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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국현 Feb 11. 2023

불안, 걱정의 심연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는 법 (하)

불안은 감정이다. 불안은 생물학적 현상이며 미래의 위험을 탐지하는 생체 레이다이다. 불안은 쓸모없어 보이지만 진화의 과정에서 퇴출되지 않은 이유는 어쨌든 우리 유전자 증식에 유리한 점이 있기 때문이지. 척박했던 원시 시대에 우리 선조들이 살아남았던 이유 중에 하나는 불안, 분노, 두려움 같은 즉흥적인 감정의 도움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포식자가 우글대는 원시 시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옛날보다 많은, 그리고 점점 많은 불안에 시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뇌가 문명의 속도에 맞춰 진화하지 못한 이유도 있겠지만, 너무 빠른 문명의 속도가 우리에게 많은 불안이 생기게 하였다. 어쩌면 현대의 대부분의 불안은 생물학적인 특성을 넘어선 문명의 부산물이라 할 수 있겠다. 오늘은 개인의 불안이 아닌 사회의 불안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식물을 제외한 모든 생명들은 살기 위해 에너지를 외부로부터 가져와야 해. 초식 동물은 식물을 뜯어먹어야 하며 육식 동물은 초식 동물의 살을 파먹어야 한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고통이 필요한 것이지. 어쩌면 이것이 모든 비극의 시작이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 이야.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고 경제적 자원은 유한하니 이는 마치 의자놀이와 다를 바가 없다. 내가 치열한 경쟁 끝에 한 의자를 차지하면 누군가는 낙오의 고통을 겪게 되지. 마르크스는 자본가의 이윤은 노동자의 시간을 착취함으로써 발생된다고 주장했다. 


현대 자본주의의 기본 핵심은 소유이다. 자유롭게 사유 재산을 소유할 수 있는 체제가 자본주의이다. 그리고 그 자유를 국가가 통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신자유주의의 기본 이념이지. 하지만 만인에게 평등하게 주어지지 않은 자유는 강자만 누릴 수 있는 편협한 자유 밖에 될 수 없어. 자본가와 노동자가 힘이 같을 수 없기 때문이지. 마이크 타이슨과 일반인이 똑같은 글러브를 끼었다고 공평한 경기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말이야. 나의 의자를 차지하는 과정에서 (크던 작던, 직접적이던 간접적이던) 폭력이 발생되고 그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감정들이 불안이다.


사회와 불안의 관계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 보겠다. 인간이 상상하는 지옥의 모습에는 계급이 존재한다. 지옥 최고의 권력자로서 그리스 신화에는 하데스가 있고 불교에서는 염라대왕이 있어. 그 밑으로 중간 관리자(?)들이 죄인들에게 벌을 내리고 관리한다. 단테의 <신곡>에는 지옥이 9단계로 이루어진 것으로 묘사되고 있어. 반면에 천국의 이미지에는 계급이 없다. 사자와 어린양이 같이 뛰노는 이미지가 천국의 이미지이다. 천국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그럼 현대 사회는 계급이 있는 지옥과 비슷한 모습일까? 아니면 평등한 천국의 이미지와 가까울까?  


현대 사회는 표면상 평등해 보여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극심한 계급사회라 할 수 있어. 과거에는 왕, 귀족, 평민, 천민으로 비교적(?) 단순하게 나뉘었지만, 현재는 소득 수준으로 미세하게 계급이 나뉘어 있지. 공식적으로 계급이 존재하지 않기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귀족이고 평민인지 정해지지 않아. 그래서 오히려 학교에서 성적으로 1등부터 꼴찌까지 줄을 세우듯이 결국 소득 수준에 따라 쭉 줄을 세운 형국이 되고 말지. 또 학교처럼 성적표가 없다 보니 정확히 내가 어느 수준인지 알 수가 없어. 그래서 본인의 소득 수준을 과장하게 위해 과도한 소비로써 본인을 표현한다.


