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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고기3

by 분홍소금

겨울 방학 전에 대부분의 교과서 진도가 마무리 되었다. 마지막 단원은 설렁설렁 지나가거나 손도 대지 않았다. 개학 후에 마저 한다고 했지만 개학 후에는 선생님도 아이들과 약속이나 한 듯 배우지 않은 마지막 단원에 대해 모른 척 했다.



방학 직전에는 수업의 반은 자습으로 채웠는데 교과 공부보다는 주로 책읽기를 했다. 집에서 읽던 책을 가져 와서 읽어도 좋다고 했지만 아이들은 교실 뒤편의 학급 문고에 있는 책을 읽었다. 하지만 모두가 책을 읽는 것은 아니었다. 책상 위에 올려 놓고 책 읽는 시늉만 할 뿐 여기저기에서 친구들과 장난을 치느라 계속해서 몸을 덜썩 거렸다.


학급 문고에는 전래 동화, 이솝 이야기, 세계 명작이 몇 권씩 꽂혀 있었다. 1년 내내 같은 책이 꽂혀 있었는데 겉포지가 너덜너덜하게 낡아 있거나 누르끼리한 종이의 색상이 햇빛에 바래 얼룩덜룩했다.



학교에서 다 읽지 못하면 빌려갈 수 가 있었다. 읽은 내용이 읽지 않은 부분보다 훨씬 많았지만 집에 가서 처음부터 다시 읽고 싶어서 두 권을 모두 빌렸다. '엄마 찾아 삼만리'와 '착한 낭자전' 이었다.

저녁을 먹고 엎드려서 이불을 덮은 쓴 후 엄마 찾아 삼만리를 읽었다.



가난한 마르코네 가족이 우리집과 닮았다. 주인공 마르코는 돈을 벌기 위해 멀리 이웃나라에 간 엄마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엄마를 찾아 나선다. 그런데 엄마가 사는 주소를 들고 찾아가면 엄마는 딴데로 가고 없다. 이번에는 만날 수 있겠지 하고 조마조마해져서 읽으면 그 다음 주소지에서도 만나지 못했다. 온갖 고생을 하고 겨우 찾아 갔는데 갈 때마다 길이 엇갈리니까 안타깝고 속상했다. 엄마를 좀처럼 만나지 못하는 마르코가 불쌍해서 눈물이 났다.



옆에서 바느질을 하던 엄마가 무슨 이야기냐고 물었다.

마르코라는 아이가 아픈 엄마를 찾아가는 이야기라고, 근데 길이 자꾸 어긋져서 못 만나니까 불쌍하다고 했다. 엄마는 "달구제비(길이 엇갈리는 것)가 되는 가베." 하면서 "너도 그 애처럼 엄마를 찾아 삼만리를 올 수 있겠나?" 하고 물었다. 나는 엄마가 집을 나가서 먼 데를 간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어서 엄마의 물음이 비현실적으로 들렸다. 가난해서 엄마가 돈을 벌러 멀리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을뿐만 아니라 아무리 아버지와 피터지게 싸웠어도 다음날 아침이면 전날 밤에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부엌에서 태연하게 밥을 짓던 엄마였기 때문이었다. 내가 머뭇머뭇하니까 엄마는 "이야기라서 그렇지 그 먼길을 만다꼬 찾아가?" 했다.



착한 낭자전도 감명 깊게 읽었다. 굵고 힘있는 먹 선으로 그려진 그림이 말 주머니 속 짧은 글보다 훨씬 찰지게 다가왔다. 마음씨가 비단결 같이 고운 낭자는 가난한 집안식구들이 먹을 양식을 마련하기 위해 건넛 마을 부잣집에 가서 갖은 허드렛일을 했다. 낭자의 착한 마음씨에 감동을 받은 부잣집 마님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자기한테 말하면 도와주겠다고 까지 한다. 부잣집 마님도 감동시키는 착한 낭자를 보며 나도 만화의 주인공을 본받아 '집안 일도 열심히 거들며 엄마를 도와 줘야지.' 하는 마음이 저절로 우러났다. 실제로 힘들 때는 착한 낭자를 생각하며 잘 극복할 수 있었다.



특히 겨울에 강에 가서 빨래를 해야 하는 날에는 큰 도움이 되었다.

평소에는 도랑에 있는 빨래터에서 빨래를 했지만 겨울에는 도랑에 흐르는 물이 적은 데다가 그마저도 얼어 있어서 빨래를 할 수가 없었다. 강에 가서 빨래를 해 와야 했다. 다라에 빨래를 담아 이고 다른 한 손에는 강에 빨래를 하러 가기 전에 끓인 물이 담겨 있는 작은 물통을 들었다.



강에도 집 앞 도랑처럼 빨래터가 있었다. 빨래터에 물통을 놓고 빨래를 하기 전에 먼저 강물에 덮여 있는 얼음 부터 깼다. 적당한 돌멩이를 주워다가 빨래를 넣고 흔들어서 헹굴 수 있는 넓이 만큼 얼음을 깼다.

얼음아래로 흐르는 물은 생각보다 덜 차가웠다. 빨랫감을 하나씩 꺼내서 빨래 방망이로 두들겨 빨래를 했다. 손이 시리면 물통에 들어 있는 뜨거운 물에 손을 담갔다.



방망이질과 헹굼질을 하느라 빨랫감을 강물에 넣고 이리저리 흔들어 대면 추위도 한걸음 물러났고 착한 낭자가 추운 겨울에 뻣뻣해진 손에 입김을 호호 불어가며 빨래를 하던 장면을 떠올리면 나도 착한 아이가 된 것 같아 뿌듯했다. 빨래에 가속도가 붙고 말끔해진 빨랫감이 다라에 차곡차곡 쌓이면 빨래 놀이를 하는 것처럼 신이 났다.



