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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삼켜버린 수천명의 꿈, 타이타닉 이야기

Will and Mary Pope Osborne-Titanic

by Applepie

이 글을 클릭한 당신은 혹시 Thomas Andrews, Edward J. Smith 라는 이름을 들어보셨는지? 아니면 RMS Carpathia나 SS californian 라는 이름은? Nearer my God to the thee는 어떤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분명 생소할 것이 분명한 이 이름들은 백년도 더 전인 1912년에 침몰한 타이타닉호에 관련된 것들이다. Thomas Andrews는 타이타닉호를 설계한 사람의 이름이고, Edward J. Smith는 그 배의 선장, RMS Carpathia는 타이타닉을 구조하러 온 여객선의 이름, SS californian은 침몰하는 타이타닉에서 불과 15마일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으나 배의 라디오를 꺼놓는 바람에 구조하러 오지 못했고 그 때문에 안타까움의 상징이 되어버린 화물선, Nearer my God to the thee는 배가 침몰할때까지 갑판에서 악단이 연주한 찬송가이다. 이걸 누가 알고 있어? 싶겠지만 줄줄 외는 어린이가 우리집에 산다. 그리고 물론 이 글을 쓰는 나도 그렇다. 이런 사람들을 덕후라고 한다. 그러니 나와 아들은 타이타닉 덕후라고 할 수 있겠다. 내 주위에선 이런 사람을 본 적이 없지만 인터넷 세계에는 이런 사람이 적지 않아 동질감을 느낀다. 그리고 아이를 키우면서 조금 덕후끼가 있는 아이가 키우기에 더 재밌는 것 같다는 생각 또한 든다.


작년 이맘때쯤, 7살 아이와 도서관에 갔다 새로운 문이 열렸다. 시작은 아이에게 챕터북을 읽히고 싶다는 나의 욕심에서 비롯되었으나 성과는 챕터북 읽기 그 이상이 되었다. 이 작은 책으로 인해 아이와 나는 한 주제에 대해 깊이 탐구하는 기회를 얻었으니. 고마운 마중물이 되어준 그 책은 매직트리하우스 시리즈로 유명한 Mary Pope Osborne 부부가 쓴 Titanic이다.

초등학생들이 즐겨 보는 매직트리하우스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판타지 동화이다. 그 동화자체로도 충분히 오랜 시간,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아온 이 시리즈는 유익하게도 각각의 책에 대응되는 'Magic tree house Fact tracker' 라는 이름의 논픽션 시리즈까지 있다. 이 책 역시 'Tonight on the Titanic'이라는 짝꿍 책이 있고 그 동화의 실제 사건인 타이타닉에 대해 아이들의 수준에서 보기엔 꽤 깊이 있게 설명하고 있다. 웬만한 것에는 잘 감동하지 않는, 마흔 언저리인 나까지 매료시킨 것이 그 방증 아니겠는가. 아무튼 이 책을 시작으로 아이와 나는 타이타닉에 대한 원서 몇 권을 더 구입해 읽으며 빠져들었고 때로는 챗 GPT에게 물어보며 지식에 깊이를 더하기도 했다. 생성형 AI가 얼마나 전기를 많이 잡아먹는 줄 아냐며 환경을 생각해야 한다던 남편이 옆에 있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다양한 소스를 통해 궁금증을 채웠다.


타이타닉에 대한 이야기는 영화나 뮤지컬로도 나와 다들 대충 아실 것이다. 1912년에 영국에서 출항하여 미국 뉴욕에 도착할 예정이었던 엄청나게 크고 호화스러운 배 타이타닉이 출항 5일째 되는 날 대서양에서 빙하에 부딪혀 침몰하고 만다. 턱없이 부족했던 구명보트에는 승객의 절반도 태울 수 없었고 그리하여 2000명이 넘는 탑승자 중 약 700명만이 구조되고 1500명이 넘는 희생자를 낳은 역사상 최악의 해운 사고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서너줄의 요약 너머에는 아이와 학습적인 대화를 나눌 거리가 무궁무진하게 많았다.


먼저 우리는 이 책을 원서로 접했기에 영어 학습에 큰 효과가 있었다는 것을 가장 먼저 꼽겠다. 미국 4,5학년에게 권장되는 타이타닉에 관한 픽션과 논픽션물들을 당시 일곱살 아이가 좋다고 몰입해서 읽었다. 물론 아이 수준보다 높은 책이라 첫 몇장은 내가 번역해줘가며 읽었는데, 내용이 재밌으면 어떻게든 읽으려고 하는 것이 인간이더라. 머지 않아 아이는 혼자 술술 읽어내려갔다.


