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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국현 May 18. 2023

관계 = (나+너) X 공감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수많은 요건들이 있겠지만 그중에 중요한 한 가지는 관계의 확장이야. 타인과 관계를 맺어 가면서 나의 세상을 넓혀 나가는 것이지. 칭기즈칸 같이 남의 땅을 정복하며 영역을 넓히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건강한 관계를 맺으며 나의 영역을 넓혀 가는 것이란다. 우주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확장되었어. 지구도 태양과 적당한 거리에 있어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었다. 우주는 빅뱅이라는 한 점에서 시작되어 적당한 거리를 둠으로써 삼라만상을 창조하게 되었지. 적당한 거리는 공간을 창조하며 그 안에서 상호 간의 중력에 의해 관계가 만들어진다. 내가 타인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또 다른 세상과의 새로운 연결을 뜻하지.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렵다. 수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한 가지는 타인과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야. 태양과 가까운 금성은 너무 뜨겁고 멀리 있는 토성은 너무 차가운 것처럼 말이야.  심리학자 아들러는 “인간의 고민은 모두 인간관계에서 나오는 고민이다”라고 말했어. 내가 오늘 심적으로 힘들었다면 그건 아마 누군가와 관계가 좋지 않다는 뜻이야. 관계의 골디락스 존을 찾아야 할 때인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사람과의 관계가 더 복잡해졌어. 옛날에는 자급자족을 하며 생활했다. 스스로 사냥을 해서 먹을 것을 구했고 동물 가죽을 기워서 옷을 만들어 입었어. 집도 스스로 지었으며 비가 와서 물이 새면 직접 고쳐야 했다. 하지만 분업화된 현대 사회에서는 그 누구도 자기만의 힘으로 의식주를 해결할 수 없게 되었어. 자동차 공장에서 바퀴 끼우는 노동자는 그 일에서만큼은 전문가일 수 있겠지만 오로지 혼자만의 힘으로는 생존할 수 없다. 먹을 것이 필요하면 마트에 가서 화폐를 주고 타인의 생산물을 구매해야 한다. 현대에서는 타인에 대한 의존이 더 커지면서 관계의 중요성이 높아졌어. 과거에는 한 부족에 150명이 넘지 않았어. (이를 ‘던바의 수’라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SNS 덕분에 수백, 수천의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지. 그만큼 관계의 복잡도도 높아졌다.


 국가도 나라 간의 영역을 표시하는 경계가 있듯이 건강한 인간관계를 위해서는 적절한 경계가 필요하다. 아무도 넘어올 수 없는 높고 단단한 벽을 세우라는 뜻이 아니야. 너무 높은 벽을 ‘자폐’라고 부른다. 그렇다고 아무 때나 막 들어올 수 있는 허술한 울타리도 바람직하지 않아. 자신의 경계가 없는 사람을 ‘호구’라 부르지. (호랑이의 입이 아니다) 국경이 허술해 침략에 시달리는 국민이 행복할 수 없듯이 내 마음의 경계는 튼튼하지 못하면 내 마음은 남의 식민지가 될 뿐이야.


 제주도 돌담의 풍경은 아름답다. 높이도 적당하여 보는 이로부터 위압감을 주지 않고 편안하다. 엉기성기 쌓아서 부실해 보이지만 태풍이 불어도 쓰러지지 않는다. 구멍이 많은 현무암을 사용하고 돌 사이에 공간이 바람의 통로 역할을 하지. 그 여백으로 인해 오랜 풍파가 지나도 무너지지 않아. 제주도 돌담처럼 담백한 아름다움과 튼튼한 실용을 지닌 마음의 경계가 필요하다. 


  집과 집의 경계를 구분해 주는 담장은 육안으로 쉽게 보이지만 마음의 경계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명확하게 세우는 것이 어렵다. 서로가 생각하는 경계가 다르기 때문에 갈등이 일어나지. 경계에 대한 해석이 다를 경우 관계에 대한 합의가 필요하다. 일부 뇌과학자들은 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뇌가 발달했다고 주장한다.


