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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essed To Bless Oct 30. 2022

맘투맘 2

스물아홉, 쉰둘, 그리고 여든셋

내 생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몇 주 전부터 남편과 아이들이 내게 갖고 싶은 거 없냐고 재차 물어왔다. 다른 때 같았으면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비싼데 쓸데없이 꽃 사고 선물 사고 식당에 예약하고 그러지 말라며 손사래를 쳤을 텐데 이번에는 달라지기로 했다. 좀 생각해 볼 테니 기다려달라고 했으니까 말이다. 그러고 나서 곰곰이 내가 좋아하는 거, 내가 원하는 거,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게 뭔지를 생각하기 시작했는데.... 너무 당황스러울 만큼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멘붕이 왔다.


부쩍 무릎을 펴지 못하시고 일어났다 앉았다 하시는데도 너무 아파하시는 친정엄마가 걱정이 돼서 정형외과에 모시러 가기 위해 얼마 전 친정에 들렀을 때였다. 워낙 엄살이 없으셔서 아프다는 소리도 안 하시고 그렇게 병을 키워 결국은 오른팔도 못 쓰시게 된 게 여간 속상한 게 아니었다. 이제는 무릎까지 불편하신 엄마가 그런데도 아빠만 챙기시는 게 너무 화가 났다. 점심을 먹으러 한국식당에서 주문을 하는데 엄마가 그러신다.


"아빠, 며칠 전부터 갈비탕 드시고 싶다고 하셨어. 그거 시켜드려."


내가 물었다.


"그럼 엄마는? 엄마는 뭐 드시고 싶은데?"

"난 별생각 없어. 그렇게 배고프지 않아~"

"엄마! 생각해 봐! 점심은 드셔야지. 엄마도 먹고 싶고 좋아하는 게 있을 거 아니야!"


(또 급 후회했다. '으이그, 그걸 좀 부드럽게 말해도 됐을 텐데...')


오른팔이 아프셔서 더 쪼그라져 보이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니 마음이 짠해왔다.  뭘 골라야 할지 한참을 망설이고 계신 모습을 보니 답답해지기까지 했다.


"엄마, 칼국수 어때? 엄마 국수 좋아하시잖아."


결국은 해물칼국수를 주문했고 엄마가 좋아하시는 탕수육도 시켜 아빠와 함께 나눠먹었다. 배가 고프시지 않다시던 엄마는 오랜만에 딸이랑 같이 먹어서 더 맛있다시며 말끔히 접시를 비우셨다. 그 모습을 보니 조금 전 엄마에게 짜증스럽게 말했던 게 너무 죄송했다. 오른쪽 어깨와 팔을 쓰시지 못하신 지 벌써 여러 해, 큰 수술을 여러 차례 받으셔서 그러신 지 이번에는 한사코 수술을 거부하신다. 주사도, 물리치료도, 한약도 효과를 크게 보지 못해서 정말 걱정이다.


당신을 위해서 사는 것보다 남편과 자식을 위해서만 살아오시는 데에만 익숙해지신 여든 해를 넘긴 그녀의 삶에 남은 건 망가져버린 연약한 육신 한 조각. 그런데도 도무지 당신을 먼저 챙기시질 못하신다.

 

드라마 "쌈 마이웨이"에서 딸 설희의 세상인 주만이와 헤어졌다고 듣게 된 그녀의 어머니가 가던 걸음을 멈추고 설희의 손등을 쓸어주며 말했다.   


인쟈…(딸의 손을 어루만지며)

우리 주만이 찾아 싸치 말고 나는 뭐 좋아햐.. 나는 뭐를 잘 먹어~ 나는, 어 나는(목이 메이며).... 좀 그러고 살어. 니 인생에선 니가 상전이여~......울지말고 밥 잘 먹고.” 


갱년기 감정 변화가 아무리 격해도 그렇지, 그 장면에서 얼마나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눈물이 쏟아지던지. 감정이입이 돼도 너무 되는 거다. 그 순간 우리 엄마가 나에게 해주시는 말처럼 들렸다. (사람의 마음을 만지는 데는 역시 드라마가 최고다! ^^)  아마도 의 손등을 안쓰러워서 어쩔 줄 몰라하며 쓰다듬어 주던  화면을 가득 채운 그 어머니의 손길이 내 갱년기 감성을 매만져 주신건지도 모르겠다.


생일을 며칠 앞두고 드디어(!?) 내가 원하는 생일선물을 가족에게 말했다. 바로  혼자만 가는 2박 3일간의 여행이었다. 그렇지만  목적지는 며칠 더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좋아하는 거 찾는데 무지하게 시간 오래 걸리는 나, 친정엄마에게 뭐라고 할 건 아닌 듯싶다)


이번 여행 제안에 남편도 아이들도 좀 놀라는 눈치였다. 그러나 곧 내 생각을 존중해 주었다. 남편은 주변 여자 동료들에게 물어봤었는지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2시간 근경의 아름다운 Bed and Breakfast 제안했지만 내가 가고 싶은 곳은, 내가 보고 싶은 사람들이 많은 보스턴으로 정했고, 남편은 바로 호텔을 예약해 주었다. 원래는 금요일 아침에 막내를 학교에 보내 놓고 출발할 생각이었는데 남편이 이왕 가는 거 좀 더 여유 있게 다녀오라며 수요일부터 방을 잡아주었다. 엄마 생일을 함께 보낼 수 없어서 못내 서운해하는 아이들에겐 미안했지만 눈 딱 감고 밀고 나가기로 했다.