위계 불안에서 비롯한 위계 경쟁은 제로섬게임이다. 누군가의 위계가 올라가면 누군가의 위계는 내려가는, 위계 경쟁은 결코 끝나지 않는 잔인한 경쟁이야. 그러나 위계 불안이 심각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너무나 불안한 나머지 위계 경쟁을 멈추지 못한다. 인도의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은 “악마는 꼴찌부터 잡아먹는다”라고 말했어. 이 사회는 악마에게 잡아 먹히지 않기 위해 보다 높은 사다리로 오르려는 각축장이 되었지. 꼴찌가 되기 않기 위해 무한한 경쟁을 하는 사회 구조는 끝없는 불안을 유발한다. 그리고 현대 사회와 같은 고도로 연결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두의 불안이 서로 사슬처럼 엮여 있다.


20여 년 전에 상영된 영화 <복수는 나의 것>을 잠시 소개해 보겠다. 잔혹한 내용이 많아 줄거리만 간략하게 이야기할게.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는 류는 착하고 성실한 청년이다. 하나뿐인 누나는 그의 유일한 가족이자 그의 전부였다. 하지만 누나는 신부전을 앓고 있었고 그런 누나를 부양하기 위해 류는 미대 진학도 포기하고 공장에서 하루하루 힘들게 일한다. 아픈 누나를 위해 자기의 신장을 이식해 주려고 하지만 혈액형이 맞지 않아 수술도 할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류는 직장에서 해고를 당한다. 퇴직금으로 받은 천만 원으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던 류는 그만 잘못된 선택을 하고 만다. 장기밀매업자를 만나 자기의 전 재산인 천만 원으로 누나의 신장을 구해 보려 하지만 오히려 밀매업자에게 속아 돈과 자신의 신장마저 빼앗기게 된다. 3주 후 기증자가 나타났지만 돈을 빼앗긴 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런 류에게 여자친구 영미가 위험한 제안을 한다. 유괴를 하는 것이었다. 류는 극구 반대했지만 영미는 수술비에 필요한 2,600만 원만 받아내고 바로 풀어줄 거라고 류를 설득한다. 류는 누나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자 수술비만 마련할 생각으로 동진의 딸 유선을 납치한다. 유선을 납치한 류는 유선과 잘 놀아주고 보살펴 준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류의 누나는 더 이상 동생의 짐이 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스스로 생을 마감하게 되고 유선도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게 된다. 이혼 후 혼자서 딸을 극진하게 키웠던 동진은 자신의 전부인 딸을 잃게 되자 처절한 복수를 다짐한다. 백방의 노력 끝에 류와 영미를 찾은 동진은 개인의 복수를 실현하고 만다. 하지만 동진도 영미가 가입한 단체에 의해 결국 자신도 복수를 당하게 된다. 


류는 가난한 자신의 처지에서 누나를 살려보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본의 아니게 동진과 유선에게 큰 고통을 안겼고, 동진은 그 고통을 앙갚음하기 위해 다시 고통을 되갚아 주었어. 하지만 그도 결국은 고통을 돌려받게 되고 말지. 이 영화는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기고 복수만이 나의 것이 되어 버린 착한 소시민이 겪을 수밖에 없었던 슬픈 이야기야. 20년이 지난 영화이지만 아직도 그 여운이 남아 있구나. 의자놀이에서 나의 의자를 차지하지 못하면 이 이야기는 영화에만 나오는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은 서로 상처를 입히고 상처를 받는다. 고통도 메아리가 된다. 나와 내 가족이 꼴찌가 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다 보면 본의 아니게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고 또 누군가에게 상처받는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도 결국 누군가에게 또 상처를 받은 사람이야. 불안의 근원에는 항상 타인이 있기 마련이지. 그래서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말했는지도 모른다. 


