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근한 고백 1

by 윤성

우리 손을 잡고 슬리퍼를 질질 끌며 편의점으로 가요. 오늘 아무 것도 먹지 못했는데 벌써 늦은 저녁이 되었네요. 얼른 가요. 좋아하는 사발면 하나씩 집고, 바나나 우유랑 사이다도 하나씩 집고, 달달한 과자도 짭짤한 과자도 골고루 집어 계산하자구요. 그렇게 행복이 잔뜩 든 비닐봉지를 달랑달랑 흔들며 집으로 돌아옵시다.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면서요. 퇴근길 났던 접촉사고에 대한 하소연도 하고, 괴물 같은 인간들 흉도 좀 보고, 새로 나온 게임 이야기도, 친구들 이야기도, 오늘 점심에 다녀 왔다는 삼겹살 식당에 주말에 같이 가자는 약속도 하고 말이에요. 사실 요즈음 많이 힘들었어요. 그런 기분 알아요? 주먹으로 아무리 쾅쾅 두들겨도 벽이 뚫리지 않는, 아무리 쳐도 뚫리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주먹이 깨지도록 치는 거 밖에는 할 수 없는 그런 기분 말이에요. 나보다 늦게 벽을 치기 시작한 어떤 이는 벽을 뚫고 환호하며 나아가고, 나보다 먼저 벽을 치기 시작한 어떤 이는 포기하고 주저 앉는 걸 보며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팔꿈치로 선명한 피가 흘러내리는 걸 보면서도 계속 어정쩡 벽을 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오늘 우리 손을 잡고 슬리퍼를 질질 끌며 편의점에 다녀오며 참 행복해요. 선선한 온도, 사알랑 부는 바람, 보드라운 손의 촉감과 비닐봉지 가득 담은 우리의 취향까지. 정말 천국 같지 않아요? 며칠 전 당신과 싸우고 사흘 넘게 말을 하지 않던 중에 나 회식이 있었잖아요. 그날 투뿔 한우 꽃등심을 먹었거든요? 근데 정말 고기 맛은 1도 모르겠고, 머리만 지끈거리고, 자꾸 폰만 쳐다보게 되고 지옥 같았단 말이죠?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요. 당신은 나의 시간을 천국으로도 지옥으로도 만들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거에요. 나도 당신에게 그런 사람이고 싶다는 거고요. 그럼 있잖아요, 우리에게 어떤 돌멩이가 날아들어도 버틸 수 있게 돼요. 왜냐고요? 서로에게 서로가 아닌 다른 누구도, 그 어떤 괴물 같은 인간들도 우리의 시간을 천국으로도 지옥으로도 만들 수 없거든요. 무적이 되는 거에요! 예전에 나의 할머니가 파출부 일을 하고, 건물 청소 일을 하고, 식당 주방 일을 하고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와서도 풍이 왔던 할아버지가 어제보다 한걸음 더 내디디면 소녀처럼 꺄르르 웃으며 박수를 치곤 했거든요? 그 마음을 나도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아요. 나는 할머니가 지옥만 살다가 간 것 같아서 늘 마음이 저렸는데 할머니에게도 천국 같던 순간이 분명 있었을 거라는 확신이 들어요. 할머니랑 할아버지도 서로 사랑했으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천국이 되어줬을테니까. 오늘 당신과 손을 잡고 슬리퍼를 질질 끌며 편의점에 다녀오며 그걸 깨달아요. 그래서 또 행복해요. 당신은 이토록 나의 마음 속 오랜 생채기도 낫게 하네요. 그냥 그렇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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