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억하는 나의 첫번째 집은
이층 단독주택.
파란 지붕에 빨간 벽돌,
우리 가족이 이사갔을 때가 지은 지 십년 되었던 시점.
샷시도 원목 마루도 마당에 잔디도 소나무도
깨끗하고 예쁘고 파릇파릇했던 기억.
뜨거운 여름이면 마룻바닥에서 셔츠를 목까지 말아올리고 등을 깔고 누워 마당에 핀 장미나무를 봤다.
소나무와 대비되어 붉은 빛이 선명하던 장미꽃.
그 다음으로 내가 머물렀던 집은
대학교 기숙사.
친구들은 미팅에 동아리 모임에 엠티에 히히호호 즐거워 보였지만 나는 밤마다 기숙사 방에서 울었다.
남들보다 조금 늦게 자란 걸까,
밤마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파란 지붕 빨간 벽돌의 우리집에 가고 싶었다. 거기서 엄마랑 누워 저녁 드라마를 보고 싶었다.
엄마랑 드라마 보던 시간에 기숙사 방에 홀로 있노라면 그냥 한없이 우울했다.
2인 1실, 옷장과 침대와 책상만 있던 좁은 공간.
룸메이트는 매일 남자친구를 만난다며 밤 늦게나 들어왔고 그 남자친구랑 손 잡아봤냐는 나의 질문에 손만 잡았겠냐고, 질문이 너무 순순하다며 비웃었던 기억.
잤냐고 물어보면 무례할까봐 그런 건데...... 나중에 듣기로 룸메이트의 남자친구는 당시 양다리였고 둘은 울며불며 죽이니 살리니 하다가 헤어졌다고 한다.
기숙사에서 퇴소한 후에는 하숙을 했다. 넓지만 반지하였던, 나의 첫 하숙방. 비가 오면 창 밖 바닥으로 빗줄기가 떨어지는 게 보였고 장판에서 곰팡이 냄새도 스물스물 올라오곤 했던 운치있던 공간.
2층에서 저녁을 먹고 내려와 있으면 똑똑, 누가 와서 노크를 하며 나오라고 하곤 했다. 그리고 하숙생들이 모두 2층 거실에 모여 아엠그라운드 같은 게임을 했었는데 그때 엄청 예뻤던 언니 한 명과 의대생이었던 하숙집 주인 아주머니의 둘째 아들이 서로 장난을 심하게 쳤던 기억이 난다. 그 둘은 아마 결혼하지 않았을까?
그 곳에서는 나중에 2층으로 이사해 화장실 딸린 방을 썼더랬다. 화장실을 혼자 쓴다니 처음엔 좋았는데 나중에는 머리카락 청소도 너무 힘들고 날파리도 많고 방에서도 하루종일 화장실 냄새가 나서 힘들었던 기억.
거길 나와서는 대학 근처 친척 언니네 예비 신혼집에 생활비 10만원을 내고 얹혀살았다.
언니가 반년 먼저 살다가 결혼하면 형부가 들어와서 같이 살 집이었는데 내가 거기 방 한칸 신세를 지게 된 거다. 지금 생각해보면 형부가 엄청 싫어했을 듯한데 언니도 형부도 내게 잘해줬다. 형부랑 언니랑 치킨 시켜먹고 게임도 하고 텔레비전도 보며 즐거웠던 기억.
두 사람의 결혼식을 한달쯤 남겨놓고 그 집에서 나왔고 형부랑 언니는 애 둘 낳고 지금도 잘 산다.
이후 형부랑 언니가 내 짐들을 옮겨줬던 곳은 여성전용 하숙집. 3층 짜리 건물의 2층. 한 층에 방이 세 개씩 있었는데 옆 방 언니가 내게 잘해줬었다. 바퀴벌레가 나오면 달려와서 잡아주고, 내가 아플 땐 바나나 우유랑 캔 죽도 사와서 방문 고리에 걸어두고, 줄넘기도 같이 하고, 주말엔 같이 공부도 하고...
내 곁에 머물렀던 그 좋은 사람들은 지금 다들 어디에서 뭘 하고 있을까?
거길 나와 또 다른 하숙집으로 옮겼는데 거기도 여성전용이었다. 왜 옮겼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아마 거기가 학교랑 더 가까웠던 것 같다. 대학 졸업반이라 임용고사 공부에 매진해야 한다는 이유였던 듯.
그 하숙집은 밥이 맛있었고 걸어서 3분 거리에 분식집이 있었는데 떡볶이가 기가 막혔다. 하숙집에서 밥이 나오지 않는 주말 점심이면 거길 가서 떡볶이랑 김밥을 시켜 혼자 먹었던 기억.