 최초의 인간관계는 부모와의 관계이다. 부모 중에서도 엄마와의 관계가 먼저 이루어진다. 신생아는 출생 후 몇 달 동안은 자신과 엄마와의 경계를 구분하지 못한다고 해. 엄마가 곧 나인 셈이지. (그래서 엄마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러다 엄마와 나를 구별함으로써 최초로 타인과의 경계 및 관계를 배우게 된다. 기쁨, 만족, 슬픔, 공포, 고독, 무능함 등을 견디고 배우면서 자기만의 경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지. 자기 세계를 구축하는 능력이 건강한 자아로의 탄생을 이끌 수 있어. 건강한 자아는 ‘너’와 ‘나’의 구별이 아닌 ‘우리’로 재탄생하는 것을 의미하지. 여기서 ‘우리’란 마음의 공간을 공유하는 사람임을 뜻한다. 


 엄마, 아빠는 너의 건강한 자아를 키우기 위해 나름 노력을 많이 했지만 분명 부족한 점도 많았을 거야. 만약 엄마, 아빠한테 상처를 입었다면 엄마, 아빠도 역시 상처받은 사람이라고 이해해 주길 바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부족함은 채울 수 있다는 점이야. 어른이 된다는 것은 수없이 넘어지고 다치면서도 다시 일어서고 고치면서 가는 길이다. 정답이 없는 인생 문제를 풀면서 나의 세계를 수정해 나가는 것이지. 과거의 나를 오늘의 성찰을 통해 내일의 나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인생은 헤겔의 변증법과 같아. 같은 자리를 빙빙 도는 것 같지만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는 것이야. 그 과정에서 네가 의미를 부여하면 그것이 바로 네 인생의 정답이 되는 것이다. 


 성찰의 누적을 철학이라 부른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나? 이것은 나의 생각인가? 이것은 나의 욕망인가? 나의 달란트는 무엇인가? 나의 철학이 깊어갈수록 나의 담장은 아름다워진다. 나와 타자를 구별하게 되면서 내 것이 아닌 욕망은 버리고 더욱 나에게 집중할 수 있게 되지. 완벽하게 크는 사람은 없고, 좌절 없는 발달은 없다. 네가 누군가와 친밀하다는 것은 좌절과 갈등이 전혀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 좌절과 갈등을 해결하고 회복했다는 증거이다. 모든 친밀함은 갈등의 터널 끝에 있는 법이니까.  


 신생아 때는 소통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배가 고프거나 불편하면 그저 빽빽 울기만 한다. 너도 엄청 많이 울었어. 그럼 엄마는 네가 어디가 불편한지 단박에 파악하고 너의 불편함을 해소해 주었지. (아빠는 너의 울음을 잘 해석하지 못해서 엄마한테 많이 혼났다) 유아기 때 소통은 주로 떼쓰고 우기는 일방적인 방식이야. (사실 어린아이가 논리적으로 이야기하면 그것도 어색하다. (“아버지, 저 장난감을 구매하여 소유권을 저에게 이전하지 않으면 한 국민의 행복권은 상실될 것입니다.”) 부모는 아이의 마음과 상황을 헤아려 들어줄 수 있는 것은 들어주고 안 되는 것은 거절하면서 올바른 길로 훈육한다. 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인류 평화에 큰 해악이 되지 않는다면 대부분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 된다. (아빠도 네가 장화 신은 고양이의 눈을 하면 엄마 몰래 불량식품을 사주었다)


 문제는 이런 어릴 적 일방적 소통 방식을 어른이 되어서도 그대로 사용한다는 점이야. 최초의 관계는 하나의 틀이 되어 붕어빵처럼 비슷한 관계를 계속 찍어내는 경향이 있어. 어른은 아이처럼 울고 떼쓰지는 않지만 주로 화를 내어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려 한다. 어른이 화를 자주 내는 것은 어린아이가 장난감 사달라고 우는 것도 별반 다르지 않아. 어릴 적 관계의 방식을 개선하지 못하면 타인과 건강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나의 세상은 더 이상 확장되지 못한다. 


