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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국현 Feb 27. 2023

자존감(하), 사회의 기둥

이전 편지에서 자존감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자존감은 마음의 기둥이며 기둥이 튼튼해야 마음의 집을 튼튼하게 지을 수 있음을 개진하였어. 하지만 문제는 개인의 노력만으로 주체적인 자존감을 세우는 것이 무척 어렵다는 것이야. 디오게네스는 주체성이 강하고 자존감이 높아서 천하의 알렉산드로스 앞에서도 쫄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우리들은 타인이라는 바람에 의해 이리저리 흔들리는 갈대와 다를 바 없다.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을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직업을 이야기한다. 직업을 말할 때 그 사람의 자존감의 높이를 추측해 볼 수 있지. 의사, 변호사 같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직업을 자신감 있게 말하며 또한 자존감도 높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직업을 가진 사람은 답변에 자신감도 없고 자존감도 낮음을 느낄 수 있지. 한국 사회에서는 직업이 곧 자존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야.  


한국 사회에는 엄연히 직업의 귀천이 존재한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을 가지지 못하면 타인으로부터 존중받기가 어려워. 사람을 연봉이나 직업으로 평가하는 풍조가 이미 사회에 만연해 있지. 우리는 돈과 관련된 물질주의적인 요소로 사람을 평가한다.  예를 들면 시험 성적, 직급이나 연봉, 집의 넓이, 자동차의 배기량 등으로 말이야. 그래서인지 우리는 누군가를 만나면 상대의 철학이나 세계관을 묻지 않고 직업을 묻는다. 누군가를 처음 만나면 "실존주의자 이신가요?"라는 질문보다 "무슨 일을 하세요?"라고 먼저 묻는다. 그 이유는 우리는 사람을 돈으로 평가하는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야. 상대방이 나보다 돈을 더 잘 벌면 친절하게 대하고 나보다 돈을 못 벌면 무시하는 경향이 있지. 


한국에서 자존감이라는 이슈가 불거지게 된 시기는 IMF 이후 경제 기조가 신자유주의로 변화된 이후야. 신자유주의는 철저히 개인 이기주의로 작동되는 사회이다. 이기주의는 필히 경쟁을 발생시키지. 개인 간의 경쟁으로 인해 공동체는 붕괴되었고 개인들은 파편화되었어. 파편화된 개인은 고독해지면서 자존감이 더욱 중요해졌지. 자존감은 내 마음의 기둥이 아니라 타인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하는 개인 무기처럼 변질되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자본주의적 자존감을 주입받는다. 흔히  “공부 못하면 길거리에서 청소해야 한다.” “돈 잘 버는 남편 만나려면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 등의 말들로 세뇌받지. (아빠도 은연중에 그런 말을 한 것 같구나. “공부를 못하면 네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남이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될 확률이 높다.”) 돈 잘 버는 직업이 곧 나의 높은 자존감이라는 교육을 받으며 자란다.  


1951년 심리학자 솔로몬 애쉬가 스와츠모어 칼리지에서 실행한 실험이 있어. 솔로몬 애쉬의 동조 실험이라 불린다. 실험의 간략한 내용은 이렇다. 이 실험에서 8명이 한 팀이 되고, 피험자는 1명이며 나머지 7명은 실험자를 돕는 동조자들이었다. 피험자의 실험 과제는 왼쪽 카드에 그려진 선분의 길이와 같은 선분을 오른쪽 카드에서 고르는 일이었다. 대학생들에겐 너무 쉬운 과제였다. 하지만 7명의 동조자가 오답을 선택하면 피험자는 다수의 사람들의 의견을 따라 같이 오답을 선택하였다. 인원을 바꾸고 질문 순서를 바꾸는 등 여러 실험을 했지만 대다수가 오답을 말하면 많은 비율로 피험자도 오답을 말하였다. 


이렇듯 단순한 실험에서도 타인의 오답을 쉽게 동조하는데, 나 혼자 올바른 신념과 가치관을 지키기가 무척 어렵다. 행여 있더라도 장기간 사회적 압력을 받으면 갈대처럼 꺾이고 말지. 그러면서 결국 나의 신념을 포기하고 사회가 요구하는 길로 들어서게 된다.