기원전 6세기 샤카족의 왕자 고타마 싯타르타는 스물아홉 되던 때 궁 밖을 나가 처음 인간의 생로병사를 보고 큰 충격을 받게 된다. 그 개인적인 사건을 겪은 후 싯타르타는 인간의 생로병사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출가를 결심하고 오랜 고행 끝에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리고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사상을 전파했다. 그의 주된 사상은 사후 불교로 발전하였고 그 핵심 사상이 바로 ‘자비’이다. 자비는 인도 고어인 산스크리트어 Mettā(慈)와 karun. ā(悲)가 합쳐져서 이루어진 단어이다. 자(慈) 자로 번역된 Mettā 와 산스크리트어 Maitri는 모두 Mitra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는데, 이 미트라는 ‘친구’ 또는 ‘가까운 자’라는 뜻이다. 비(悲) 자로 번역된 카루나(karun. ā)는 자신이나 타인에 대한 ‘연민의 정’을 의미한다. 자도 비도 비슷한 뜻인 것 같으나 그 차이를 말하자면 자는 ‘남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與樂)’이고, 비는 ‘자신과 남의 괴로움을 없애주는 것(離苦)’이야. 즉, 자비는 상대방의 불행이나 고통을 아프게 느끼는 감정이지.  그래서 그 고통을 어떻게든 완화시키려 하는 것, 그것이 ‘자비’이다.


뜬금없이 자비를 이야기해서 의아하겠지만 불안을 잠재우는 최고의 방법이 바로 자비이다. 자비만이 불안의 총량을 줄일 수 있어.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것이 불안을 제거하는 근본적인 처방이라고 할 수 있지. 모든 시작은 타자의 고통에 민감한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자비란 나의 고통이든 타인의 고통이든, 고통을 완화시키려는 감정이자 의지이기 때문이야. 고통을 느끼는 것, 그래서 그 고통을 어떻게든 완화시키려 하는 것, 그것이 자비이다.  


자비의 근간은 공감으로 이루어져 있어. 궁 밖을 나가 민중의 생로병사를 보게 된 싯타르타는 타인의 고통을 극심하게 공감하였고 자신과 타인의 고통을 해결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출가와 고행을 선택하였어. 이렇듯 자비는 타자의 고통에 민감한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야.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타인의 고통을 완화해 주는 것이 자비이고 , 실제로 타인의 고통을 완화할 때는 느끼는 감정이 행복인 것이다.


부처의 말씀처럼 자비가 넘치면 이 사회는 지옥이 아닌 천국이 될 수 있다는 말은 쉽지만 현실로 이루어지기는 어려울 것 같다. 2천 년 전부터 부처가 자비를 외치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예수가 가르쳤건만 인류의 역사는 자비와 사랑의 역사가 아닌 투쟁과 폭력으로 점철된 역사가 되었어. 인류는 말로 해서는 안 되는 종인 것 같다. 수많은 교회와 사찰이 세워져 있지만 예수와 부처의 가르침은 교회의 사찰 안에서만 머무를 뿐, 메아리가 되어 사회로 퍼져 나가지 못했다. 그저 하나의 이미지로서 소비될 뿐이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면 어쩌면 석가모니 같은 사람은 돌연변이 일지도 모른다. 진화라는 것이 가끔 출현하는 돌연변이가 자연선택의 과정을 거쳐 적자생존을 하는 것이라면 이런 자비의 돌연변이가 자연선택되어 적자생존할 때까지 기다리면 이 세상은 천국이 될 수 있을까? 하지만 애석하게도 석가모니처럼 영적인 능력이 특출한 사람은 자신의 유전자를 잘 남기지 않는다. (라이프니치, 뉴턴, 레오나르도 다 빈치, 비트겐슈타인, 베토벤,  데카르트, 스피노자, 칸트, 니체 등도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지 않았다.) 오히려 칭기즈칸이나 각국의 왕 같은 욕망의 화신들이 무수한 유전자를 남겼다. 옥스퍼드 대학 연구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중국, 러시아, 중앙아시아인들을 대상으로 유전자를 분석했는데, 놀랍게도 현재 약 1,600만 명의 남자들이 칭기즈칸의 염색체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전 세계 남성 200명 중 1명이 그의 후손이라는 것이지. 우리들은 욕망의 화신들의 후손들이 적자생존하다 보니 이 세상은 욕망의 아수라장이 되었다. 


