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휴대폰 전화가 울렸다.
엄마였다.
“우리 딸, 축하해. 엄마가 만감이 교차하네.”
“왜?”
“그냥...”
그 말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
기쁘기도 했지만, 마음속엔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무거운 감정이 스쳤다.
나는 늘 불안했다.
칭찬을 받아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높은 곳에 올라서야 사랑받고, 안심할 수 있다고 여겼다.
없는 집에서 큰 욕망을 가진 딸.
그 삶은 끊임없는 ‘존재 증명’의 연속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바라던 트로피가 클수록
그것을 쟁취하기 위한 과정은 점점 더 고단해졌다.
그러다 결국, 나는 추락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다시 날고 싶은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우리가 불안한 건, 자신보다 남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가에 더 민감하기 때문이다.”
『불안』알랭 드 보통
이 말은 곧,
내가 내 삶의 주인이 아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아쉬워하지 않는다면,
군자가 아니겠는가.
― 『논어』 (현대지성클래식 23 / 소준섭 옮김)
공자는 ‘배움’을 말한 후,
그 여정을 ‘군자’로 마무리 짓는다.
타인의 인정이나 관점이 아니라,
스스로 알고 실천하는 존재.
자기만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사람.
신영복 교수는 『논어』를
“인간관계론의 보고”라 말했다.
나를 바로 세워야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세상과의 관계에서도
나를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 사회는 빠르게 변하고
우리는 그 속도에 맞춰 변화를 강요받는다.
그 안에서 나를 지키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
많은 이들이 나처럼
무언가를 이루고 난 뒤에도
마음 한 구석에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을 안고 살아간다.
우리는 끊임없이 증명하려 애쓰지만,
어쩌면 이제는
**‘나는 나, 알아주지 않아도’**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배움 그 자체의 즐거움,
실천하며 성장하는 일,
그 여정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지기의 존재.
그리고
그 모든 순간에 나를 지키고 가꾸는 일까지.
그렇게 나는 다시 배우고 있다.
스스로를.
그리고 살아가는 법을.
가파른 삶의 경사면에서
넘어지기도 하고,
사람들의 시선에 흔들리기도 했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은
어느 순간, 더는 날게 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내 안의 목소리를 듣는 법을 배웠다.
내가 어떤 모습이든,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나를 껴안고 싶다.
나이를 먹어도
삶은 여전히 낯설고,
배움은 끝이 없으므로.
이제는 누군가의 기준이 아니라,
내가 정한 리듬으로 걷는다.
“내 마음 깊이 초라한 모습으로 / 힘없이 서 있는 나를 안아주고 싶어”
— 신해철, 〈나에게 쓰는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