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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고기 6

by 분홍소금 Mar 14. 2025

봄이 왔다. 집 앞 방천에서 아지랑이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개나리 꽃 아래에서는 암탉이 갓 태어난 병아리가 보는 앞에서 땅을 마구 헤집으며 먹을 거리를 찾는데 충실하면서도 먹이를 찾는 교육까지 해결했다. 

여기저기서 봄이 봄바람을 타고서 사방에 부드러운 입김을 불어 넣었다. 



나의 봄은 조금 늦게 물에서 시작되었다. 겨우내 일찍 일어나 씻을 물을 데워야 하는 지겨운 노동에서 해방이 되면 그 때 비로소 '봄이 와서 너무 좋아.'라는 탄성이 나왔다. 

날이 미처 새기도 일어나 씻을 물을 데우는 것보다 더 귀찮은 것은 없었다. 개학 전날 겨울방학 동안 미뤘던 일기와 방학숙제를 한꺼번에 하는 것 보다 훨씬 힘들었다. 그러니 물을 데우지 않고 도랑에 가서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하고 걸레를 빨고 돌아올 때는 어깨에서 무거운 짐을 내려 놓은 사람처럼 발걸음이 가벼웠다. 봄이 나를 특별히 더 사랑해서 기대하던 선물을 한아름 안겨 준 것 같아 날아 갈 듯 기뻤다 



학교에서는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나는 고학년이 되었고 집안 일도 전보다 많이 했다. 방과 마루를 쓸고 도랑에 가서 걸레를 빨아와서 구석구석 닦아내던 것 뿐아니라 식구들이 먹을 밥과 반찬도 만들었다. 보리 쌀을 삶아서 솥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씻어 놓은 쌀을 올려서 밥을 했다. 콩나물로는 나물과 국 두 가지를 거뜬히 해내기도 했다콩나물을 다듬어 물을 붓고 소금으로 간을 맞추고 끓으면 잠시 두었다가 뚜껑을 열고 건더기를 건져 고춧가루와 깨소금 참기름을 넣고 콩나물을 무쳤다. 



오빠의 꿩 사냥과 토끼 사냥도 끝이 났다. 토끼와 꿩이 굳이 밭으로 내려오지 않아도 산에는 먹을 것이 넘쳤기 때문이다. 앞다투어 돋아난 새싹에 봄비가 질금질금 뿌려지면 농부들도 바빠졌다. 밭과 논에 거름을 내고 모를 키우기 위해 씻나락을 물에 담갔다. 비가 와서 촉촉해진 땅이 마르기 전에 씨를 뿌렸다. 마늘도 심고 쪽파도 심고 씨감자의 싹이 난 부분을 도려내어 감자도 심었다. 싹 난 부분을 도려내고 남은 부분은 국밥을 끓일 때 넣었다.

아이들도 집안 일과 들일을 가리지 않고 어른들과 함께 일했다. 오빠는 아침 밥을 먹고 아버지와 함께 들에 나가서 어른 한 사람 몫의 일을 거뜬히 했다. 일을 하면서도 오빠는 집을 떠날 생각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오빠는 엄마한테 "이모한테 편지 쓸 건데, 언제 간다고 하면 되노?"했다. 엄마는 이왕 이렇게 된 거 모내기를 끝내 놓고 가는게 어떠냐고 했다. "그까짓 농사 얼마나 된다고 그 때까지 있으라 카노?" 엄마는 그 말이 맞다고 하면서도 날짜를 쉬이 앞당기지 못했다. 아버지가 어떻게 나올 지 뻔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소에게 쟁기 질을 할 수 있도록 길을 들이려고 벼르고 있었다. 4월이 코 앞에 왔다. 겨우내 얼어 있던 땅이 완전히 녹았다고 판단한 아버지가 드디어 날을 잡았다. 소가 처음 논에서 쟁기 질을 하는 날 아침이었다. 오빠는 소가 먹을 소 죽에 특별히 공을 들였다. 평소에 소 죽 끓일 때 한 바가지를 넣던 딩기(쌀이나 보리를 찧을 때 나오는 고운 속겨)를 그 날은 두 바가지를 넣었다.   

오빠는 따뜻한 소 죽을 구유에 부어주며 소에게 말했다.

"소야 많이 먹어라. 많이 먹고 힘을 내거라, 오늘 너랑 나랑 우리 아부지랑 논에 가서 쟁기질 할 건데 우리 아버지 말 잘 들어야 한다. 너가 일을 빨리 배워야 내가 이모한테 빨리 갈 수 있으니까 너가 나를 도와 조야 해. 알겠나?"

