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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고기4

by 분홍소금

토끼는 쥐 다음으로 번식력이 강하다. 임신 기간은 30일인데 한 번에 10마리 안팎을 낳는다. 우리 밭과 맞닿은 산은 가파르고 깊어서 토끼가 많았다. 토끼는 애써 농사 지은 농작물을 닥치는 대로 갉아 먹었다. 그렇지만 농작물이 한창일 때는 미끼보다 맛있는 먹이가 지천으로 늘려 있어서 잡을 수가 없었다.



토끼 사냥은 겨울에만 할 수 있었다. 눈이 오면 동네 청년들은 토끼 사냥을 위해 예닐곱 명이 모여 팀을 꾸렸다. 토끼는 재빨라서 2~3명으로는 어림없기 때문이다.

눈이 내리고 난 다음날 청년들은 산으로 올라가 토끼 발자국을 찾았다. 사람 발자국이 닿지 않은 산에는 먹이를 찾아 나선 토끼나 꿩 발바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청년들은 토끼 사냥을 위해 눈 위에 찍힌 발자국을 따라 갔다.



토끼와 맞닥뜨린 순간 토끼가 산 위로 도망을 가면 아무도 따라 잡을 수 없었다. 토끼를 잡으려면 토끼를 위에서 아래로 쫓아야 했다. 토끼는 앞다리가 짧고 뒷다리가 길어서 산 위에서 산 아래로 달리는 것이 서툴기 때문이었다. 청년들은 토끼를 발견하면 산 위로 도망치지 못하게 막으면서 동시에 산 아래로 몰았다. 산 위로 올라가지 못한 토끼가 산 아래를 향해 정신없이 달리다가 균형을 잡지 못하고 나뒹굴 때 낚아채서 잡으면 그날 사냥은 성공이었다.



물론 토끼가 나뒹굴었다고 해서 쉽게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상황을 재빨리 수습한 토끼가 청년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기 일쑤였다. 요행히 청년들이 토끼 사냥에 성공했다고 해서 토끼고기를 배불리 먹은 것도 아니었다. 마을 어르신들이 살고기 부위를 먹고 난 후 남은 부분을 뼈와 함께 잘게 다져서 볶은 것을 조금 떠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토끼사냥은 성공 여부와 성공 후 고기를 배불리 먹는 것을 가볍게 뛰어 넘을 만큼 그들에겐 흥미 만전, 스릴 만점 특별한 겨울 행사였다.



방학식을 하고 호미와 썰매를 타러 가기로 한 날은 장이 서는 날이기도 했다. 아침에 일어나 학교에 가기 전에 썰매를 요모조모 뜯어 보고 있는데 아버지가 장에 갈 채비를 하고 소 마구간에서 소를 몰고 나오는 것을 보았다.

여름에는 산과 들에서 난 풀과 아버지와 오빠가 뜯어다 준 풀을 배불리 먹고 늦가을부터는 집에서 끓여주는 소죽을 잘 먹은 어미 소는 어깨가 떡 벌어지고 누런 털이 반지르르한 것이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를 정도였다. 마굿간에서 소를 끌고 나오는 아버지는 평소에 소를 쳐다보던 흐뭇한 표정과 달리 말을 붙이기도 어려울 만큼 침울해 보였다. 아버지뿐 아니라 엄마도 아침부터 낯빛이 어두웠다. 나는 부엌으로 가서 엄마에게 아버지가 왜 소를 끌고 나오냐고, 혹시 소팔러 가는 거냐고 물었다.



엄마는 아버지가 어미 소를 팔고 어린 소를 사 올 것이라고 했다. 나는 어미 소가 팔려 가는 것이 억울하고 슬펐다. 어미 소가 새끼를 낳으면 송아지를 팔면 되는데 왜 어미 소를 파느냐고 되물었다. 엄마는 화를 벌컥 내며 "그렇게 궁금하면 너거 아부지한테 물어봐라."하고 쏘아 붙였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들에서 해야할 농사일은 없었다. 남자들은 나무를 해 나르거나 새끼를 꼬거나 가마니를 짰다. 여자들도 땔감을 마련하기 위해 산으로 가서 나무를 해서 날랐다. 하지만 여자들은 그것 말고도 해야 할 일이 따로 있었는데 그것은 동네에 대소사가 있는 집에 달려가 일손을 보태는 것이었다.



시골에서는 특별히 겨울에 혼사가 많았다. 농사철에는 농사일 때문에 대소사를 치뤄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딸의 혼사가 있는 집에서는 시댁으로 보낼 이불과 신혼부부의 차렵이불을 직접 만들었다. 그렇지만 솜을 가지런히 펴고 편 솜을 적당한 두께로 켜켜이 놓아 다듬고 시치는 일은 안주인 혼자 하기가 어려웠다.



목화 밭에서 가을에 수확한 솜을 기계로 타오면, 날을 정해 마을의 여자들 여러 명이 모였다. 이불의 모퉁이에 자리를 잡은 여자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이불의 네 귀퉁이에 솜을 골고루 펴고 채워서 반듯하게 만들었다. 모양이 잘 잡히며 청색 홍색이 잘 배합된 이불 호청을 무명실을 꿴 굵고 긴 이불 바늘로 꼼꼼하게 기웠다.