처음엔 2층에서 룸메이트 언니랑 함께 지냈고 나중엔 4층 혼자 쓰는 방으로 옮겼는데 4층 방은 정말 손바닥 만했다. 당시 남자친구가 군대에 갔기 때문에 4층 그 방에선 꾸역꾸역 학교 왔다갔다하고 겨우 발 뻗고 자고 울고 자고 울다가 편지쓰고 또 울고 간식 싸서 보내고 뭐 그랬던 기억들.
그렇게 대학을 졸업하고 빨간 벽돌 파란 지붕 엄마아빠의 집으로 돌아가 직장을 구했다가... 그만두고,
다시 서울에 와서 월 100만원도 못 받는 직장 같지 않은 직장에 다니면서 또 하숙을 했다.
거기에선 같은 층에 살던 남자가 있었는데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느 밤, 롤케이크를 같이 먹자고 계속 방문을 두드렸던 기억이 난다.
배불러서 안 먹는다고 했더니 잠깐만 열어보라고 이거 정말 맛있디고 한참 실랑이 했던 기억. 미친놈.
이후 직장 같지 않던 첫 직장을 그만두고 임용고사 재수를 시작하면서 신림동 원룸으로 들어갔다.
보증금 500에 월세 45.
첫 직장에서 모은 돈으로 보증금을 넣고 과외를 해서 월세를 충당하려니 생활이 빠듯했다.
아침이면 버스를 타고 노량진으로 가서 강의를 듣고 점심을 대충 떼우고 과외를 하고 저녁에 집으로 와서 새벽까지 공부를 하고, 또 다음 날 아침이면 버스를 타고 노량진으로 향하던 쳇바퀴 같던 생활.
돌이켜보니 정말 재미없게 살았다. 예쁘고 힘 넘치던 이십대를 그렇게 보냈다. 대학생활도 자취생활도 다 즐기기 나름이라지만 나처럼 소심하고 대인기피증이 심한 사람은 그 시간이 정말 암흑같았다. 밤마다 코딱지만한 방에서 언제쯤 이 생활을 벗어날 수 있을까, 답 없는 질문을 던지며 괴로워했다.
가끔 사촌동생이나 친구들이 놀러와서 자면 방에 무슨 벌레가 있는 것 같다며 밤새 재채기하고 몸을 벅벅 긁어대던 기억. 청소도 하지 않고 집을 정돈할 의욕도 없고 그땐 정말 게으르고 멍한 상태였다.
그래도 그 곳에서 임용고사에 낙방하고 포기하고 나름 직장다운 직장을 구하고 탈출.
다음에는 친구랑 보증금을 합쳐 투룸으로 들어갔는데, 반년 만에 대판 싸워 절교하고 엄마한테 돈을 빌려 보증금을 돌려주고 친구를 내쫓았다.
그리고 그 투룸은 내 자취생활의 마지막 공간이 됐다. 자취생활 통틀어 가장 넓었던 공간. 엄마가 없는 돈에 에어컨도 설치하고, 아빠가 땀 뻘뻘 흘리며 선풍기도 사와서 꽂아줬던 기억이 난다. 그 때 선풍기를 들고 2층까지 올라오던 아빠를 보며 아빠 언제 저렇게 늙었나 했는데 지금 보니 그때 아빠는 젊은 거였네. 지금 아빠는 칠순 노인이 되어 틀니도 끼고 피부도 얼룩덜룩 검버섯에 자글자글 주름이 가득 찼다.
어쨌든 그 집에 살다가 결혼해서 이후로는 지금껏 아파트 생활이다. 자취시절, 아파트 앞으로 지나다니면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참 부러웠다. 아파트엔 보통 가정을 이룬 사람들이 사니까. 혼자 사는 사람들이 잘 없으니까.
결혼 꼭 해야 되냐며 안하면 어떠냐고 떵떵거리고 다녔지만 내심 나는 결혼이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자취생활 내내 많이 외롭고 사람이 그리웠다.
나는 지금의 내 집이 좋다. 이제는 빨간 벽돌 파란 지붕 친정에 가도 내 집만큼 편하지 않고 아직도 그 집에 사는 아빠랑 엄마가 불쌍해서 마음만 아프다.
비록 이 아파트가 자가 아니고 전세지만 오늘처럼 비를 피할 수 있고, 더 이상 외롭지 않고, 맛있는 음식을 사와서 가족과 함께 먹을 수 있으니 충분하다.
내 집을 사서 리모델링 공사 해보고 싶은 욕심을 내려놓는다. 인스타그램에 뜨는 하얀 인테리어의 집들, 물때없는 주방, 보송보송한 침구가 호텔같은 집들에 대한 부러운 마음도 접어둔다.
수많은 공간들에 머물러왔고, 힘들고 외로웠고, 지금도 주변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많지만 점점 나아지고 있다고 나를 다독인다.
나의 삶은 남들보다 느리지만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