진화학적으로 유의미한 시간을 가지려면 수 백 만년이 필요하다. 백 년도 못 사는 주제에 수 백 만년 후를 기대하는 것은 너무나도 멀고 먼 이야기지. 인류가 자본주의를 유지하면서 앞으로 백 년을 넘어 지속 가능한 사회가 되려면 분명 ‘자비’가 필요하다. 싯타르다가 말하는 무조건적인 자비는 어렵겠지만 자본주의에 맞는 새로운 자비는 필요하다. 


세렝게티 초원에서 사자가 얼룩말 한 마리를 사냥에 성공하면 사자 가족들은 배불리 먹고 남은 얼룩말 사체를 그 자리에 놓고 떠난다. 그러면 하이에나가 먹다 남은 얼룩말을 뜯어먹고 그 남은 것을 독수리가 쪼아 먹고 그 남은 것들은 보다 작은 짐승들이 발라 먹고 그리고 마저 남은 것은 식물의 영양분이 되거나 미생물이 해결한다. 그런 식으로 (나름) 최소한의 폭력으로 세렝게티 평원의 생태계는 유지된다. 


그런데 만약 사자가 먹고 남은 얼룩말을 냉장고 같은 곳에 보관한다면 어떻게 될까? 게다가 사자들이 인간처럼 욕심이 많아 경쟁적으로 얼룩말, 들소, 영양 등을 사냥하고 냉장고에 보관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세렝게티 초원은 지옥으로 바뀔 것이고 우리는 그 사자들을 ‘미친 사자’라고 부를 것이다. 지금의 인간 세상은 어떠한가? 마치 앞의 이야기에 나오는 미친 사자와 다를 게 무엇인가?


자본주의의 핵심이 소유라면 불교의 핵심은 무소유다. 무소유의 정의는 내가 가진 것을 내어주는 것이야. 이것이 진정한 자비의 핵심이지. 불교에서 열반에 이르기 위해 실천하는 여섯 가지 수행 덕목을 ‘육바라밀’이라고 한다. 그중 하나가 ‘보시’이다.  보시란 널리 베푼다는 뜻의 말로써, 자비의 마음으로 다른 이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베풀어 주는 것을 뜻한다. 현재로서는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는 없어. 자본주의를 유지하면서 사회적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보시’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에 맞는 보시가 필요하다. 초원의 사자처럼 배부르게 먹고 남는 것을 이웃에게 나눠주면 된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어 먹고 남는 것을 냉장고에 넣어 두지. (해가 바뀔수록 냉장고의 크기가 커지고 있다.) 초기 원시 시대에는 인간도 상위 포식자들이 먹다 남은 것을 먹었다. 그 당시에 현재의 인간과 같은 탐욕스러운 포식자가 있었다면 아마 인간의 역사는 시작되지 못했을 것이다.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 Thomas Piketty는 그의 저서 ‘21세기 자본론’을 통해 불평등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글로벌 부유세, 고소득자에게 한계세율 누진세 등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어. 현대판 ‘보시’인 셈이지. 2차 세계대전 이후 1970년대까지를 자본주의의 황금기가 불린다. 경제성장률은 높았으며 많은 비율의 사람들이 중산층이 되었어. 유럽과 미국에는 최고 누진세가 80%에까지 이르렀고 이런 세금을 바탕으로 많은 복지가 이루어졌지. 원시 시대 이후 인류 역사상 가장 평등한 시대가 되었어. 현대판 ‘보시’가 이루어진 시대였지. 이런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공산주의와의 경쟁 때문이었어. 공산주의와 체제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많은 사회주의 요소들을 받아들이고 실천하였지. ‘요람에서 무덤까지’로 대표되는 영국의 복지도 2차 대전 시 독일과 전쟁에서 지지 않기 위해 실시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공산주의가 몰락하고 경쟁자가 사라지자 자본주의는 다시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었고 신자유주의 기치 아래 보시는 점점 줄어들고 고통의 메아리는 다시 커지고 있다.


