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남의 일만 할거야?
직장을 다니다보면, 보통 상사가 부재중이면 혼란이 온다고 생각한다.
회사가 돌아가지 않을 것 같고, 결정할 수 없는 일이 쌓이고,
책임질 사람이 없어서 모든 게 정체될 거라고 여긴다.
그래서 대부분 상사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린다. 안전한 선택이다.
그런데 나는 다르게 배웠다. 진짜 성장은, 그 혼란 속에서 만들어진다.
회사 다니며 세 번의 기회가 있었다.
첫 번째는 동료가 갑자기 이직해서 일을 전부 떠안게 된 것이었다.
그 동료는 회사의 핵심 프로젝트를 혼자서 다 맡고 있었는데,
어느 날 "다음 주가 마지막"이라고 했다.
인수인계할 시간도, 충분히 배울 기회도 없었다.
클라이언트는 기다려주지 않았고, 마감은 코앞이었다.
그가 남긴 자료를 뒤져보고, 고객사에 직접 전화해서 상황을 파악했다.
두 번째는 선배가 한 달 교육을 가는 바람에 고객과 억지로 친해진 것이었다.
선배는 그 고객과 5년 넘게 일해온 베테랑이었다.
나는 그저 옆에서 보고만 있던 신입이었는데,
하루아침에 그 관계의 주인이 되어야 했다. 처음엔 고객도 나를 신뢰하지 않았다.
"언제 돌아오세요?" "임시방편인가요?" 같은 질문을 계속 받았다.
하지만 매일 꼼꼼하게 보고하고, 하나씩 성과를 보여주면서 인정받기 시작했다.
한 달 후 선배가 돌아왔을 때, 고객은 오히려 나와 계속 일하고 싶다고 했다.
세 번째는 팀장의 예고 없는 병가로 인해 미팅에 회사 대표로 참석한 것이었다.
그날 아침까지만 해도 나는 그 미팅에 팀장 보조로 참석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팀장이 응급실에 실려가는 바람에 갑자기 주연이 되었다.
떨리는 손으로 팀장의 발표 자료를 훑어보며 핵심 포인트를 정리했다.
모르는 건 솔직히 모른다고 했고, 대신 확실한 것들은 자신 있게 말했다.
보고는 성공적이었고, 나는 그 미팅에서 가장 직급이 어린 참여자로 남았다.
마지막으로, 해외 출장 현지에서 즉흥 임무를 받아 했던 일도 있었다.
이스탄불 출장 중이었는데, 갑자기 본사에서 연락이 왔다.
VIP가 오는 호텔 복도에 즉흥적으로 신제품 전시대를 마련하라는 지시였다.
밤새 시내를 뒤져가며 급한 대로 복도의 수족관을 개조해서 전시대를 만들었다.
저년차임에도 불구하고 중대한 임무를 수행하여 큰 칭찬을 받았다.
이 모든 순간들의 공통점이 있었다. 보고할 사람도, 가르쳐줄 사람도 없었다.
내가 판단했고, 내가 책임졌고, 내가 다 감당해야 하는 그런 종류의 일이었다.
성과도 실수도, 오롯이 내 이름으로 남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렇게 얻은 건 숫자가 아니라 감각이었다.
어떻게든 할 수 있다는 확신. 완벽하지 않아도 시작할 수 있다는 용기.
빠르게 배울 수 있다는 자신감. 이런 것들은 매뉴얼로 배울 수 없다.
오직 실전에서만 체득할 수 있는 감각이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상사가 없는 소기업으로 옮겼을 때도 겁나지 않았다.
35살, 중견기업 회장 앞에서도, 대기업 사장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았다.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해본 경험이 내 안에 단단한 뼈대를 만들어놨던 것이다.
트리플 악셀은 누가 지켜볼 때 처음 성공하는 기술이 아니다.
아무도 없는 새벽에, 홀로 링크에서 수없이 넘어지고 일어나면서,
스스로를 이겨낸 사람만이 해낼 수 있는 기술이다.
그리고 나는 그걸, 상사가 없던 순간마다 연습했다.
사실 이런 기회는 대부분에게 오지 않는다.
좋은 회사일수록 리더는 항상 자리에 있고, 시스템은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매뉴얼이 있고, 승인 절차가 있고, 체크 포인트가 있다.
안전하고 효율적이지만, 개인 성장 관점에서는 제약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그런 회사는 슈퍼 인재를 만들지 못한다.
뛰어난 시스템이 개인의 뛰어남을 가려버리는 셈이다.
그래서 나는 후배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기다리지 말고, 일부러 들어가라고.
아직 체계가 덜 잡힌 부서, 정리되지 않은 팀, 원맨쇼가 필요한 중소기업.
거기가 실전이다.
편하지 않을 수도 있고, 때로는 힘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곳에서 단련된 근육은 평생 사라지지 않는다.
큰 회사의 안정된 부서에서 10년을 보내는 것보다,
혼돈 속에서 2년을 버텨내는 경험이 때로는 더 값질 수 있다.
물론 둘 다 필요하다. 하지만 순서가 중요하다.
먼저 혼자서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기르고,
그 다음에 시스템의 힘을 빌리는 것이 맞다.
위대한 사람은 시스템 바깥에서 태어난다.
그리고 그들이 만든 새로운 길이 나중에 시스템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