 아이들은 타인과의 경계가 모호하여 관계와 소유를 혼동한다. 그래서 어른이 되어도 타인을 소유하려는 버릇을 고치지 못하지. 유아기적 애착 욕구를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유아의 애착은 성장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정상적인 상태이지만 성인의 애착 욕구는 미성숙의 반증이며 심하면 병이 되기도 한다. 어른이 되어서도 타인을 하나의 주체로서 인정하지 못하고 그저 자기의 욕망 충족의 대상으로 여기게 되지. 내면의 결핍을 관계를 통해 채우려고 하지만 상대의 영역을 인정하지 않고 공용으로 생각한다. 상대에게 비현실적인 기대를 하며 내 말은 알아서 이해해 주기를 바라지. 그러면서 자신은 정작 상대에게 관심이 별로 없다. 이런 사람을 전문 용어로 ‘나르시시스트’라고 한다.


 관계는 행복의 근원이기도 하지만 고통의 원인이기도 하다. 관계의 고통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빠가 항상 얘기하듯이 살아있는 모든 것은 진화의 누적된 결과이다. 내가 느끼는 감정들은 모두 진화론적 존재의 이유가 있게 마련이야. 앞 편지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원시 시대 나약한 인간들은 생존하기 위해서 서로 협력하며 사회를 이루어 살았어. 하지만 어떤 이유로 그 집단에서 쫓겨나면 그건 바로 죽음을 의미했다. 그래서 타인과 관계를 잘 맺지 못하면 우리의 뇌는 고통을 느끼도록 진화했지. 그래서 사소한 문제라도 타인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쉽사리 상처를 받는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했는지도 모르겠다. 고통의 존재 이유는 빨리 문제를 파악하여 해결하라는 뜻이야. 길을 가다 발바닥에 고통이 느껴진다면 혹시 가시가 박혔는지 확인하라는 뜻이지. 마찬가지로 관계에서 고통을 느낀다면 그 원인을 파악하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관계가 고통스럽다고 모든 걸 타인에게 맞춘다면 그것도 문제이다. 부정적인 정서나 감정들을 숨기고 타인의 말에 무조건적으로 순응하면서 착한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경향을 ‘착한 사람 콤플렉스’라고 한다. 이들은 거절이나 자기 의사를 잘 표현하지 못해. 자존감이 낮아서 타인 중심적인 인간관계를 맺는 경향이 있어. 외로움을 잘 느끼는 사람이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 걸리기 쉽다. 그래서 타인과의 관계로 도피를 하지. 하지만 그 관계에 자신의 포식자가 숨어 있는 걸 알지 못한다. 착한 사람은 나르시시스트에게 착취당하기 쉬워. 자존감 편에서 나르시시스트의 특징에 대해 언급했듯이 나르시시스트는 자존감이 낮아. 자존감 낮은 ‘나르시시스트’가 자존감 낮은 ‘착한 사람’을 잘 발견한다.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말이야.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의 낮은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상대의 자존감을 깎아내린다. 상대방을 밟고 올라가는 것이다. 


 착함에도 종류가 있어. 아이의 착함과 어른의 착함이 있다. 아이의 착함은 어른이 시키는 대로 따르는 것이야. 어른의 착함은 자기 주관적 기준으로 판단하여 타인에게 배려를 베푸는 것이지. 아이의 착함은 자기 기준이 없거나, 타인의 인정을 얻기 위한 이기적 욕구에 의한 것이야. 진정한 착함은 자신의 양심과 주체적인 판단에서 실천하지. 앞 편지에서도 말했듯이 이는 자존감에도 직결된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타인의 인정 욕구를 갈구한다. 유년기의 애착 결핍은 성인기의 인간관계를 왜곡시키지. 


