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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essed To Bless Oct 30. 2022

맘투맘 1

엄마는 실업자

어제부터 하루 종일 잔뜩 지푸 리더니 아니나 다를까 오늘은 비가 내린다. 아침에 막내아들 온라인 수업 봐주러 곁에 앉았다가 문득 창문 너머로 운치 있게 흔들리는 나뭇가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지나가던 가을바람이 잠시만이라도 나를 좀 바라봐 달라고 손짓하는 것만 같았다. 코로나로 인해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어도 왠지 더 분주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하루지만 가을의 속삼임만큼은 특별하게 신선한 오늘이었다. 못 이기는 척 뒤뜰로 나가 선득하게 스쳐오는 바람에 나를 맡겨놓고 보니 어느새 찬란하게 물들어버린 가을색에 넋을 놓아버려서 한참을 서있어야 했다.  


나는 네 아이의 엄마다. 


단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았던 타이틀이다. 대단한 포부가 있었던 젊은 시절은 아니었지만 한 때였어도 나름 멋진 미래의 모습을 그려보았던 적은 있었다. 이제 이쯤 되면 인생이 그리 마음먹은 대로, 계획한 대로 흘러가 주지 않는다는 사실 쯤은 알아버린 나이다.   


고3 때 이민 와서 지금까지 수월치만은 않았던 시간들을 지나오면서 어느새 수북하게 쌓인 낙엽만큼의 세월 동안 내 삶에도 모아진 무엇이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게 되는 요즘이다.   


얼마 전 동생네 아이들을 우리 집으로 데려와 며칠 같이 지내게 되었다. 아기 때부터 봐왔던 조카들이 이제는 부쩍 키가 커져서 감히(?!) 고모를 내려다본다. 최근 동생이 겪고 있는 어려운 일 때문에 뭔가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 동생 주위를 챙겨보려고 하지만 그저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만 볼 뿐이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고모인 조카들이었는데 애정 넣은 잔소리나 협박을 담은 날카로운 내 눈빛도 이제는 씨알도 안 먹힐 만큼 아이들은 훌쩍 컸다. 안 그래도 수류탄 같은 틴에이저 조카를 건드릴 생각은 없지만 며칠 내내 동생과 싸우는 큰 녀석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다시 2시간은 넘게 운전하고 집에 데려다주러 길을 나서는데 차에 타자마자 귓구녕에다 이어폰을 구겨 박는 모습에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지로 눌러야 했다.  


뒤에 앉은 율이는 우리 막내 연희와 신나게 놀았던 지난 며칠이 곤했던지 벌써 잠이 들었다. 앞자리에 나란히 앉은 조카 훈이와 나는 그렇게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어느 누구도 차 안에 침묵을 밀어낼 노력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처럼. 그때였다. 작은 딸이 잘 가고 있느냐고 조카에게 전화를 하는 바람에  우리 사이의 썰렁함이 어색하게 깨어졌다. 변성기가 와서 더 투박해진 말투로 훈이가 불쑥 물었다.  


"고모, Do you have a job?”

(고모, 고모는 일해요?)


속으로는'이 녀석이  첫마디부터 염장을 지르는구나. 대뜸 한다는 질문이.. 이걸 콱!' 했지만,  

그러나 나는 어른!, 성숙한 어른이 삶의 목표 중 하나가 아닌가!   


"Of course I have a job~~!”

(물론 일하지!) 


"Really? What is your job then?”

(정말요? 직업이 뭔데요?) 


(열등감 건드려졌을 때면 급속하게 속으로 계속 말풍선 만드는 스타일)

'이걸 죽여 살려~ 으이그!!' 


"Didn’t you know? I am a full time mom! Mom! My job is a mom!”

(너 그것도 몰랐어? 고모 엄마잖어. 그것도 풀타임 엄마~! 고모는 엄마가 직업이야!) 

 

운전 중이라 앞을 보고 있어서 그 순간 조카의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정적을 타고 들려오는 조카의 마음의 소리가 적어도 내게는 이렇게 들렸다.  


"에이~~(야유를 담아) 그게 무슨 직업이야~  시시하게 남들 다~하는 거, 우리 엄마도 엄만데, 밖에서 일하고 돈도 잘 벌어오는데~" 


나도 마음의 소리로 되받아쳐서 윽박질러줬다.  


"달라!!!!" 


성숙한 어른되기는 물 건너간 걸로. ㅜㅠ   


지난 25년을 아내와 엄마로 살아오는 동안 이따금씩 '나도 직장을 구해볼까?' 고민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아이들은 커가고 경제적인 필요도 만만치 않아서였다. 그때마다 남편에게 그럴 의향을 언급했고, 진지하게 함께 고민하며 내게 해 준 말은,  


"당신이 정말 원하고 또 자신을 위한 계발로 일을 시작해 보려는 것은 찬성하지만 재정적인 이유 때문만으로 직장을 갖는 것은 생각해 봤으면 해요."였다. 그래서 난 그때마다 생각했고, 늘 "집에 있는" 엄마를 택했다. 


