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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재 미첼 MJ Mitchell Sep 06. 2023

시詩-외할머니

민재 미첼 MJ Mitchell

외할머니


민재 미첼


내가 어릴 때 돌아가신 할머니는 어린 내 눈에도 키가 작았다 접시꽃보다는 조금 크고 앵두나무보다는 한참 작았다  잠시 할머니 댁에 맡겨졌던 어느 날 나는 온종일 동네 아이들과 산으로 들로 놀러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를 잃어버렸다고 온 식구들이 혼비백산해서 찾아 나설 때 할머니는 눈물을 훔치며 콩죽부터 쑤었고 뜨거운 콩죽 단지를 머리에 이고서 손녀를 찾아 나섰다 할머니는 어둑해진 논둑에서 발견한 나를 야단치기는커녕 머리에 이고 있던 콩죽 단지를 내려 죽을 떠먹여 주었다 식었지만 콩죽은 고소했고 눈치 없이 꿀꺽꿀꺽 잘도 넘어갔다 뺨을 쓸어 주던 할머니 머리 위로 유독 밝은 별 하나가 빛나고 있었다.


빳빳하게 풀 먹인 모시 한복에 쪽진 머리를 한 할머니는 진달래 같았고 바람 부는 청보리 밭 같았다 할머니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콩떡이었고 말랑말랑한 곶감이었고 짭조름한 자반고등어 알록달록한 잡채였다 장독대에 가지런한 항아리였고 뒤뜰에 핀 푸른 수국이었다 꽃가루가 날리는 호두나무였고 호두나무가 만든 그늘, 작고 단단한 호두, 그리고 흰 머릿수건이었다. 


온 식구가 껍질을 깨고 야금야금 호두 속을 파 먹는 동안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먼 길을 빙 돌아 진달래로 청보리 밭으로 수국으로 호두나무로 돌아가시고 다시는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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