 나르시시스트는 미성숙하게 착한 사람을 포획하여 가스라이팅을 한다. ‘가스라이팅’은 1938년 스릴러 연극 Gas Light에서 유래된 용어이다. 연극의 내용은 주인공 잭이 아내를 정신적으로 무너뜨리고 조종하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가스라이팅은 특정 목적을 위해 타인의 심리를 조정하여 스스로를 의심하고 가해자에게 의존하게 하는 일종의 심리 학대를 말해. 이런 심리적 조정은 가까운 관계에서 쉽게 발생한다. 심리적 장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스스로의 판단력을 의심하도록 반복적인 암시를 던진다. 이 사람이 내리는 의사 결정에 대해서 항상 결함, 잘못 만을 지적하고 ‘넌 내가 있어야 돼’ 이런 식으로 상대를 불완전한 사람으로 깎아내린다. 그러면 자신의 판단을 의심하게 되고 가스라이팅을 가하는 상대의 말을 점점 신뢰하게 되면서 상대에게 점점 세뇌를 당하게 되지. 그러면 나르시시스트는 자신보다 심리적으로 을의 위치가 된 상대를 자신의 욕구와 필요에 따라 마음대로 조종하고 이용한다. 


 가스라이팅은 무의식적으로 쉽게 당하기도 하고, 내가 가해자가 될 수도 있어. 미성숙한 사이일수록 흔히 발생하지. 이런 심리적 종속에 벗어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상대를 신경 쓰지 않고 그냥 나대로 행복하게 살면 되는 것이야. 영화 속 대사처럼 말이다. “너나 잘하세요.” 


 세계 속에 내가 오롯이 존재하려면 우선 내가 ‘독립된 존재’ 임을 선포해야 한다. 인간관계에서 나의 독립을 표현하는 방법으로는 ‘솔직한 자기표현’ 이 있어. 싫을 때에는 당당하게 “NO”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해. 군부대 근처에 가면 “더 이상 접근하면 발포할 수 있습니다.”라는 푯말을 볼 수 있어. 이처럼 ‘NO’라고 말하기는 나의 푯말을 명확히 세우는 것이야. 건강한 자기 세계를 지키려면 원하지 않는 것을 거절할 줄 알아야 한다. 거절할 줄 모른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뜻이기도 하지. 


 삶은 유한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할 수는 없어. 인생이 무한하면 정체성이나 주체성은 그다지 필요 없을 수도 있다. 어차피 영원히 살건 데 이렇게 산들 저렇게 산들 아무 상관이 없을 테니까. 모래, 작은 돌, 자갈, 큰 돌이 있고 그것을 담을 항아리가 있다. 큰 돌을 먼저 넣고 자갈, 작은 돌, 모래의 순서대로 넣어야 항아리에 남김없이 다 채울 수 있지. 그런데 모래, 작은 돌들을 먼저 넣으면 나중에 정작 큰 돌은 넣을 수가 없다. 항아리가 인생이라면 돌을 넣는 순서는 나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어. 누군가 모래부터 넣으라는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면 나의 큰 돌은 결국 내 인생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된다. 거절을 못하는 것은 어쩌면 나의 정체성이 부족해서 그럴 수 있다. 내 삶의 우선순위가 아닌 것들은 단호하게 “NO”라고 거절해야 나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단다. 


  나르시시스트에 대항할 수 있는 무기는 튼튼한 주체성의 확립이야. 튼튼한 주체성은 코뿔소의 뿔 같은 무기라 할 수 있지. 코뿔소는 풀을 먹는 초식 동물이지만 백수의 왕 사자도 코뿔소를 함부로 건들지 못한다. 나의 철학이 주체성을 만들어 준다. 삶과 행위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실천하는 것이 철학이다. 주체성은 상대에게 휘둘리지 않으며, 타인에게 필요 이상으로 매달리지 않고, 혼자서 행복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해. 나만의 철학이 없으면 사자나 하이에나들에게 항상 물어 뜯기게 마련이야. 그리고 관계의 정의를 세울 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데이트 폭력을 당하는 여자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연인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올바른 정의를 내릴 수 있다면 지금보다 단호하고 현명하게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착한 사람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는 사람의 문제는 결과가 착하지 않다는 점이야. 착한 사람 증후군을 가진 사람의 심리적 토대는 항상 ‘억압’으로 다져져 있지. 이 눌렸던 억압이 결국에는 화산처럼 터지고 만다. 평소에 늘 조용하고 착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물건을 던지며 소리를 지르거나, 직장에서 갑자기 사직서를 내는 것처럼 말이야. 다이너마이트를 깊게 묻을수록 폭발력이 크듯이 오래 묻힌 억압의 폭발력은 대단하다. 하지만 그 결과에 자책하고 다시 스스로를 억압하게 되지. 그렇게 화산처럼 반복해서 터지면서 자신의 몸과 마음은 점점 더 피폐해져 간다.  