그 뿐인가. 영국에서 미국을 가려면 대서양을 지나야 한다는 것, 4월의 대서양에는 빙하가 정말 많아 위험하다는 것, 그러므로 항로를 더 일찍 남쪽으로 바꿨더라면 안전했을 거라는 내용으로 아이는 세계 기후와 지리에 대한 지식도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다. 또한 새로 접하게 된 노트, 마일같은 생소한 단위는 분명 나중에 배경지식으로 쏠쏠히 쓸 데가 있을 것이며 영국에서 출발하여 프랑스와 아일랜드를 거쳤는데 아일랜드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가려던 3등석 승객들이 많이 탔다는 것 또한 세계사 공부와 연관지을 수 있을 것이다. 16개의 방수 칸막이 중 4개까지 침수됐더라면 타이타닉이 계속 떠 있었을 거라는 것, 타이타닉의 굴뚝 4개 가운데 1개는 실제 증기가 나오지 않은 순전히 장식용이었다는 것과, 그 무거운 하나의 굴뚝이 없었다면 침몰이 더 천천히 이루어졌을지 모른다는 추측은 과학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이렇게 하나를 깊게 파다보면 광범위한 분야의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아이와 덕후가 되어보며 실감했다.


단편적인 지식을 얻는 것 뿐만 아니라, 논쟁적인 주제에 대해 함께 대화하며 아이의 생각이 깊이 뿌리를 뻗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아이는 이런 질문들을 했다.


구명보트에 여자와 어린이 먼저 태우는 것은 차별 아니에요? 그럼 성인 남자는 어떻게 살아요?


캘리포니안 배는 잘 때 라디오를 꺼놓은 게 잘못이에요. 라디오만 켜놨더라면 일찍 구하러 갈 수 있었을 텐데.


근데 1,2,3등실이 따로 있고 서로 만날 일도 없었다는게 불공평해요. 왜 배에는 넓은 객실과 좁은 객실이 있었을까요?


결코 답하기 쉽지 않은 아이의 이런 질문들에 나는,


재난 상황에서 혼자의 힘으로 탈출하기 힘든 약자는 누구일까? 만약 약자 우선의 법칙 없이 모두 달리기 실력이나 힘 같은걸로 붙는다면 어린이와 여자는 과연 생존할 수 있을까?
근데 엄마는 그 배도 참 운이 없었다고 생각해. 사고가 일어나고 라디오를 꺼놨다는 비난을 엄청나게 받았대. 물론 켜놨더라면 생존자가 훨씬 늘어났겠지만 당시엔 라디오를 24시간 켜놔야 한다는 법이 없었으니까. 법을 어긴 것도 아닌데 너무 많은 비난을 받은 그 배의 선장과 선원들도 좀 딱하지 않나 싶어.
많은 돈을 벌어야 하는 선박 회사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객실을 다 일반실로 만들면 충분히 돈을 벌 수 없지 않았을까? 비행기에도 일등석과 비즈니스석, 이코노미석이 있잖아.

이런 완벽하지 않은 대답을 하며 아이와 대화를 이어나갔다.


이밖에 나는 나대로 아이에게 말하기 아직은 이른 생각들에 한동안 잠겨 있었다.


구명보트에 아이와 여자 먼저 태우는 규칙이 별 소란 없이 지켜졌고 심지어 아내와 아이들의 애원에도 신사로 남고 싶다며 탑승을 거부한 남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죽음 앞에서 이런 생각은 어떻게 나오는 걸까? 그 시절 영국의 당연한 도덕이었나?(실제로 챗 gpt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통계를 보면 1등석 승객의 생존 확률이 가장 높았고 3등석 승객의 75%는 살아남지 못했다. 정말 구명보트에도 자본이나 신분제의 논리가 적용되었던 것인가? 아님 단지 1등석이 갑판에 가까웠던 위치적 이점에 불과한가?
타이타닉을 발견한 발라드 박사의 말대로 타이타닉에서 나온 물품들을 바다에 그대로 두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인양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고 기억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까?


이런 생각들이다. 이런 주제에 대해 아직은 아이와 토론하기 어렵겠지만 나중에 시간이 더 흘러 아이의 머리가 굵어지면 그땐 함께 나눠봄직한 얘깃거리가 되지 않을까 한다.


처음 글을 쓸 때만 해도 나는 우리 모자가 이 책을 만난 것이 참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 또한 맞지만, 글을 쓰다보니 이 책이 왜 우리에게 성공적이었는지를 새로이 깨닫는다. 그것은 나와 아들이 '함께' 읽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옆에서 감탄을 연발하는 엄마가 있었기에 아이는 제 수준보다 어려운 책에 관심을 지속적으로 기울일 수 있었을테고 또 내 감탄을 받아주며 때로 질문도 하는 아이가 있었기에 나는 신명나게 책을 읽고 설명해줄 수 있었을 거다. 결국 우리가 함께 읽었기에 이 책은 그토록 재미있었던 것이 아닐까.

당연하게도 나는 평소에 아이가 읽는 책을 모두 같이 읽지는 않는다. 하지만 가끔 이렇게 같은 책을 함께 읽을 때, 아이와의 유대가 더욱 깊어지는 느낌이다. 서로의 생각과 감정을 진하게 소통하는 시간을 선물받는것 같다고나 할까. 아이는 점점 자라면서 바빠지고 나와 보낼 시간이 줄어들겠지만 함께 같은 책을 읽는 즐거움은 쭉 지속하고 싶다. 아이가 변성기가 오고 여드름 난 소년이 되고 나는 흰머리와 주름이 지금보다 더 많아진 모습이 되어도 같은 책을 함께 읽을 우리를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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