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미안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온종일 찝찝할 때가 있다.
상대는 사과를 하는데, 듣고 있자면 어느새 그 사람이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하게 되고, 내가 너무 예민했던 건 아닌지 되짚게 되는 순간들. 상처를 받은 쪽은 나인데, 대화를 마치고 나면 내가 너무 과잉반응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한동안 그런 사과가 성의 있는 사과라고 생각했다. 자세한 설명이 따르는 사과가 진정한 사과라고 믿었던 것이다.
한참이 지나서야 알게 됐다.
설명이 긴 사과는 면죄부를 얻기 위한 노력일 뿐이라는 것을.
사과문인데 자서전이 됐다
몇 년 전 친한 친구와 크게 다툰 적이 있다.
친구가 무심코 내뱉은 말에 상처를 받은 나는 친구에게 솔직한 심경을 전했고, 친구는 미안하다고 했다.
괜찮았다. 미안하다는 말 뒤에 부연설명이 붙기 전까지는.
“미안한데, 사실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었거든.”
“미안해. 근데 그때 나도 많이 힘든 상황이었어.”
“미안한데, 너도 예전에 이런 말 한 적 있잖아.”
미안하다는 말 뒤에 따라붙는 군더더기들은 조금씩 미안함을 희석시켰다. 나는 어느 순간 내가 왜 상처받았는지를 되짚어보게 됐다. 혹시 내가 너무 예민했나. 상황을 내가 잘못 받아들인 건 아닐까. 힘든 상황에 놓인 친구를 내가 너무 몰아붙인 건 아닐까.
사과를 받은 사람은 나인데, 반성도 내가 하고 있었다.
미안한데
직장 선배 중에는 “미안한데”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 있었다.
회의 자료를 하루 전날 밤에 통째로 바꿔달라고 해놓고도, 약속 시간에 한 시간씩 늦고도, 내가 며칠 동안 준비한 발표를 당일 아침에 자기가 하겠다고 가져가면서도 말이다.
“미안한데, 이게 더 중요한 일이라서.”
“미안한데,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미안한데, 네가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맡긴 거야.”
그의 마지막 문장은 늘 훌륭했다.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을 옹졸한 사람으로 만들었으니까.
“미안한데”는 사과처럼 생긴 반박이었다.
앞에 붙은 미안함은 장식이고, 뒤에 오는 말이 늘 본론이었다.
변명의 길이와 반성의 깊이는 비례하지 않는다
전 직장 동료에게 사과 문자를 받은 적이 있었다.
길었다. 스크롤을 내려도 내려도 끝이 안 났다. 이렇게 장문의 문자를 보낸 걸 보면 진심이구나 싶었다.
그런데, 읽다 보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길고 긴 문자 안에 “내가 잘못했다”는 문장이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미안하다는 말은 있었다. 그때 자신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도 있었다. 나를 걱정했다는 말도 있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미안함과 반성은 다른 것이었다. 미안함은 감정이고, 반성은 인식이다. 미안한 감정은 있었을지 몰라도, 무엇을 잘못했는지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당연히 사과가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핵심을 피해서 말하려다 보면 말이 길어지는 법이니까.
사과 이후가 진짜다
대학 동기 중에는 사과를 리셋 버튼처럼 쓰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거듭 사과했다. 진심이 담긴 것처럼 보였다. 분위기도 풀렸다. 그러나 두 달쯤 지나면 비슷한 일이 반복됐다. 그녀는 또 사과했고, 내 기분은 또 풀렸다. 그리고 상황은 또 반복됐다.
그녀는 사과가 상황을 리셋하는 버튼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더 이상 길이를 신뢰하지 않는다.
진짜 사과는 대체로 짧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고, 그것이 왜 잘못이었는지 인정하고, 반복하지 않으면 된다.
긴 사과 안에는 자기 변호가 숨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미안해”로 끝나는 사과와 “미안한데”로 이어지는 사과는 전혀 다르다.
나를 오래 힘들게 한 것은 상대방의 잘못 그 자체보다, 잘못 뒤에 따라붙는 긴 설명이었다. 긴 설명을 들을 때마다 자꾸 나 자신을 의심하게 되었으니까. 내가 너무 크게 받아들인 건 아닐까. 내가 너무 오래 기억하는 건 아닐까. 내가 너무 예민한 건 아닐까.
그들 곁에서는 늘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