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사 선생님이 짐짓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런 반응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어머니를 증오한다니...
"물론 , 자식인데 어머니를 사랑했겠죠.그 척박한 환경에서도 저를 잘 키우고 싶어서 열심히 일하셨고 어머니 입장에서는 양육자의 역할을 다하고자 노력했겠죠.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제가 필요했던 건 '소통'이었어요. 서로의 우선순위가 달랐던 것 같아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힘들었을 때 예를 들면,역이민 해서 한국에 오자마자 한국말을 못 하고 듣기도 불가능할 때 그때 전 혼자였어요. 그 기간이 6년의 시간이었는데 이상하게 그 긴 세월이 제 기억에서 거의 다 사라졌어요. 한두 장면만 기억나고 다 존재하지 않았던 삶이 되어 버렸어요. 그 기억이 사라져서 제가 살아갈 수 있었는지는 몰라도 한 인간으로서는 슬픈 일이죠. 사실 그 기억을 되찾고 싶은 생각도 없어요. 그러고 나서 중학교에 입학했죠."
"네... 중학교 시절은 어땠나요?"
선생님은 계속 나에 대해서 묻는데 그 이유를 모르겠다. 난 여기에 시어머니 때문에 왔는데...
"뭐 , 똑같았어요. 말은 다 알아들었지만 그냥 가만히 앉아 있었어요. 실어증 비슷한... 제 표정이 이상하다고 가끔 교무실에도 불려 가고 그렇게 6년을 나를 속이고 남을 속이다가 고3 때 대학 입학시험을 치렀는데 다 떨어졌어요.
그 당시 대학 실패는 곧 인생의 실패였죠. 그 책임을 혼자 다 지기 싫었어요.억울했어요. 그러던 중 이 실패의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 좋은 대상을 물색하다 '어머니'란 존재를 발견했어요. 그전에도 크고 작은 사건들이 많았지만 아마도 대학 실패 이후 진정한 사춘기를 맞이한 것이었어요. "
난 그 당시 일기장에 늘 이런 글들을 써댔다.
'다 엄마, 당신 때문이야! 당신은 예전부터 내가 정말로 힘들 때 내 옆에 없었잖아? 당신 때문에 내가 이렇게 실패를 했어. 한국에서는 이런 실패는 곧 죽음이더라?'실패자'라는 낙인이 찍힌다고! 이게 다 당신 때문이야.'
"친척들은 수군댔어요. 결국 경란이가 대학에 떨어졌다고, 그럴 줄 알았다고... 앞으로의 삶이 망했다고요."
" 그런데 다시 도전하셨네요?"
"전 결국 재수를 해서 점수에 맞춰 겨우 대학에 갔어요. 삼수까지는 못하겠더라고요. 내가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고요. 학교에도 학과에도 적응을 못했어요."
"결국 이경란 님께서는 부모와의 소통의 부재로 성인이 될 때까지 학교와 사회에 적응을 못 했다는 이야기인가요? 그리고 이 결과에 대한 책임을 어머니에게 전가했고요?"
"네, 그런 면이 있었죠. 전 제가 그렇게 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사화적으로 '패배자'가 된 거였어요. 그러면서 이 땅이 싫어졌어요.한국은 정착지가 아니라 거쳐가는 곳이라고 생각했어요. 내고향은 여기가 아니라 다른 곳이라고 생각했어요.지금까지 부유하는, 떠도는 삶을 살았어요. 다시말해 아직까지도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은 지금까지도 이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어요. 그냥 집시 같아요. 전..."
"어머니께서 학습적 방치는 아니고 어쩔 수 없이 정서적 방치를 한 것 같아요. 그 과정에서 이경란 님은 '피해'를 당했다고 판단하신 거고요."
"학습적 방치는 아니라고요?"
"네, 물론 초등 6년 동안 언어적 문제 때문에 적응을 못한 것은 팩트이지만 그 이후에 객관적으로 어머니께서는 노력을 하셨다고 보입니다. 저도 이혼한 어머니와 단칸방에서 살면서 고등학교까지 겨우 졸업했는데 이후 학문에 의지가 있어서 야간대학에 진학해서 공부를 이어나가 대학원까지 가서 석사학위를 받았죠. 제 생각에는 님이 공부에 욕심이 있었을까요? 여하튼 이경란 님은 피해의식이 어느 정도 있다고 보입니다. 부모의 정서적 방치에서 비롯된 '결핍'이 생긴 겁니다."
"결핍이요?"
나에게 '결핍'이 있다고?선생님이 말하는 결핍이 무엇인지...
"그 결핍 때문에 그 빈 공간을 채우고자 이경란 씨는 사회적으로 성공하고자 하는 욕구가 굉장히 높다고 보입니다.검사결과로도 그렇게 나왔고요. 그래서 사업을 시작해 님의 이름을 걸고 자체 브랜드를 만드는데 10년의 시간을 들여 노력하신 거고요. 결과적으로 사업이 잘안 되었다고는 하지만 이경란 씨는 계속 시도할 거예요. 과거의 생긴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요.
그 결핍은 또 피해의식은 시어머니와의 관계에 있어서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보입니다. 시어머니가 이상한 분이라는 데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다른 며느리였으면 그냥 '저 어르신이 아파서 거짓말을 해서라도 인정받고 싶구나.'라고 측은지심으로 대했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님은 목표를 향해 뛰어가는 전사처럼 자아실현의 욕구를 위해 달려가는데 시모가 방해를 한다고 생각했을 거고요. 이건 님이 참을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겁니다. '내가 어떻게 살았는데! 내 인생을 또 망치려고 해?'라고 시모에게 극단적인 분노를 표출한 거죠.누구나 시모에 대해 어느 정도 불만은 있지만 표출하는 양상은 다르죠. 님처럼 극단적으로 분노를 드러내는 분은 많지 않아요."
아니, 이 분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 시모는 가해자이고 난 피해자인데 갑자기과거의 결핍 때문에 내 분노가 극단적으로 표출되었다는 말인가? 다른 며느리들은 보통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불신과 분노는 표출 안 한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