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가, 정의, 가치, 판단. 기성세대 학계의 동향과 맞는 접근이다. 객관성을 찾고, 증명하고, 최종 판단을 내린다. 더 옳고 더 객관적인 어떠한 진실의 존재를 가정한다.
인터넷 문화가 생기고 댓글문화가 자리 잡으면서 흥미로운 현상을 보고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댓글에서는 해당 영상이나 이미지, 글에 비친 인간의 단면에 대해 최종 가치 판단과 함께 일종의 판결을 내리고자 한다. 서로 맞지 않는 판결을 들고 나올 땐 열정적으로 싸우기도 한다. 내가 더 옳다는 점을 설득하기 위해 증명은 계속된다. 마치 누군가 그렇게 하라고 정해주기라도 한 듯.
영화학 학부생들도 역시 비슷한 체계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듯했다. 글쓰기 과제 중간 점검에서 본 것은 어떠한 압박감, 부담감. 고작 열 장 짜리 자료조사 과제인데도, 영화사 전체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내려야 할 것 같다는 부담으로 학생들은 두꺼운 책 한 권 분량이 될 글쓰기 프로포절을 제출하면서 충분치 않다는 느낌으로 찝찝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되새겨 보았다. 대체 우리는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일까. 글쓰기를 통해, 비평을 통해 닿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학문이란 무엇이고 학자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지난 6년 박사과정 동안 고민하고 내가 찾은 답이 있었다. 그걸 학생들에게 전해주기로 했다.
내가 정의하는 비평은, 시간을 들이는 것이다. 즉각적 판단을 보류하고, 대상과 조금 더 시간을 보낸다. 대상을 여러 각도에서 살펴본다. 그러기 위해선 정보가 필요하다. 만든 이, 시대 상황, 플랫폼, 정치경제적 이해관계 등. 정보를 통해 원인을 유추할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작가가 ~이랬으니 ~이랬을 거야.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 (물론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생각해 볼 수는 있다). 대상은 이미 작가의 손을 떠났다. 중요한 건 지금 그들의 손을 거쳐 탄생한 이 대상이 나와 만났을 때 내게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이다. 따라서 대상을 만났을 때 그 대상의 여러 면을 분석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한편으로는 나에 대한 분석도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 나의 어떤 점이 내가 대상을 만났을 때 이런 느낌을 들게 하고 이런 생각을 하게 하지? 나의 생각의 과정은 어떤 모습이지? 나는 어떻게 반응하는 기제를 가지고 있지? 내 눈에는 대상이 어떻게 보이고 있지? 어떤 부분들이 내게 크게 다가오고 있을까?
누구나 할 수 있으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답 없는 세계에 발을 들이는 순간 세상의 명확함은 전부 깨어지고 그 뿌옇고 영원한 무지의 영역에서 나를 잃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비평은 누구나에게 열려있으면서도 훈련받은 전문가 또한 필요하다. 전문가의 역할은 더 옳은 사고의 방향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각자의 모습대로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가이드가 되어주는 것이다. 질문을 던지는 것이 그들의 일이다. 할 수 있다면 자신의 답이나 문맥에 맞는 정보를 공유해 주는 것도.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하나의 갈래로서. 바로 그 순간 상대방의 답이 중요하지도 않다. 질문이란 건 누군가의 마음에, 머리에 남아서 더 오래 숙성되고 계속 자라나는 답을 만들어내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모두가 비평적 사고를 할 필요는 없다. 실용학문의 영역에서는 시간을 들이는 것도 답이 없는 것을 답이 없는 대로 놓아두면 안 되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비평적 사고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해방으로 가는 길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타인을 판단하고 판결을 내리는 양상들에서, 사람들은 이를 습관처럼 편하게 하는 것 같으면서도 어떠한 불안감에 떠밀리고 있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옳은 것과 그릇된 것이라는 이분법을 세우고 얼른 옳은 쪽에 나를 이입했을 때, '나는 옳은 사람이야, 나는 잘못되지 않았어'라는 도덕적 안정감을 누리면서도, 혹여나 그릇된 쪽에 내가 조금이나마 놓일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다. 그리고 결국 자신이 옳다고 편들었던 것이 그릇된 것이라는 판결이 날 경우 자신을 그릇되게 인도한 잘못된 정보들을 탓하고, 분노하고, 속임수에 놀아났다며 '가짜', '조작'이라는 개념에 예민하게 반응하기도 한다. 자신을 희생양으로 프레이밍 한다.