 

보스턴에는 지인들도 있어 말만 하면 묵을 곳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겠지만 이번 여행은 오롯이 나만을 위한 공간을 가지고 싶어 비용이 부담되긴 했어도 호텔에 묵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정하고나니 왠지 설레었다. 남편에게도, 아이들에게도 고마웠다.  


셋째 송희가 태어나기 3개월 전에 구입해서 열여섯 해가 넘도록 우리 가족과 동고동락 해준 나이 든 밴을 끌고 6시간가량을 달렸다. 보통은  여섯 식구가 꽉 차서 언제나 시끌벅적 정신없는 차 안이였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나 혼자다. 내가 좋아하는 주전부리를 옆에 두고, 내가 좋아하는 커피를 마시고, 내가 좋아하는 선곡들이 차 안에 가득 흘렀다. 큰소리로 따라 불렀다. 행복했다. 


호텔에 도착한 건 저녁 6시, 오랜 인연으로 나에게는 참 소중한  멘토이신 글로리아 사모님을 만났다. 저녁도 마다한 채 한참을 이야기하고 카페가 문을 닫고 난 후 밤늦은 시각까지도 다시 우리 밴안에서 그렇게 웃고 울며 이야기 나누기를  몇 시간... 행복했다. 


늦은 시각, 호텔 방으로 돌아왔다. 혼자서.


먼저 잔잔한 음악을 틀어놓고 세수를 한 뒤 전화기를 확인해 보니 가족과 지인들이 보낸 문자들이 가득히 쌓여있다. 다들 나의 스케줄을 물어봐준다. 내일 이곳에서 만날 사람들 생각에,... 행복하다. 


정갈한 호텔 방안에 나 혼자만 있는 게 너무 낯설어서 잠시 멍을 때렸다. 가져온 책도 뒤적거려 보았다. 그러다가 다시 멍을 때렸다. 침대 위에서 아이처럼 뒹굴어 보기도 했다. 너무 낯선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횡설수설하고 있는 마음을 차분히 껴안는다. 식구들을 챙기지 않아도 되고, 빨래를 안 해도 되고, 저녁 식사 메뉴와 도시락 걱정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 적어도 앞으로 5일간은. 행복하다.


모임을 통해 알게 된 여러 엄마들에게 소풍에 함께 가자고 이메일로 번개 초대를 했다. 내가 좋아하는 Rhode Island 주에 있는 Colt State Park를 가고 싶었다. 워낙 막판이었고 가족들과 함께해야 하는 주말이라 모범주부인 그녀들에게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어도 핑계 삼아 그들이 바람을 쐬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혹 아무도 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혼자라도 가 볼 생각이었다.  나처럼 불량주부(?!)  한 두 명이 모였다. 사정상 공원으로 가지는 않았지만 엄마 셋이 말해 주지도 않은 내 생일을 챙겨 케이크를 들고 호텔로 찾아왔다. 초를 켜고 노래를 불러주고 한참을 호텔방에서 함께 수다했다. 감사했다. 그리고 행복했다.  


꿈같은 4박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기 전, 내일이 생일인 큰 딸아이를 위해 보스턴에 살 때 우리 가족이 좋아했던 유럽풍 제과점에 들렀다. 달콤하고 싱그런 딸기 장식이 우리 규희처럼 사랑스러운 초콜릿 케이크를 샀다. 정말 행복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내가 가고 싶었던 공원을 혼자 찾았다. 탁 트인 바다와 아름다운 주위 경관이 내가 기대했던 대로 너무 평화로워 보였다. 가져온 피크닉 이불을 펼치고 수첩을 꺼내어 몇 자 끄적거려 보았다. 그리곤 오다가 슈퍼에서 사 온 플레인 그릭 요거트와 사과를 먹으며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해안길을 따라 여유로운 혼자만의 산책을 했다. 잠깐 멈추어 서서는 푸르른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며 많이 많이 그리고 마아니~ 감사하다고 소리 내서 말해보았다. 행복했다.


내가 뭘 좋아하고, 내가 뭘  먹고 싶고, 나는, 나는.... 좀 그러고 살기로 했다. 내 인생에서 상전이 돼도 오늘은 누가 뭐라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열심히 살아온 스믈 아홉 엄마의 삶에 그 정도 상은 받아도 되는 거라고 쉰둘의 엄마가 여든셋의 엄마에게 손등을 쓸어주며 따듯하게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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