한석봉도 읽었다. 엄마가 설날에 먹으려고 방앗간에서 빼 온 가래떡을 꾸덕꾸덕하게 굳힌 뒤 새벽녘에 썰고 있는 소리를 들으면 명필 한석봉 이야기가 생각났다. 글 공부를 하러 간 아들이 기한이 차기 전에 집으로 돌아온 것을 본 한석봉의 어머니는 왜 벌써 왔냐고 잔소리하고 꾸짖는 대신 조용히 불을 끄고"나는 떡을 썰테니 너는 글씨를 써거라." 한다.

불을 켰을 때 결과는 처참했다. 가지런하게 썰려있는 엄마의 떡과 달리 석봉의 글씨는 삐뚤빼뚤했다. 크게 깨달은 한석봉은 그 길로 공부하던 곳으로 돌아가 열심히 실력을 갈고 닦아 명필이 되었다고 했다. 한석봉 이야기가 생각날 때마다 한석봉처럼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해야 겠다 라는 생각보다는 '한석봉이 왜 엄마가 썬 떡으로 떡국을 먹지 않고 그 길로 돌아갔을까? 한석봉 엄마는 왜 아들에게 떡국 먹고 하룻밤 편히 쉬었다 가라고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만 났다.


며칠 동안 날씨가 꾸무리하더니 하루 종일 비가 왔다. 아이들은 저마다 비가 눈이 아닌 것을 아쉬워 하며"겨울에는 눈이 와야 되는데 비가 오니까 이상하다." "맞아, 비는 겨울에 안 어울린다." "눈이 오면 기분이 훨씬 좋을 건데." 했다.

비가 오니 우산을 써야 했다. 겹겹히 껴 입어 가뜩이나 불편한데 거기다 우산까지 받치니 더 불편했다.

그렇지만 하루 종일 내리는 비로 논 구석구석에 물이 갭히고 논 위가 물로 번번하게 덮히는 것을 보면서 두껍고 무거운 의복에 갇혀 있던 마음이 점점 가벼워졌다.

논에 얼음이 얼기만 하면 곧 빙판이 될 것이다. '얼음아 꽁꽁 얼어라 제발 제발' 썰매타기를 싫어하는 아이는 없었다. 아이들의 마음은 이미 찬 바람에 얼어 붙은 빙판위에서 썰매를 타고 쌩쌩 달리고 있었다.



지난 해에는 논에 물이 부족했다. 군데 군데 얼음이 얼기는 했지만 썰매를 탈 수 없었다. 아이들은 썰매를 탈 수 있는 빙판을 찾아 다녔다. 산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면 논과 산 사이에 계곡물이 내려와 흐르는 도랑이 있었다. 골짜기를 타고 흐르는 바람에 물이 얼고 물이 있는 곳은 응달이 져 있어서 얼음이 봄까지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논과는 달리 장소가 좁고 얼음 아래로 흐르는 물의 깊이가 일정하지 않았다. 물의 가장자리는 얕지만 조금만 들어가도 가파르게 깊어져서 안심할 수가 없다. 어떤 계곡물은 서너 살 먹은 아이들의 키 만큼 깊은 곳도 있었다

골짜기에서는 응달진 곳 가장자리에서 썰매 타는 시늉만 하다가 내려와야 했다.



비가 그치자 며칠 포근했던 날씨가 언제 그랬냐는 듯 라디오 일기예보에서 말한 것처럼 추위가 제 세상이 온 것처럼 휘젓고 다녔다. 아이들은 옷을 있는 대로 껴 입었다. 내복을 입고 그 위에 털실로 짠 스웨터를 입고 마지막으로 솜을 넣어 누빈 겉옷을 입었다. 양말도 두 켤레를 겹쳐 신었다. 엄마의 오래된 스웨터를 풀어서 뜬 목도리로 목을 친친 감았다.



기다리던 방학이 시작되었다. 전날 축담 위에 챙겨 놓은 썰매가 나에게 소리쳤다. "어서 나를 타, 달려 달려 신나게 달려." 아침을 먹고 햇살이 더 달아지기 전에 썰매를 타러 갈 채비를 하고 있을 때 호미가 대문 안으로 들어왔다.

"호미야 스케이트는 우짜고 빈손이고?"

호미는 울상이 되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작년에 골짜기에서 영규하고 같이 썰매 타다가 얼음이 깨져서 물에 빠졌다아이가."

"그래 맞다, 할머니한테 식겁먹었제?"

호미의 할머니는 호미에게 노발대발 했었다. 게다가 다시는 썰매를 못 타게 막는다며 도끼를 가져다가 썰매를 부숴버린 일이 그제야 생각났다.

호미는 잔뜩 풀이 죽어 있었다. 나는 오빠를 찾았다. 오빠한테 호미도 탈 수 있게 스케이트를 하나 더 만들어 달라고 할 참이었다.


"엄마, 오빠 어디 갔노?"

엄마는 고구마를 먹고 있었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고구마 그릇 옆에는 모양 없이 썰어진 무 건더기가 떠 있는 동치미가 한 사발 놓여 있었다.

"너거 오빠 와 찾노? 오빠는 집에 없다."



오빠는 토끼를 잡으려고 산 아래 밭에 설치해 둔 덫과 독약이 들어 있는 까치밥 미끼가 어떻게 되었는지 보러 갔다고 했다. 덫에 걸렸거나 까치밥을 먹은 토끼가 있다면 오빠는 그 토끼를 들고 개선 장군처럼 흔들며 들어올 것이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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