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이와 할머니와 나

영안이 트인 아이

by 홍반의 서재


프롤로그 (Prolog)


누구나 어렸을 적의 기억은 그저 아름답고 소중하게만 간직하고픈 추억일 것이다. 빛바래고 낡은 두꺼운 사진첩의 사진 한 장 한 장처럼 말이다.


잠시 너 댓살에서 대 여섯 살의 나로 소환해서 추억팔이를 해 보자면, 짧디 짧은 다리로 뛰어놀다가 철퍼덕 넘어져서 서럽게 울고 있으면 바로 옆에서 안쓰럽다는 듯이 다리를 핥으며 위로해 주던 마당의 파수꾼 바둑이, 날마다 털과 분뇨가 살짝 어쩔 땐 과하게 묻어있는 알을 낳아주며 아주 자랑스럽게 꼬끼오를 연발하던 암탉들, 그리고 여러 마리의 암탉을 거느리며 제왕처럼 군림하던 마당의 무법자, 차라리 최강 빌런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딱 맞는 얄미운 밉상의 그놈 수탉, 마지막으로 마당 중간에 터줏대감처럼 자리 잡은 새하얀, 혹은 분홍과 보라색의 중간 정도로 흐드러지게 핀 예쁜 라일락꽃들의 향연들.


아마도 필자처럼 이런 어렸을 적의 정겹고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고 계신 분들이 꽤나 많으시리라 감히 짐작해 본다.


분주하고 정신없는 아침이 지나고 식구들이 다 빠져나간 거실에서 여유롭게 음악을 들으며 커피 한잔을 내려 마시고 있노라면, 어느 집인지는 몰라도 산들바람을 타고 실려 오는 섬유유연제 향기가 코끝을 정겹게 훑고 지나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럴 때면 여지없이 어렸을 적 집 앞마당에 안방마님처럼 아름드리 자태를 드리우고 있던 그 라일락 나무의 향기가 지금도 코끝에서 은은하게 느껴지는 것만 같아 어렸을 적의 나로 소환되곤 한다. 아마도 나란 사람에게 있어서 추억이라는 놈은 대체로 후각을 매개체로 해서 오는 것 같다.


지금도 가을바람의 청량한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몇십 년 전에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너무나 그리워 밤잠이 설쳐진다.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외할머니에 대해서 나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드물지 않을까? 물론 그렇지 않은 분들에게는 죄송하지만, 나에게만큼은 외할머니라는 존재 자체는 부모 이상의 특별하고도 정겨운 존재였음에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만큼 부모에게서는 온전히 받을 수 없는 아낌없는 사랑을 원 없이 받았던 어린 시절이었다.


사실 필자는 어려서부터 일반인들하고는 살짝 결이 다른 체질을 타고나서 인지는 몰라도 보지 말아야 할 것들을 잔뜩 보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런 연유로 어렸을 적 기억을 살짝 거슬러 올라가 보자면 그다지 달갑지 않고 기괴한 추억들이 새빨간 꽃송이처럼 각인되어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나중에 하나씩 둘씩 읽어 보시면 아시겠지만 필자의 추억은 일반인들의 정겨운 추억들하고는 조금 많이 차이가 난다. 그저 직접 겪어보시지 않은 다름에 대해 이상하거나 괴이한 것 혹은 가벼운 농담 정도로 치부해 버리시지 않으셨으면 하고 바란다.


어려서 우연치 않은 계기로 인해 영안이 트인 후 영적인 것을 보고 느꼈던 일련의 기억들을 끄집어내서 언젠가 한 번쯤은 글이라는 형식으로 녹여 보고 싶었다.


앞으로 며칠 후면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기일이 다가온다. 돌아가시기 전에 늘 당신은 죽으면 하얀 새가 돼서 이곳저곳 훨훨 날아다니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곤 했는데...!


돌아가신 지 정확히 십 년이 되던 기일 날, 하얀 새 한 마리가 그녀의 산소 주위를 빙빙 돌다가 필자를 발견하고는 잠시 잠깐 비석 위로 살짝 내려와 앉아 있다가, 다시 활짝 날개를 펴고 푸르디푸른 가을 하늘 위로 날아오르더니 이내 사라졌다. 아마도 그녀의 바람대로 한 마리 새가 되신 모양이다.


늘 대문을 두드리며 찬밥이라도 적선해 달라는 거지들에게는 인심 좋게 한상을 내어 주시면서 따뜻한 국과 밥을 대접해 주시던 분, 돈이 없어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학생들에게는 장학금을 선뜻 건네주며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던 분,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며 불철주야 한복을 지으며 모은 돈을 선뜻 내어주시던 분...!


언제나 남들과 결이 많이 다른 내게 “너는 이 세상에서 가장 특별하고 소중한 아이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사랑하는 나의 강아지.”라고 말씀하시며 활짝 웃으시던 그분.


"이 청량한 가을...! 저를 바라보며 활짝 웃어주시던 당신의 모습이 눈물 나게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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