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초록

by 윤성


숨조차 뜻대로 쉬어지지 않는 어느 오후 나는

깊은 숲을 향한다


아무도 밟지 않은 축축한 흙 위에 누워

이름 모를 나무를

올려다본다

송장처럼 누워서


아주 오래도록 바라본다

잎들을 찬찬히

살펴본다

같은 초록은 한 쌍도 없어 마치 색이 지문같다


눈이 부시게 반짝이는 잎들이 제일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다

볕을 반사해

어느 초록은 가장 밝았다가 금세

빛을 잃기도

어느 초록은 꽤 오래 반짝거리기도


어느 초록은 마치 스스로 빛을 발하듯

백색에 가깝게 반짝이기도

또 어느 초록은 은은히 바람에 살랑이며 반짝이다가

토옥, 떨어져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기도


그렇게 해가 자리를 옮길 때까지 이어지는 볕과 바람과

잎의 앙상블

동전 하나 내지 않고 드러누워 누리는 사치


숨 하나

숨 둘

숨 셋


마침내 숨이 조금씩 제 자리를 찾으면

비로소

볕도 누구의 시선도 머문 적 없을 검은 초록의 잎들이 눈에 들어온다


어릴 적 미술 시간

검정 물감을 쓰고 붓을 제대로 헹구지 않은 채

초록을 묻혔을 때 나왔던 그런

검정에 초록이 살짝 스쳤나 말았나 긴가민가 싶을 정도의 그런


탁하고 묵직한 초록

흑에 가까운


무수한 검은 초록의 잎들이 실은 나무의 거의 전부를 이루고 있다

앙상블의 반주를 맡아 살랑이고 있다


처음 눈에 들어왔던 반짝이는 잎들이

돋보일 수 있도록


그러려고 그러는 건 아닐 거야 누가

탁하고 묵직하고 싶겠어

누구나 반짝이고 싶지 그건 본능이니까


어쩌면 아직 스스로 검은 초록이란 것을 모를지도

언젠가 볕을 반사해

반짝일 수 있으리라 믿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내가 깔고 누운 축축한 흙이 대부분 그런 검은 초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내내 볕을 기다리다가

토옥,

떨어져

흙이 되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내가 아는 또 한 가지

같은 마음으로

어느 검은 초록 또한 나를 보고 있을 거란 사실


그의 시선 또한 세상 온갖 반짝이는 것들에 내내 머물다가

해가 여러 번 자리를 바꾸고서야 비로소

검은 나에게

찰나처럼 멈췄을 거라는 자명한 사실을

알고 있지


언젠가 볕을 반사해 반짝일 수 있으리라 믿는 나에게

아직 스스로

검은 초록이란 것을 모르는 나에게

찰나처럼 검은 초록의 시선이 머문다 찰나처럼

볕도 아닌 그의 시선이

찰나처럼

찰나처럼


숨 하나

숨 둘

숨 셋


다시 숨이 가빠온다

다시


숨조차 뜻대로 쉬어지지 않는 늦은 오후 나는

토옥, 떨어져

흙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다시


해는 자리를 옮긴다

어김없이


날이 저무는 건 오히려 반갑다

밤이 오면 모두가 볕을 받지 않을 테니까 모두가

그저 검은 초록일 테니까

모두가

축축한 흙 내음에

살랑이는 바람에

언젠가 볕을 받아 반짝일 거라는 희망에 들뜰 테니까

밤이 오면 차라리 모두가 감쪽같이

검은 초록일테니


숨 하나

숨 둘

숨 셋


밤은 그리 길지 않아

붙잡아두고 싶은 해는 어김없이 자리를 옮기고 다시

어제처럼


볕은

나무를 비추고야 만다

또 다시 누구는 백색에 가깝게

누구는 은은하게

누구는 길게 누구는 짧게 그토록 다채롭게

어김없이

반짝거리기 시작한다


여전히

나무를 이루는 대부분의 잎들은 볕을 구경조차 못하고

검은 초록으로 반주하고 있다


반짝이는 잎들이

돋보일 수 있도록


숨 하나

숨 둘

숨 셋


거대한 검은 초록의 물결

그래


거대해

거대하잖아


그러니

되려 외로운 건 반짝이는 쪽의 몫일지도

당연히 그럴지도


가까스로 제 자리를 찾는 숨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리 비겁하게

아니 애처롭게

쉬며


마침내 나는 검은 몸을

일으킨다

머지 않나 또 숨조차 뜻대로 쉬어지지 않는 오후가 오더라도 다시

다채롭게 빛나는 세상으로 가야지

가 봐야지 다시

가서

살아야지


살아내야지


언젠가

축축한 흙이 될지라도

영원히 볕을 받지 못할지라도


여전히 볕과 바람과 잎의 앙상블을 반주하는

거대한

검은 초록들처럼


다채롭게 빛나는 세상으로 가야지

가 봐야지 다시

가서

살아야지


살아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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