 착한 사람 증후군을 가진 사람은 대체로 화병을 가지고 있다. 화병은 영어로 ‘Hwa-byung’이다. 국제적으로 화병이라는 병명이 한국에서의 고유한 병명으로 인정되었다. 화병은 화가 나는 병이 아니라 분노를 삭이고 드러내지 않는 병이야. 분노는 일종의 시그널을 알려주는 감정이야. 하지만 관계 때문에 그 표현을 하지 못하지. 그 시그널은 무엇일까? 내 안에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는 신호이다. 분노는 희석해야 한다. 하지만 안전한 대상과 안전감을 느껴야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면서 희석을 할 수가 있다. 누군가 마음속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산이 있다면 먼저 다가가 그 이야기를 들어주자. 들어주는 것 만으로 휴화산을 사화산(死火山)으로 만들 수 있으니까.  


 사람들의 대화를 들어 보면 모두들 타인으로부터 상처받아서 힘들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아이러니하게도 준 사람은 없는데 받은 사람만 있다. 이는 나도 모르게 뱉은 말 한마디가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다는 뜻이야. 고슴도치는 가만히 있어도 누군가를 찌른다. 친한 사이일수록 서로가 서로의 가시를 찌르게 되지. 


 ‘고슴도치 딜레마’라는 심리 용어가 있어. 쇼펜하우어의 저서에 고슴도치 우화가 나오는데 이 용어의 기원이 되었어. 인간관계에 있어서 서로 가까워 지기를 원하면서도 동시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양가적 심리상태를 말하지. 인간관계가 쉽지 않음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현대 사회는 남에게 상처받기도 싫지만 고독도 싫은 고슴도치를 닮았어. 실제로 고슴도치들은 가시가 없는 머리를 맞대어 잠을 자거나 체온을 유지한다고 해.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최선의 방법을 습득하 것이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한 습득의 결과가 ‘예의’이다. 예의로 인해 서로 가시에 찔리지 않으면서 상대의 온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관계가 어려운 것은 문화의 영향도 크다. 개인의 감정과 가치관을 최대한 존중하고 수용하는 개인주의 문화에서는 행복감을 느끼기 쉬운 편이지. 북유럽 국가들의 행복도가 높은 이유도 국민소득보다는 개인의 자유를 존중해 주는 개인주의적 문화 덕분이라 할 수 있어. 한국과 일본같이 경제는 발달했지만 개인주의 문화가 부족한 사회에서는 행복도가 낮은 편이야. 행복이라는 나무는 개인의 자유가 높은 토양에서 훨씬 잘 자란다. 우리나라같이 집단주의 문화에서는 공동의 목표가 생기면 놀라운 응집력이 발휘되지만 늘 만성적인 피로가 쌓이게 마련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타인의 평가에 민감할 수밖에 없고 이런 타인 중심적인 생각이 행복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 건강한 사회는 개인과 집단의 조화를 이룬 곳이다.


 참고로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는 다르다. 이기주의가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는 것이라면, 개인주의는 타인들도 자신과 동등한 인격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그래서 개인주의는 일반적인 거부감과 다르게 공동체의 가치를 소중히 여긴다. 나의 행복도 소중하기에 타인의 권리도 존중하지. 개인주의는 개인과 집단의 균형을 지향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내가 누군지 알아야 하고 사회가 무엇인지도 알아야 한다. 


