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림
생일을 기점으로 정말 마흔에 들어섰는데
말 그대로 불혹이 된 거 같다.
불혹: 세상 일에 정신을 빼앗겨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는 나이
지금의 판단들이 흐린 판단인지 또렷한 판단인지는 당장 알 수 없지만,
일단 내 정신을 빼앗은 세상 일이 없는 건 확실하다.
뭘 해도 예전만큼 재미가 없다.
영화를 좋아해서 늘 소식을 찾아보고
기다렸던 영화가 개봉하면 영화관에 가는 게 낙이었는데
예전만큼 그런 마음이 들지 않는다.
미션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딩을 그렇게 기다렸건만
막상 개봉하고 며칠이 지났는데도 영화관에 가질 않고 있다. 나중에 ott 풀리면 집에서나 볼까 싶다.
드라마는 더 그렇다.
좋아하는 드라마는 보고 또 보고,
장면들을 분석하면서 보고,
마음에 드는 대사들을 수첩에 적어놓기도 했었는데.....
요즈음은 재밌다고 소문난 드라마도 2회를 못 넘기겠다.
다 그렇고 그런 이야기들.
관심을 끄는 사람도 없고
그럴 여유도 사실 없고
그저 가족들이랑 맛있는 거 먹고
좋은 풍경 찾아다니는 게 즐거운데
그조차 새롭게 맛있는 것도
새롭게 좋은 풍경도 이제는 바닥이 드러나는 느낌.
책도 다 그저 그렇고
커피도 특별할 게 없고
옷이나 화장품도 특별히 예쁜 게 없으니
쇼핑도 시들하다.
머리 또한 단발부터 긴 머리까지 예전에 다 해봤으니
스타일 바꾸는 재미가 없어진 지 오래다.
역시 돈이 없어서 그런 걸까?
먹고 살 만큼은 벌지만 여가를 즐길 만큼 벌지는 못한다.
부자 동네에 전세로 사는 중인데
해외여행, 해외 한달살기, 명품가방 그리고 필라테스 회원권이나 1:1 요가 등 부러운 생활들이 참 많이 보인다.
불혹이지만 저런 것들에는 아직 혹 한다.
그러나 혹 해봤자 답이 없으니 외면하고 산다.
하루종일 개미처럼 일하고
가족들과 맛있는 저녁을 차려먹고 치우고
요가를 하고 드라마나 유튜브를 보다가 잠이 드는 하루.
마음에 걸리는 것 없이
밤이 오고 보송보송한 이불 속에 누워 ott를 볼 때면
어떤 날은 이 정도면 충분히 행복하다는 느낌이 든다.
또 어떤 날은 쳇바퀴 같은 일상이 지긋지긋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오늘은 후자다.
아침에 눈을 뜨면 또 출근을 해야 하고
퇴근하면 집으로 출근해 살림을 해야 하는 하루하루.
지긋지긋하지만 또 행복한 일상,
누군가는 부러워할수도 누군가는 불쌍해할수도......
과거의 나는 분명 이런 일상을 꿈 꿨다.
주말마다 소개팅을 하고 성사되지 못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건 기적이라 믿으며 결혼하는 모든 커플들을 부러워하던 시절.
안정적이지 못한 직장에서
얼마 되지 않는 월급으로 월세를 내고
부모님 용돈을 드리고 내 생활을 겨우 꾸리던 그 시절의 나는 분명 오늘 같은 일상을 동경했다.
하지만 오늘의 나는 오늘의 나를 연민하며
또 답답한 마음에 빠져있네.
경제적 자유를 얻으면 더 행복할까?
글쎄,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역시 그냥 마음의 문제일까?
일단 샤워를 하고 따끈한 수프와 핫도그를 먹어볼까......
평범한 하루하루들,
분명히 축복인데 욕심으로 마음이 지옥을 걷는다.
욕심은 정말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일까?
참 다스리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