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세대가 지났다. 어릴 적 친구들로부터 자녀 혼사를 알리는 청첩장 이 심심찮게 날아온다. 웨딩마치 와 함께 딸의 손을 신랑에게 넘겨주는 모습에서 세대교체의 장을 보는 듯하다. 앞만 보고 참으로 열심히 달려왔다. 성과도 있었고 희열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세대 주역의 자리를 넘겨주고 뒤안길로 물러나야 한다. 직장 생활도 젊은 세대에게 주인공의 자리를 물려주고 은퇴 후를 준비해야 한다. 한편으로 서운하고 쓸쓸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제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그들을 응원하며 잊힌 삶의 여유를 찾아야 한다.
냉장고부터 고장이 나더니 세탁기 에어컨이 돌아가면서 애를 먹인다. 십 년 전 이사할 때 구입한 것들인데 비슷한 시기에 고장이 나는 걸 보면 가전제품의 수명은 십 년 정도 되는 것 같다. 수십억을 들인 기계 장비도 삼십 년을 넘으면 고철 값이다. 이 몸뚱어리도 이 정도 썼으면 본전은 뽑은 셈이다. 앞으로가 문제다. 어금니 빠진데 임플란트도 해야 하고 만성 고지혈증 에 혈압 수치도 심상치 않다. 수시로 청구서가 날아올 것이 눈에 선하다. 육체적 기능이 현저히 떨어지고 있다. 눈도 침침하고 집중력도 예전 같지 않다.
양질의 시간이 그렇게 많이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모래시계는 쉬지 않고 흘러내린다. 한때는 한증막 속의 모래시계처럼 더디게 흐르던 시간이 지금은 마치 블랙홀 속으로 빠져들 듯 빠르게 지나간다.
지나온 삶을 돌이켜 보며 중간 결산을 해본다. 행복과 고통의 순간이 주식 차트 마냥 오르내림의 연속이었지만 결과론 적으로 행복에 좀 더 가깝다고 할 수는 있겠다. 하지만 기업 결산 하듯 행복, 불행을 따져 본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행복했던 시간이 긴 삶은 성공한 삶이고 불행했던 시간이 긴 삶은 실패한 삶일까? 아니면 마지막 순간에 행복하면 후회 없는 삶인 것일까? 한 사람의 삶을 평가할 때 행복 여부가 절대적인 잣대가 될 수 있을까?
인간이 추구하는 가장 이상적인 삶이 행복한 삶이라 생각했다. 행복이라는 달콤한 열매를 위하여 배우고 인내하며 경쟁하고 희생했다. 열매는 꽃이 떨어져야 맺힌다. 꽃이 지는 것을 불행이라고 한다. 하지만 불행을 겪지 않고 행복을 얻을 수는 없다. 절대행복이라 생각했던 그 열매의 달콤함은 그리 길지 않았고 씨앗을 잉태하기 위한 유전자의 유혹일 뿐이었다.
지나고 보니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지금까지의 삶은 본능에 충실한 삶이었고 행복의 대부분은 본능 충족의 결과물이었다. 마라톤 완주 뒤 마시는 생수의 즐거움도 몇 시간 줄 서 기다림 뒤 맛보는 이름난 맛집 돈가스의 행복도 생존 본능에 충실한 대가로 얻는 작은 보상일 뿐. 모두가 꿈꾸던 대기업 취업의 기쁨도 승진의 희열도 경쟁 본능의 일환일 뿐이다.
그동안 삶에 충실했다고 자부하지만 결국 유전자의 욕구에 충실한 삶을 살았을 뿐이다.
물론, 별로 대단치도 않은 인간으로 태어나 본능적 욕구를 벗어난 삶을 산다는 것이 가당치도 않은 일임을 잘 안다. 하지만 지금까지 유전자적 책무는 다 하였다. 치열한 경쟁 시대에 자립하여 현재까지 생존을 유지하고 있고, 자식을 낳아 건강한 유전자의 대를 이었다. 유전자적 관점에서 빚은 없다. 이제는 유전자적 욕구에서 탈피하여 온전히 자신의 삶에 집중할 때라는 생각이 든다.
물질을 구성하는 최소단위는 원자이며 원자는 핵과 전자로 이루어져 있다. 전자 중에는 원자핵에 구속되지 않으면서 물질의 내부나 진공 속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는 ‘자유전자’가 있다. 나의 의지 또한 생존과 번식의 유전자적 굴레를 벗어나 남은 시간을 순수 ‘자유의지’에 따라 살아가기를 희망한다.
나에게 ‘자유의지’란 목적과 결과에 메이지 않고, 사회적 관념과 대중의 일반적 선택을 무조건적으로 따르지 않고, 가슴속에서 울려 퍼지는 순수 의지를 따르는 삶이다. 굳이 나와 남의 경계를 둘 필요도 없다. ‘자유전자’가 되어 중력을 벗어나 자유롭게 유영하는 꿈을 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