와 디디에만 있었다. 우리는 늘 앉는 바에 자리 잡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사이 다 합쳐야 네댓 명이 실내에 들어와 식사를 하였다. 대화의 공통 관심사는 늘 이랬다. 


 "큰일 났어요, 빨라야 내년 여름에는 일할 수 있을까?" 

 "언제쯤 백신이 나오나?" 

 "전염병이란 게 하루아침에 없어지지 않는 거라 심리적 요인이 중요하다. 그래서 치료제든 백신이든 빨리 나와야 한다." 

 "올 12월까지 자영업자들한테 정부 보조금을 주는 게 어디냐?"


 9월 중순 파리에 나갔을 때 이날은 무슨 일인지 팔레 루아얄 정원이 닫혀 있었다. 대신 루브르 안뜰로 갔다. 일터로 놀러 가니 기분이 묘했다. 센강변 쪽 약간 돋워진 네모난 잔디밭 피나무 그늘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기온이 30도 넘고 해가 쨍쨍하니 날씨가 정말 좋았다. 한창 이야기를 나누는데 낯익은 루브르의 안전 요원이 나타났다. 반갑게 주먹 인사를 나누고 몇 마디 안부를 건넸다. 그러다가 우리는 자리를 옮겨 빌라 카페로 향했다. 카루젤 개선문을 지나고 로터리를 지나 피라미드 광장으로 걸어갔다. 피라미드 입구로 개인 관람객이 드문드문 들어가는 게 보였다. 피라미드 입구와 광장을 배경으로 사진 두어 장을 찍었다. 그리고 파사주 리슐리외로 걸어갔다. 단체 관람객 입구 쪽 검색대에 직원들이 오지 않을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문을 빠져나와 리볼리길을 건너다가 맞은편에서 역시 낯익은 안전 요원을 마주쳤다. 어쭙잖게 씩 웃으면서 서로 주먹을 부딪혔다. 으레 그랬듯이 바에 자리를 잡았다. 이번에는 라시드는 없고 아미드가 나와 있었다.


 10월 1일[2] 한가위 명절날 콜레트 광장에서 모두 다섯이 모였다. 바람 불며 날이 흐리기도 하고 명절날인데 풀밭 위의 식사는 어울리지 않았다. 어디로 갈까 의견을 나누다가 빌라로 갔다. 한 명이 더 합류하여 함께 모여 식사할 수 있는 최대 인원인 여섯이 되었다. 원탁을 차지하고 모처럼 포도주를 곁들여 식사를 하였다. 이날 대화에 집중력은 떨어져도 오랜만에 활기차게 수다를 떨었다. 


 "누구는 유튜브 제작해서 올리고 누구는 랜선 투어 한다."

 "또 누구는 줌을 통해 미술사 강의한대요."

 "좋은 전시회 많던데 같이 갑시다."

 "역사적으로 2차는 1차보다 약하게 왔어요."

 "2차 이왕 올 거면 빨리 왔다 갔으면 좋겠어요."

 "빨라야 백신은 내년 여름쯤이라는데…"

 "너무 오래가니까 힘들어요."

 "12월까지는 보조금이 나오니까 그럭저럭 버티겠는데 그다음은 깝깝해요."


 2차 감금 실시가 한 달이 지난 11월 28일부터 카페 레스토랑 바를 제외한 모든 가게들이 다시 문을 열고 1킬로 반경에서 한 시간 운동할 수 있던 것이 20킬로에 3시간으로 늘어났다. 감금 조치는 지난번 대통령 담화에서 단계적으로 완화한다고 이미 발표한 터였다. 당초 12월 15일을 해제 예정일로 잡고 있었다. 하루 확진자 5천 명 미만에 중환자 3천 명 미만인 조건이었다. 그렇지만 예상대로 상황이 나아지지 않자 결국 모든 게 약간씩 뒤로 미루어졌다. 12월 10일[3] 정부의 발표는 이렇다. 15일부터 외출할 때 이동 증명서를 구비할 필요가 없어진 대신, 저녁 8시부터 아침 6시까지 통행금지가 다시 실시된다. 종교 의례에 참석할 수 있는 인원도 현재의 30명을 그대로 유지한다. 다시 열 것으로 예상했던 박물관, 영화관, 공연시설, 체육시설은 다 3주 뒤로 미뤄지고 카페, 레스토랑은 훨씬 더 기다려야 한다.