사실, 괜찮다. 놀아났어도 괜찮고 잘못된 선택을 했어도 괜찮다. 그게 인간이니까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실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 그만큼 관심도 기대도 없다. 서로에 대해 평가하는 건 사실 자신이 느낀 바이지 진정 그 상대에 대한 것도 아니라고 본다. 어차피 우리가 접하는 모든 정보는 어떤 식으로든 선택적으로 조립된 이야기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분노를 겪어나가는 과정에서 도달점이 '내가 잘못되지 않았어'라는 결론이나 변호보다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가 되는 것이 비평적 사고라고 본다. 전문가든 초심자든, "모르겠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들의 사고는 깨어나기 시작한다. 끝맺음 짓지 않고 열어두는 말이기 때문이다.
지식이 귀하던 시대는 지났다. 과거에는 지식에 접근하는 것과 잘 소화하는 것이 중요했다. 지적 자극이 드물었다. 반면 지금은 과도한 지식의 홍수 속에서, 정신없이 들어오는 자극 사이에서 어떻게 방향을 잡고 노를 저으며 나아갈지를 배워야 한다.
'중립은 무해하지 않다'였나, 그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대학원 공부를 통해 한 가지 확실하게 깨달은 것이 있다면,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특히 세계대전과 글로벌 식민사업 이후로.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내 일상에 접근하는 여러 가지 의견들, 정보들, 내 세계를 이루는 그 많은 요소들이 하나하나 특정한 누군가의 의도적 설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이데올로기, 즉 한 시대를 풍미하는 어떠한 생각의 체계는 있었다 없었다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눈에 잘 보이거나 안 보일 때가 있을 뿐 늘 존재하고 우리의 생각은 그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의 내 이 생각도, 나만의 주체적 생각이 아닌 지금의 많은 담론을 체화한 것이다.
그래서 중립은 중립이 아니다. 깨끗한 백지는 없다. 지식이 귀하던 시대엔 가끔 전해지는 지식을 이리 보고 저리 보고 물고 뜯고 의심할 시간이 주어졌다면, 지금은 오는 지식을 차단해야 할 판이다. 가만히 앉아 있다 보면 중립이 아닌, 정보의 흐름을 관리하는 권력자들에 의해 통제된 내용만을 접하게 되기 십상이다. 객관적, 중립적이라는 가면을 쓴 내용들이다. 그래서 어떤 지식을 내가 어떻게 찾아낼지를 배우고, 내가 지식을 찾아나가는 습관을 들이고 체화해야 나의 생각과 나의 세상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 지식의 홍수 시대라는 건 다른 말로 하면 찾으려고만 하면 원하는 지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시대가 된다. 주체성을 가지기 위한 많은 조건들이 갖추어져 있는 사회란 것이다.
자유로워지려면, 일단 1)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아야 하고, 2) 그것을 잘 설명(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고민의 과정에서 다른 사람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는다. 멘토의 가르침이었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수없이 들어봤지만 아주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라는 건 조금 생소하면서도 정확하게 느껴지는 표현이었다. '진짜 나', '나의 본질'과 같은, 존재하지 않는 허상을 파악하기 위해 들이는 시간보다는, 내 주파수가 어디에 더 진동하고, 내가 어떤 생각들과 어떤 모습들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아차리는 것에 집중하도록 도와주는 말이었다. 실제로 그것이 나에 대해 알 수 있는 전부라고 생각한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려면 경험이 많아야 한다. 시도해 보고, 도전해 보고, 실패하고, 다시 하고, 실패하고, 또다시 해본다. 이번엔 다르게. 좀 더 나한테 맞는 방법을 고민해 본다. 실패했던 경험들, 그 실패에 내가 어떻게 대응했고 그다음을 어떻게 이어나갔는지를 아는 것, 그 시간들이 쌓여 내가 존중할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나를 만든다. 다음 실패에 조금씩 더 유연하게 대처하게 된다. 실패할 용기를 가지기 위해서는 자원이 필요하다. 그래서 교육기관이 너무 중요하다. 그리고 교육 예산의 배치. 특히 성인으로서의 자아를 만들어 나가야 하는 대학의 역할이 정말 중요하다. 지금의 대학은 실용학문 위주의, 학점은행이 된 지 오래다. 지금의 사회에서 당장의 취업과 생존이 너무 어려우니까, 대학에서도 여유는 없다. 대학이 줄 수 있는 건 금전적, 시간적 여유인데, 소모적인 자원으로 퍼주는 것이 아닌, 무모함과 시도들과 그 여파로부터의 회복을 지원해 줄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그 예산이 사용되어야 하는 부분이다.