자본주의는 분명 인류에게 최초로 ‘풍요’를 선사하였어. 하지만 아직까지 이 풍요를 지혜롭게 나누지 못하고 있다. 역사적인 관점으로 보았을 때 인류가 자본주의를 맞아 성장통을 겪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선물한 이 풍요를 지혜롭게 나누어 쓸 수 있다면 인류는 더욱더 번창할 수 있다. 혼자 다 가지면 어차피 다 쓰지도 못할뿐더러 나도 불안하고 모두가 불안한 사회가 된다. 부자들이 충분한 재산이 있음에도 기를 쓰고 더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은 그들도 불안하기 때문이야. 무소유를 실천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저 배가 부르면 숟가락을 놓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부자들에게만 강요할 것도 아니다. 나보다 어려운 이웃에게 좀 더 관심을 가져주고 내 것을 조금만 나누어 준다면 부처의 자비와 예수의 사랑이 실천되는 것이다.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사회가 바뀌는 속도도 느리고 한계가 있으니 이는 반드시 사회적 제도로 완결되어야 한다. 사회적 제도로 완성되기 위해서는 이를 공론화하고 실천하는 과정이 필요하지. 정치적인 실천이 필요한 것이야. 이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적당히 먹으면 건강하지만 너무 많이 먹으면 각종 성인병으로 인해 수명이 짧아진다. 지금 인류는 건강한 사회가 될지 각종 사회적 질병으로 단명할지 그 기로에 놓여있다. 


행복에는 서로 갈 길이 다른 두 종류의 행복이 있어. 첫 번째는 타인과의 경쟁에서 이겨 더 많은 것을 가질수록 느끼게 되는 행복, 즉 소유의 행복이다. 소유의 행복은 자본주의 체제와 궁합이 잘 맞는다. 타인과의 경쟁에서 이겨 더 좋은 스펙을 소유해야 하고, 타인과의 경쟁에서 이겨 더 좋은 대학이나 직장을 소유해야 하고, 타인과의 경쟁에서 이겨 더 많은 연봉을 소유해야 한다. 자본주의 체제는 경쟁과 소유의 논리로 작동하니, 우리 삶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멈출 수 없는 경쟁과 만족할 줄 모르는 소유에 길들어 있어. 소유의 행복은 경쟁에서 이겼을 때의 행복 혹은 희소한 무언가를 가졌을 때 느끼는 행복이야. 하지만 소유의 행복이 서로를 할퀴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유’란 남의 의자를 뺏어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 행복은 ‘나눔의 행복’이야. 엄마는 자기의 행복을 위해 자식의 밥을 뺏어 먹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밥을 자식에게 아낌없이 줌으로써 오히려 행복을 느끼지. “중생들의 고통을 네 것으로 가져오고, 중생들의 수고를 네 것으로 가져오라. 바로 그것이 자비이고 보시다.” 바로 그것이 싯다르타가 걸었던 길이었다.


불안에 대해 자기 계발적인 내용으로 이야기하다가 범위가 넓어지면서 주제가 다소 무거워졌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야기하였듯이 불안은 나 혼자 노력한다고 해결할 수가 없어. 우리는 모두 그물처럼 연결되었기 때문이지. 불안해서 못살겠다는 목소리를 내야 하고 그 메아리가 퍼져야 한다. 모두가 한 목소리를 내면 분명 세상은 바뀔 수 있다.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를 소개하며 이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주여, 나를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고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저 기도문처럼 살자고 하면 너무 꿈같은 이야기일까? 


걱정을 미분하면 선택이 남는다. 그 선택을 적분하면 인생이 된다. 그 누적된 총량이 우리의 미래를 만든다. 우리의 미래는 자비가 충만한 사회라 되리라 믿는 것!! 이 믿음이 진정 불안을 제거하는 방법이다. 우리들의 선택의 합이 우리의 미래를 만든다. 풍요 속에 파묻히는 지옥이 될지, 자비 위에 건설되는 천국이 될지는 우리들의 선택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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