 

 2차 때는 1차 때보다 완화된 분위기여서 해제 전인데도 파리행을 두 차례나 감행했다. 2차 감금 기간에 한 달 동안 나가지 않다가 한 달을 꼬박 채우고 12월 2일에 처음 파리로 나갔다. 나가면 볼일은 보겠지만 사람 만나기는 어려운 상황이라 굳이 파리로 나갈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코로나가 길어질수록 사람을 점점 덜 만나고 전화나 문자 교환도 갈수록 뜸하게 한다.


 12월 초 이번에는 식품점에 들러는 김에 아는 사람도 만나기로 했다. 물론 이동 증명서를 구비하고 나가는 외출이었다. 하루에 한 번꼴로 외출(산책, 조깅, 슈퍼)해서 인쇄하지 않고 정부 사이트의 디지털 증명서를 이용하였다. 전철을 타고 가다가 디지털 증명서를 새로 작성하지 않은 게 떠올랐다. 주변에서 더러 검문받은 적이 있다고 들었지만 나는 다행 한 번도 검문을 받지 않았다. 부랴부랴 휴대전화기를 열어 증명서를 새로 만들었다. 명목은 생필품 구입이었다. 이런 경우 이동 증명서를 지참하면 제한된 거리(10킬로)나 시간(1시간)이 초과되어도 허용한다고 들었다. 파리에 있는 한국 식품점은 시간과 거리가 감금 규칙상 예외로 보아주지 않으면 다니러 갈 수 없는 데였다.


 기온이 5도 안팎으로 쌀쌀하면서 바람까지 세게 불었다. 을씨년스러워 바깥에서 사람을 만나 이야기 나눌 상황이 못 되었다. 파리에서 가장 큰 지하상가인 레알 어디엔가 앉을 만한 데가 있겠거니 하고 그쪽에서 아는 사람을 만났다. 이날은 블랙 프라이데이 행사 영향인지 지하상가는 코로나 이전처럼 붐볐다. 중앙 통로로 마스크 낀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갔다. 가게로 들어가고 가게에서 나오고 그냥 지나치고… 멈추면 안 된다는 규칙이 있는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쫓기듯이 계속 움직이기만 했다. 우리는 커피를 사들고 가전제품 가게와 영화관이 있는 광장 쪽으로 갔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서서 커피를 마시면서 얼마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게 뭐죠? 세상이 어떻게 될라는지?" 근처에 안전 요원 둘이 보였다. 청년 한 명이 계단에 걸터앉자 안전 요원이 와서 앉으면 안 된다는 손짓을 하자 청년은 아무 말 않고 사라졌다. 서 있는 우리한테는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감시당한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계단 앞에 계속 서 있기도 뭐해서 다시 대형서점 쪽으로 이동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우리 생활에 카페와 레스토랑이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 깨달았다. 다른 모든 가게들이 다 열려 있어도 카페와 레스토랑이 닫히면 사람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다.


          

[1] 5월 30 일 프랑스의 코로나 상황은 총 사망 28771명으로 전날에 비해 57명이 늘었다. 입원 환자는 14389명이고, 중환자가 1325명으로 전날에 비해 36명 줄어든 상태다.

[2] 9월 중순부터 하루 확진자가 만 명을 넘기며 급증하여 이날 확진자 수 13970명, 총 사망 32019명에 하루 병원 사망자가 63명이다. 전체 입원 환자는 6634명이고 중환자는 1259명으로 매일 느는 추세다.

[3] 12월 10일 프랑스의 코로나 상황은 하루 확진자 13750명, 사망 누계 59940명, 하루 병원 사망자 297명, 입원환자 25199명, 중환자 2959명이다. 중환자 수만 감금 해제 조건에 겨우 턱걸이한 경우고, 확진자는 어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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