자존감의 기본적인 정의는 자신에 대한 평가야. 공동체의 구성원은 그가 속한 공동체적 가치에 의해 평가되고 공동체를 위해 많은 공헌을 할수록 자존감이 높아지지. 하지만 우리 사회가 인정하는 가치는 오로지 ‘화폐의 생산능력’이야. 하지만 이는 사회가 강요한 거짓 자존감이다. 화폐라는 가면으로 씌워진 왜곡된 자존감인 것이지.  돈으로 만들어진 가면은 돈 버는 능력을 상실하면 허망하게 벗겨져 버린다. 낮은 자존감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나타나는 현상들이 있어. 바로 존중받기 위해 성적, 외모, 연봉, 명품, 외제차, 학력, 사회적 지위 같은 사회적 도구에 집착하는 것이야.  


가짜 자존감은 고래를 칭찬하여 춤추게 하는 것과 같아. 고래를 춤추게 하는 자존감이 대단해 보이지만 멀쩡한 고래를 춤추게 하는 것은 사실 학대 행위이다. 고래의 본질은 춤추는 것이 아니라 넓은 바다를 유영하며 노래를 부르는 것이니까. 우리는 가짜 가면을 쓰고 학대를 받고 있으면서도 즐겁게 춤추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사회 구성원으로 자존감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타인의 존중’이야. 거리를 깨끗하게 하는 청소부는 사회에 대한 공헌이 크지만 화폐 생산 능력이 낮다는 이유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며 또한 존중조차 받지 못하고 있어. 현대 사회에서는 타인보다 화폐 생산능력이 떨어지면 존중받지 못하며 상처받는다. 그래서 현대인들의 자존감이 ‘사회적 갑옷’으로 변질되었어. 가면이 두꺼워져 이제는 갑옷이 되었다. 이제는 서로의 갑옷을 비교하면서 나보다 못한 갑옷을 가진 자는 무시한다. 이백충, 삼백충, 월거지, 전거지, 빌거지라는 혐오스러운 신조어가 나온 이유도 나보다 얇은 갑옷을 사람을 멸시하기 때문이야. 이런 혐오의 비수는 서민의 갑옷을 단숨에 뚫어버린다.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돈 버는 능력을 강요하는 이유는 그들도 돈이 없어 자존감에 상처 입은 트라우마 때문이야. 갑옷이 헐렁해서 맹렬한 사회적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지키지 못해 너덜너덜해진 자존감을 자식에게만큼은 물려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지. 우리 사회는 일찍이 학생들의 장래 희망은 그저 돈 많이 버는 것이고, 어른들 역시 마찬가지로 돈을 기준으로 직업을 선택한다. 한국인들의 삶 전체가 돈에 향해 달려가는 경주마 같은 신세가 되었어. 목표가 무엇이 되었든 그저 달릴 수 있는 경주마는 행복할까? 아마 행복한 사람은 경마장 주인일 뿐일 것이다.


한국의 교육은 오로지 대학 입시에 집중되어 있다. 그것도 ‘인 서울 in Seoul 대학’으로. 인서울 대학에 가려는 이유는 오직 대기업 정규직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야. 한국은 임금 불평등이 큰 나라이고 이 불평등에서 소외되지 않으려면 대기업 정규직으로 취직해야 한다. 인서울대학 인기학과를 가야 대기업 정규직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지. 대기업 정규직이 목표가 된 나라. 이런 환경 속에서 성장하는 청소년들의 자존감이 건강할 수 있을까? 양계장에서는 닭들의 부리를 자른다고 해. 조그만 케이지에 갇혀 존재의 본질을 상실한 닭들은 그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옆에 있는 닭을 쪼고 공격하기 때문이지. 우리 교실에 학폭이 존재하는 이유는 존재를 상실한 스트레스 때문이다. 부러진 자존감을 누군가를 괴롭힘으로써 보상받으려 하는 것이지.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자신이 타인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강하다. 비교를 통해 타인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인정받으려 하지. 비교 자체는 나쁘지 않아.  비교는 세계를 인식하는 수단 중에 하나이니까. (공간도 비교를 통해 존재한다) 문제는 비교가 아니라 잘못된 기준이야. 프로쿠루테스의 침대처럼 자신의 자존감이 높음을 인정받기 위해 타인의 자존감을 잘라낸다. 타인의 자존감에 칼질하는 것을 ‘혐오’라고 부른다.

