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일곱이 되는 꿈

by 윤성

꿈에서 또 스물 일곱이 되었다. 스물 일곱의 나는 치열했고 불안했고 지금보다 더 사교적이었으며 지금보다 덜 행복했다. 회사에서는 늘 상사의 눈치를 봐야 했다. 비서라는 직업적 특성상 예쁘고 단정해야 했기에 높은 구두와 불편한 옷에 몸을 맞추었고 목소리도 표정도 내가 아닌 듯 꾸미고 하루의 대부분을 보냈다. 혼자 살았으니 퇴근을 서두를 필요가 없었고 직장에서 만나는

사람들, 직장에서 처리하는 업무가 일상의 큰 부분을 차지했다.


관계에 있어서는 항상 열려있었다. 내향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이려 굉장한 노력을 했다. 모든 남자는 남편이 될 가능성을 가지고 대했던 거 같다. 직장 사람들, 친구의 친구들, 친구 남자친구의 선배 등. 그들이 내 속마음을 읽는다면 소름 돋을법한 상상을 하며 모든 남자들을 대했다. 물론 성사된 건 한명 뿐, 나머지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스쳐 갔지만.


친구들과도 일주일에 두어번은 약속이 있었다. 클럽을 가거나 파티에 가거나 하지는 않아도 점심 약속을 잡고 친구가 회사 근처로 와서 함께 밥을 먹거나 저녁 약속을 잡고 강남, 성수동 등 사람 많은 지역의 유명한 식당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주말에는 대학 친구들과 등산도 자주 했다. 저질 체력으로 정말 노력을 한 거다. 밥을 먹으면서도 늘 주변을 살폈다. 누가 나를 쳐다보면 나도 그를 쳐다봤고 혹여 그 눈빛이 긴 인연의 시작이 아닐까 착각도 여러번 했다. 참 피곤하고 뭐 하나 정해진 게 없어 불안했던 시절.


누가 이십대로 돌아갈래 물어본다면 나의 대답은 절대적 노다. 마흔하고도 몇번 더 겨울을 맞이하는 지금의 나는 과거에서 바꾸고 싶은 선택이 없다. 열심히 공부했지만 계속 떨어진 시험을 다시 돌아가 공부하고 싶은 마음도, 군대까지 기다리고 헤어진 남자를 다시 돌아가 붙잡을 마음도, 퇴근하고 여의도까지 달려가 자정까지 학원에 다니며 배웠지만 공모전 한번 당선되지 못했던 글을 더 붙잡을 생각도 없다. 지금이 좋다. 다 다른 이유로 친구들과 인연을 끝내고 더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려 노력하지 않는다. 누가 나를 보든말든 중요하지 않고 세상 모든 남자들이 그저 인간으로 보이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래서 남자와도 편하게 대화할 수 있게 된 지 오래다. 다시 구한 직장은 외모가 중요하지 않아 배가 조이지 않는 바지나 치마를 입을 수 있다. 신발도 구두가 아닌 마트에서 산 7,000원 짜리 슬리퍼를 신고 365일을 지낸다. 몸이 편하니 피부도 맑아졌고 주름은 늘었지만 인상은 예전보다 훨씬 부드러운 느낌.


사람들을 대하는 것도 예전보다 수월하기에 마음이 덜 괴롭다. 자연스레 잠도 잘 자고 보다 건강한 식사를 한다. 늘 상처 받고 맵고 단 음식을 찾고 밤이면 잠에 들지 못하던 그 시절의 마음이 모두 자양분이 되었다. 그러니 나의 이십대는 내게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끝없이 불안하고 힘들었던 그 때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은 거다.


늙은 불안은 끝이 있다. 어느 정도 불안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치가 늙으면서 자연스레 획득되었디. 일상 속 자잘한 자극들에 맷집이 생겨 쉽게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 누가 내게 돌멩이를 던져도 더 이상 같이 돌멩이를 들고 싸우지 않으려 한다. 휙 피하거나 맞아도 툭툭 털어내고 다시 가던 길을 계속 가는 뻔뻔함이 생겼다.


그래서 나는 지금이 좋다. 그러니 스물일곱으로 돌아간 꿈의 근본이 그리운 마음은 아닐 거라 확신한다. 어제 조금 힘들었던 마음을 그때랑 비교해보라고, 그때에 비하면 지금 얼마나 안정되고 소중한 일상을 이어가고 있는 건지 깨달으라고 보낸 더 늙은 미래의 내가 보낸 계시는 아닐까.


잠에서 깨 정신을 차리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조금 있으면 가족들을 깨우고 챙기고 나도 출근을 해야 한다. 기분이 좋다. 부디 이 소중한 일상이 스물일곱의 힘든 내가 꾸는 꿈이 아니기를.

keyword
이전 14화불안을 똘똘 뭉쳐 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