실패라고 표현했지만 실은 나는 이것들을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살면서 종종 찾아오는 불편한 현실과 생각과 감정들을 어떻게 견디고 그들과 어떻게 공존할지를 배우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자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내게 주는 가르침은 고통이 우리에게 주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는 아주 강렬한 생의 에너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고통은 외면하고 제거할 대상이라기보다는 그 고통이 내게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관찰할 수 있는 밀도 높은 기회일 수도 있다. 내게서 가장 솔직한 반응을 이끌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적 자원에 대한 이야기로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금전, 시간, 시스템 등을 이야기했지만 결국 나는 인간으로 돌아온다. 내게는 죽어 있는 지식이 아니라 그 지식을 체화한 인간들의 살아있는 생각이 가장 큰 지적 자극이 된다. 모두의 세계는 다 다른 모습을 띄고 있고, 고맙게도 그 세계를 조금이나마 공유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너무 반갑다. 옳고 그름, 판결과 판단을 두고 다투는 순간 우리는 서로가 가지고 오는 다른 세상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줄 수가 없다. 이기기 위해 서로를 왜곡하고 나를 왜곡한다. 사실 내가 못 보는 것을 다른 사람이 본다면, 그만큼 그 사람이 내 세계를 다채롭게 만들어줄 수 있는 고마운 일인데 말이다. 나를 알면, 내 한계를 알면, 그 부분을 보완해 줄 수 있는 타인의 존재가 그저 다행스럽다. 그래서 인문학에 있어서 학문이란, 토론이란 나의 의견을 주장하고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내 세상을 잘, 정성스레 보여주고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생각을 하게 하고 반응을 하게 하고 대화를 시작하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어떤 생각이든 반응이든 상관없다. 내가 말한 게 아닌 완전 다른 주제로 가도 괜찮다. 이미 생각을 시작하게 한 것만 해도 내 연구는 역할을 다한 것이다. 그래서 비평적 사고의 과정에는 정보를 찾는 것도 포함되지만 다른 사람들과 그에 대해 이야기해 보는 것이 대상을 진정 다각도에서 볼 수 있게 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타인에게 어떠한 자극도 주지 못해도 괜찮다. 가장 궁극적으로 내가 학문을 하는 이유는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싶은 대로 쓰는 거라 그걸로 됐다. 비평적 사고도 사실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인데 이걸 내 맘대로 표현할 수 있도록 훈련을 받고 채널이 주어진 것으로 나는 행복하다. 몸과 마음이 끊임없이 망가지는 7년의 유학과정을 거치고서야 내가 원하는 것을 알고, 그것을 어느정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은 ~이렇다, 인간의 본성은 ~이렇다,라고시작하는 많은 서양철학 이론들을 아직도 잘 따라가지 못한다. 인문학을 전공하며 내가 확실하게말하게 된 한 가지는 '인간은 절대 알 수 없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앞에 놓인 인간과 또 인간이 아닌 다양한 생명의 모습들로부터 배우고 느끼고 새로운 것을 보는 모든 과정이 끝없이 신기하고 재밌다. 공연예술학자로서 꿈꾸는 사회의 모습이 있다면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 블로거 해석을 찾아보면서도 그 각자의 해석을 충분히 흥미롭게 읽고 그것을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하나의 자극으로 받아들여 생각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다. 나로서 행복하고 타인을 통해 넓어지면서 더 행복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