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한 살에 무직자, 공시생이 되었다. 핸드폰 번호도 바꾸고 주변 신변을 정리했다. 공부는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손을 뗀지라 10년 만의 공부였다. 일단 학원을 다니며 공부 습관을 들였다. 어느 정도 내용 숙지가 되고 나서는 실강과 인강을 병행했다. 매일 꾸준히 공부하려 노력했다. 토요일 오후, 일요일 오전 시간에만 쉬었다.
수험생활 만 1년이 되어가던 시점에 슬럼프가 찾아왔다. 뒤늦게 시작한 공부인 데다, 단기합격이야말로 경제적인 거라는 생각으로 아낌없이 투자했기 때문에 통장 잔고가 급속히 줄었다. 모의고사 점수도 정체되기 시작했다.
이러다 완전 인생 루저가 되는 건 아닐까 불안했다. 스트레스로 불면에 시달렸다. 작은 시련에도 몸이 반응하는 예민한 내가 싫었다. 살찌고 두꺼운 안경을 낀 츄리닝 차림의 나. 수험생들 다 비슷한 차림이었지만, 그래도 20대 수험생은 그 자체로도 생기 있고 예뻤다.
지난 시절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입사 동기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궁금했다. 친했던 동기 A가 공무원 별정직 6급으로 일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9급 수험에 매달리고 있는 나와 그를 비교하니 더욱 초라했다.
그렇게 나는 나 스스로를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으로 만들어 갔다.
동기 A를 떠올리며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동기 A를 떠올리면 그렇다. 그 친구는 정치권에 들어가고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원리원칙주의자로 대쪽 같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권력에만 매몰된 것 같았다. 안 좋은 일로 언론에 오르내리다가 지금은 어떻게 사는지 모르겠다.
수험시절에는 A 소식에 ‘내가 일을 더 잘했는데, 왜 나는 더 낮은 직급을 가려고 이러고 있지’라며 자기 비하에 빠지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A는 ‘정치력’이라는 강점이 있었고, 나는 ‘정치력’이 턱없이 부족했고, 지금도 부족하다.
세상에는 다양한 자리와 그 자리에 필요한 역량이 있는데, A는 자기 역량에 맞는 자리를 잘 찾아간 것뿐이라는 생각을 지금에서야 해본다.
이렇게 언급하고 있는 것도 어찌 보면 미안한데, 강직하면서, 사교성이 뛰어나고 회복탄력성이 좋은 친구라 잘살고 있으리라 믿으며, 아마 잘 살고 있을 거다.
어쨌든, 다시 직장인
목표했던 지방교육행정직에 합격하였고 다행히 감사하게도 1년 6개월의 수험생활을 마무리하였다.
합격할 줄 알았다면 조금은 덜 불안했을까?
그때는 스스로 불안을 키우고, 비교하며, 내가 나를 괴롭혔다. 지금은 그 시절을 생각하면 피식피식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요즘은 공무원 경쟁률이 떨어지고, MZ세대 퇴사율이 높아졌다고 호들갑이지만, ‘라떼’만 해도 치솟는 공무원 경쟁률이 되려 이슈였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탓에 시험에 합격했다는 성취감도 컸고, 공무원 인기가 오를수록 나의 사회적 지위도 오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하였다.
"시험과 같이 판단 기준이 외부에 있는 발전은 목표 달성의 즐거움이 일시적이다. 그래서 목표를 달성해도 그것이 의욕적인 삶의 방식으로는 발전하지 못한다."
『문제는 무기력이다』
하지만 줄행랑치듯 결정한 직업이어서 그랬을까. 합격이 가져다준 성취감, 공무원 사회적 인기와 나를 일치시킴으로써 얻은 만족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신규임용자 교육을 받았고, 교육청과 소속기관에서 임시로 일손을 돕다가 시골 학교 행정실로 첫 발령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