손이 많이 가고 시간이 걸리는 혼사에 쓸 잔치 음식도 며칠 전부터 함께 준비했다. 누룩으로 막걸리를 빚고 식혜를 만들고 떡국떡을 빼서 썰고 유과나 강정을 만들었다. 남자들은 잔치에 쓸 돼지를 잡았다. 초상이 난 집에서는 장례식 일정에 따라 3일 이나 5일을 출근하다 시피 하며 장례식에 온 문상객들에게 음식을 대접했다.



곗날도 겨울에 치뤄야 하는 주요 행사 중 하나였다. 곗날에는 종갓집이나 제각에 모여 가문의 자산에 대한 결산을 하거나 안건에 올라온 의제들을 의논했다. 곗날에는 동네 사람들 뿐만 아니라 주변 동네에 흩어져 살던 종씨들도 모두 참석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곗날 모임를 위해 남자들은 또다시 돼지를 잡고 여자들은 여러가지 음식을 마련했다. 곗날은 농한기에 열리는 또 하나의 잔치였다.



남자들은 뜨끈한 사랑방에서 곗논과 곗돈에 대한 수입과 지출에 대한 결산을 한 뒤 떡국과 돼지고기와 술을 먹고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다. 담소는 곧 놀이로 이어졌고 가장 대표적인 놀이는 화투였다.



화투는 처음부터 오락의 수준을 넘는 것이었다. 노름판으로 변질된 화투는 한 번 시작 하면 밤새도록 이어졌다. 밤이 깊어지면 화투판이 벌어진 사랑방에서는 고성이 오갔다. 꼼짝 않고 방에 틀어박혀 노름을 하던 사람이 화장실을 가느라고 잠시 나올 때 우연히 마주치기라도 할라 치면 남자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 올라 있고 충혈된 눈은 살기를 띄고 있었다. 누가 돈을 잃고 있는지 남자들의 얼굴만 봐도 금방 알 수 있었다.



화투를 치다가 돈을 잃으면 돈을 잃은 사람은 그날 걷은 곗돈을 빌렸다. 곗돈은 빌리기가 쉬웠다. 곗돈은 묵혀 놓는 것보다 이자를 놓는 것이 이익이므로 계원이라면 누구든 곗돈을 쉽게 빌려 쓸 수 있었다. 빌린 곗돈은 이듬해 곗날 정해진 이자를 붙여서 갚으면 되었다.



동네의 모든 남자들이 노름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노름에 취미가 없는 남자들은 곗돈의 결산이 끝나고 그날 나온 음식을 배불리 먹고 나서 일찌감치 집으로 갔다. 집으로 가서 나무를 한 짐 해 오거나 꼬던 새끼를 마저 꼬았다.



노름을 하는 사람은 대부분 정해져 있었다. 매년 돈을 따는 사람은 따는 재미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매년 잃은 사람은 잃은 돈을 만회하려고 본전 생각에 이를 악물고 노름 판에 뛰어들었다. 우리 아버지는 후자였다. 해마다 돈을 다 잃고도 모자라 곗돈을 빌려 썼다. 어느 해는 빌린 돈을 갚지 못해 2년 치를 한꺼번에 갚아야 할 때도 있었다. 올해가 그런 해였지만 2년 치를 갚을 돈이 없었다. 빌려 쓴 곗돈을 갚으려면 소를 팔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빚을 갚기 위해 소를 팔러 갔다. 에미소를 팔고 나서 젖을 뗀 송아지나 진배 없는 어린 소를 사고 남은 차액으로 빚을 갚을 생각이었다. 엄마는 이태마다 되풀이 되는 노름빚 때문에 곗날을 저주했다. 곗날을 앞두고는 제 정신이 있는 사람이냐며 아버지에게 온갖 악다구니를 썼다. 하지만 노름을 막으려고 하는 어떤 노력도 번번히 허사로 돌아갔다.



아버지를 제외한 우리 가족은 제발이지 이번에는 아버지가 소를 어린 소와 바꾸고 남긴 돈으로 빚을 청산하고 노름에서 손을 씻기를 바랐다. 엄마는 체념한 듯 "그런 날이 오겠나?" 했다. 엄마는 대신 아버지가 남긴 돈이라도 잘 챙겨오면 소원이 없겠다고 했다. 엄마의 말대로 아버지는 소시장에서 소를 팔고 어린소를 사면 빚을 갚을 돈을 들고 집으로 곧장 오는 법이 없었다. 새로 산 어린 소를 소 시장의 기둥에 매어 놓고 빚을 갚아야 할 돈으로 시장에서 노름을 하거나 술을 마셨다.



엄마는 "허기야 그렇게 강단이 있는 사람이 해마다 노름빚을 지겠나?" 하면서도 아버지를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어린 소와 아버지를 데리러 엄마가 직접 나설 수도 없었다. 직접 나섰다가 봉변을 당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이제 아버지와 소를 구하기 위해 시장으로 오빠를 보내려고 하는 것이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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