가끔 아이들이 보라고 추천해 주는 책, 드라마나 영상들이 있다. 한가롭게 앉아 그럴 시간이 없기도 해서 가족 휴가나 방학 때 날 잡아서 그것도 대충 몰아서 보기도 한다. 큰 딸이 재미있다며 추천해 준 한국 드라마 중에 줄거리 영상을 보다가 눈물을 흘린 장면이 있었다. 처음엔 젊은애들 취향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같은 여자가 봐도 사랑스럽고 짠한 캐릭터였던 드라마 쌈 마이웨이에서의 설희가 나오는 씬에 중년의 내가 매료가 되었다.  


6년의 긴 시간 동안  성실하고 소박한 교재로 결혼을 향해 가는 중이었던 주만이와 설희였지만 그들의 사내 연애 사실을 몰랐던 당돌한 여자 신입사원이 남자 친구 주만이에게 과감하게 데시를 하는 바람에 그들의 관계는 위기를 맞는다.  결국은 치명적인 오해로 아파하는 설희가 베프인 애라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나눈 대화는 이랬다.  


설희: "내 꿈이 뭔데..? 나 꿈 있어."

“진작 있었어” 

니들 삐까번쩍하게 그럴 때

나도 조용히 내 꿈, 꾸고 있었다구. 


애라: 그럼 그거 하면 되겠네. 네가 하고 싶은 꿈. 


설희: “엄마”

“내 꿈은..”

“엄마야” 


애라: “뭐?” 


설희: “좋은 엄마, 좋은 아내가 되는 게 내 꿈이라고. “ 


애라" “설아…” 


설희: “엄마 꿈으로 안 쳐줘?”

“세상 사람들은 다 자기 계발해야 돼?”

"니들 다 잘 났고 자기 위해 사는데 나 하나 정도는 그냥 내 식구들 위해서 살아도 되는 거잖아”

“그거 니들보다 하나도 못난 거 없잖아”   



라고 말했던 설희는 그녀의 남자 친구 주만이가 그냥 남자 친구가 아니라 자신의 세상이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쩌면 21세기 여성들에게 설희가 돌 맞아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내가 다 지켜주고 싶었다.  


나는 설희처럼 엄마가 꿈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어쩌다 보니(?!) 이렇게 엄마로 살고 있다. 그리고 조카 훈이의 마음의 소리일지도 모를 평범하고 특별하지 않는 "엄마만 하는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을 때마다 종종 스스로를 마음으로 홀대할 때도 있었다. 그러다가도 설희의 생각처럼 '나 하나 정도는 그냥 내 식구들 위해서 살아도 되지 않을까? 그게 못난 건 아니잖아' 라며 굳이 마음으로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나도 좋은 엄마가 돼보고 싶어 나름 성실하게 노력해 보지만 그 마음먹은 크기보다 나쁜 엄마라는 무게가 나를 짓누를 때가 더 많다.  


몇 해 전 작은 딸 송희가 아직 중학생이었을 때 뜬금없이 내게 물었다.


"엄마는 내가 일했으면 좋겠어요, 아님 엄마처럼 full-time mom이었으면 좋겠어요?"


무엇이든 앞서 계획하는 걸 좋아하고, 먼저 예상하고 준비할 때 안정감을 느끼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아이라 송희의 질문이 이해가 되었다. 나는 그런 송희의 고민에 가볍게 대답해 주고 싶지는 않았다.


"글쎄.... 그건 정말 중요한 질문이다. 먼저는 네 배우자와 지혜롭게 잘 의논해 보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가정을 이루는 것은 부부가 함께 일구어가는 거니까 말이야. 그때의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고 결정해야 할 것 같아. 그렇지만 엄마는 네가 가정에 남든, 아님 송희가 가슴 뛰는 일을 찾게 되어 직장을 선택하든 잘해나갈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은 있어. 그리고 고민하고 신중히 결정했다 하더라도 어려움도 따르고 종종 후회도 할 수 하지. 그러니 일단 숙고해서 마음을 정했으면 최선을 다해보는 거야. 모든 선택은 반드시 책임이 따르거든. 그리고,.. 둘 다 어렵지만 둘 다 값진 거야 송희야. 일하는 엄마도, 집에 있는 엄마도"라는 말로 격려해 주었다.


오랜 시간 동안 여성에게만 주어진 어려운 숙제이다. 오롯이 여성의 입장이 될 수 없는 세상의 판단이 더 이상 엄마들의 마음에 뭇매를 휘두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게 직장으로 향하는 엄마든, 집에 남기로 한 엄마 든 말이다. 왜냐하면 양쪽 다 어려운 선택이자 의미 있는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다만 각자의 선택이 잃지 않아도 될 것들을 분별해 내고, 잃어서는 안 될 것들을 지켜내는 슬기로운 결정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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