이런 타인을 향한 폭력은 좀비 바이러스처럼 퍼지고 있어.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혐오’라는 단어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혐오라는 단어가 뉴스에 단골 메뉴로 등장하고 있지. 남자는 여자를 혐오하고 여자는 남자를 혐오하고, 청년은 노인을 혐오하고 노인을 청년을 혐오하는 사회. 서로가 서로의 다리는 자르는 세상이 되어 가고 있다. 


샘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사랑하게 된 나르키소스. 자기 자신에게 지나치게 애착하는 것을 나르시시즘이라고 하고 그 나르시시즘에 빠진 사람을 나르시시스트라 부른다. 정신의학에서는 나르시시스트를 인격 장애 중에 한 형태로 규정하고 있지. 나르시시트의 특징을 몇 가지 나열해 볼게. 나르시시스트는 자기 자신이 항상 주인공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타인의 인정에 과도하게 집착한다. 과시욕이 강해 명품, 외제차 등 화려한 겉모습에 집착한다. 과시욕은 권력욕으로 이어진다. 권력을 얻어야 주인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권력을 얻은 사람들은 특권 의식이 심하며 이 특권 의식이 갑질을 낳는다.


나르시시트는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의 특징과 일치한다. 나르시시트 나약한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과시라는 가면과 갑옷으로 무장한 채 자신을 왜곡시키는 과정에서 탄생하게 된다. 갑질이 난무하는 사회란 그만큼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 많다는 뜻이야.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타인보다 우월하다고 잘난 체하지 않아.  진정으로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타인도 사랑과 존중으로 대하지.  


인류는 협력을 통해 사회를 이루었고 그 공동체 안에서 사회적 가치가 높은 존재가 되고 싶어 하는 욕구를 가지게 되었어. 모든 공동체 구성원들이 자기 존중의 욕구를 실천할 수 있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이다. 선한 이웃들과의 굳건한 연대는 건강한 자존감의  원천이 되지. 자존감 확립에 타인의 존재가 꼭 필요하다. 나의 가치에 대한 평가를 위해서 타인의 존재는 필수적인 요소이지.  비교는 세계를 인식하는 수단이기 때문이야. 나의 얼굴을 보려면 거울이 필요하듯이 나에 대한 이해와 평가를 위해 타인이라는 거울은 반드시 필요한 법이지. 하지만 깨지거나 일그러진 거울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돈으로 나를 평가하는 불량 거울은 바로 버려야 한다. 


무인도에 살면 자존감이 필요 없어. 이 말은 자존감은 사회적인 산물이라는 뜻이야. 자존감은 공동체에 소속되고 그 공동체에 공헌하며 타인에게 인정받고 사랑받음으로써 발생되는 마음이기 때문이지. 사회를 떠나면 자존감은 증발한다. 사람은 자신만의 달란트로 사회에 공헌할 수 있을 때 자신을 가치 있는 존재로 여긴다. 

인간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질문에 맞는 해답을 얻으려면 인간에 대한 깊은 사색과 고찰이 필요하다. 그래서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이지. 진정한 자존감은 타인과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이야.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 Jacques Derrida는 ‘함께 잘 살아감(living-well-together)’이라고 대답했다. 가장 인문학적인 혜안이라 생각한다.  


그동안 계속 자존감을 기둥에 비유했어. 구성원들이 건강한 자존감을 가지면 그 사회는 매우 튼튼한 기둥들은 가진 것이 된다. 그 기둥들 위에 데리다의 혜안처럼 ‘함께 잘 살아감’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5백 년 전 토마스 모어가 꿈꾸었던 ‘유토피아’가 그저 꿈만이 아니라는 ‘우리의 대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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