소는 쟁기 질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딩기를 곱절이나 넣은 소죽인데도 맛나게 먹지 못했다.

"소야, 그러지 말고 싹싹 닦아 먹어라. 나도 힘 닫는 대로 너를 도와줄게."



논은 집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소를 몰고 골짜기로 난 길을 따라 한 참을 걸어가야 당도할 수 있었다. 오빠가 소 고삐를 잡아 소를 몰고 그 옆에는 아버지가 지게를 지고 걸어 갔다.

논은 세 도가리(논배미,논의 한 구역)로 나눠져 있었다. 아버지는 술을 마시지 않으면 부지런하고 일 잘하는 건장한 농부였고 소를 길들이는 데도 전문가였다아버지는 논 세 도가리 중 한 도가리만 쟁기질을 할 작정이었다. 처음부터 세 도가리는 무리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쟁기를 소에 채웠다. 오빠가 앞에서 코뚜레를 잡아 끌고 뒤에서는 아버지가 한 손으로는 쟁기를 잡고 한 손으로는 고삐를 잡아서 소가 제대로 갈 수 있도록 조종을 했다. 

소가 몇 걸음을 채 걷지도 않았는데 소가 입에서 거품을 흘렸다. 아버지가 고삐로 소의 등을 쳤다.

"아버지 소가 왜 이래요? 말을 안 듣는 거예요? 힘들어서 못 가는 거예요?"

"얄궂다. 이놈의 소가 왜 이러지?" 

셋이서 힘겹게 한 바퀴를 겨우 돌고 나서 다음 고랑으로 옮기려고 할 때였다. 

오빠가 코뚜레를 잡아 당기고 아버지가 고삐를 내려쳐도 소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쟁기를 내려 놓고 앞으로 가서 소의 상태를 보려고 하는 데 소가 그 자리에 푹 주저 앉았다. 소가 그런 식으로 한 번 주저 앉으면 일어나기 힘들다는 것을 아는 오빠는 불안하고 다급했다.

"아부지 아부지 소가 와이랍니꺼?"  

 아버지는 거품을 물고 주저앉은 소는 가망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오빠와 아버지의 예상대로 소는 그 자리에서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오빠가 소의 목을 끌어안고 아무리 울어봤자 소용이 없었다. 



면사무소에 소의 사망 신고를 했고 도축장에서 나와서 소를 도축해 갔다. 나중에 엄마는 죽은 소 값이 죽은 개 값이나 다름 없어서 면에서 쥐꼬리 만큼 손에 쥐어 주고 갔다고 말해 주었다.



동네 사람들은 오빠가 죄 없는 토끼를 잡아서 벌을 받아 소가 죽었다고 수군거렸다. 아버지는 술을 더 많이 마셨고 엄마는 원통한 마음에 자주 주먹을 쥐고 가슴을 쳤다. 

오빠는 이모에게 편지를 썼고 편지가 이모 집에 도착할 즈음에 터럭 만큼의 미련도 없이 고향을 떠났다. 엄마는 참담한 마음을 스스로 위로하듯이 소가 오빠를 빨리 도시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고 했다.



오빠는 공장에 들어가서 돈을 벌었다. 밤에는 학원에 가서 공부도 했다. 편지에는 주공야학이지만 하나도 힘들지 않다고 썼다. 오빠는 곧 이모집을 나와 자취를 시작했다. 자취방에는 연탄을 아끼려고 불을 때지 않아 겨울이 되면 물 그릇에 얼음이 언다고 했다. 그 얼음은 촌에서 윗목에 놓아 두었던 물사발에 얼었던 얼음은 유도 아니라고 했다. 오빠에게는 얼음이 얼지 않는 방에서 자는 것보다 시골에서 고생하는 가족들을 도우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했다. 그는 돈을 버는 족족 모아서 엄마에게 부쳤다. 엄마는 아버지한테 오빠가 보내주는 돈 이야기를 일절 하지 않고 차곡차곡 모았다. 모은 돈으로  제일 먼저 소를 사서 빈 마구간에 들였다. 갓 송아지 티를 벗은 소였지만 상관없었다. 달이 바뀌고 여러 번 해가 바뀌면서 밭고 사고 논도 샀다. 그리고 그리고 오빠의 소원대로 동생들이 공부를 계속 할 수 있도록 학비를 댔다.


<끝>

흰과 빨강을 담당했던 '토끼고기'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응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은신 독자님과 작가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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