 18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루소는 개인과 사회의 관계의 정의를 고민하던 끝에 사회계약론을 썼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어디에나 족쇄가 채워져 있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의 첫 문장이다. 루소는 홉스, 로크와 마찬가지로 자연상태와 사회계약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루소가 주장하는 자연 상태는 홉스가 말하는 만인이 투쟁하는 곳이 아니야. 자연상태는 자유롭고 평등하고 평화로운 곳이었지. 하지만 문명사회가 발생하면서 인간 사회에 문제가 생긴다. 문명이 발생하고 사유 재산이 생기면서 자연상태에서 자신의 생존을 위해 존재했던 자기애가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자기 편애, 이기심으로 변하게 된다. 문명사회에서 자기 편애는 사람들을 잔인하게 만든다. 인류의 문명은 발전했지만 사유재산의 형성으로 인해 빈부격차, 불평등이 생겨나며 힘의 논리에 의해 강자와 약자가 구분되었다. 그 속에서 인간의 자유는 말살된다. 이때 자유를 되찾고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인간이 선택한 것이 바로 모든 권리를 사회에 넘기는 ‘사회 계약’이다. 


 홉스는 절대적인 권력을 국가에게 맡겨 평화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홉스는 권력이 평화를 도모하기 때문에 권력이 곧 정당성이 된다고 말했지만 루소는 권력 이외의 다른 도덕적 정당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지. 루소는 정당한 국가와 그렇지 않은 국가를 구분했어. 그렇다면 어떤 국가가 정당한 국가일까? 


 정당한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앞서 루소의 ‘일반의지’에 대하여 먼저 이야기해 볼게. 일반의지란 사회계약을 통해 원초적 자유를 포기하고 얻는 정치적 자유를 뜻해. 정치적 자유는 스스로가 입법자가 되어 그 법에 복종하는 것이지. 그럼으로써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야. 이전에는 생존과 이기심을 추구하였다면 이제는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지. 개인의 이익이 아닌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 이것이 루소가 말하는 일반의지이며 이 일반의지를 가진 국가가 정당한 국가라고 말한다. 


 루소에 따르면 개인은 자기만의 이익을 지향하는 특수의지와 공동체 모두의 이익을 지향하는 일반의지를 동시에 갖고 있다. 이 개인들이 모여 각자의 일반의지에 따라 토론과 투표를 거쳐 공동의 일반의지를 만들 수 있지. 이 공동의 일반의지는 공익을 지향하는 선한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만들어진 거대 인격이자 집단 지성이라 할 수 있어. 루소는 이런 방식으로 국가를 운영해 나가기 위해서는 홉스의 군주제나 로크의 의회제가 아닌, 시민들이 직접 자신의 의사를 개진하는 직접민주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루소는 이 공동의 일반의지로서 주권은 절대로 양도되거나 분할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남에게 결정 권한을 넘겨서 타율적으로 만들어진 법이 아닌, 일반의지를 통해 형성된 법을 통해서만 개인은 진정한 자유를 회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루소는 법과 나라를 만드는 이유는 자유와 평등을 위해서이며 국가가 법이라는 울타리를 세우지 않으면, 사자는 바로 양을 잡아먹을 것이라고 주장했어. 루소의 저서 중 몇 구절을 인용해 보겠다. “권리와 의무는 계약에서만 창출된다. 사회계약은 시민들 사이에 평등을 수립함으로써 시민들 모두가 같은 조건으로 계약을 하고 또 모든 권리를 똑같이 누린다는 것이다.” “국가가 튼튼해 지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두 극단을 최대한 좁혀라. 지위와 재산은 상당히 평등해야 한다. 안 그러면 권리와 권위의 평등은 오래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개인과 사회에 대한 관계 철학은 사상으로 발전하였고 봉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상 ‘근대’를 여는 원동력이 되었다. 


  나의 관계를 정립하기 전에 필요한 일이 나만의 세계를 가지는 것이야. 나의 세계가 존재해야 경계도 필요한 법이니까. 국가가 세워지면 헌법이 필요하듯이 나의 세계에 맞는 법을 세워야 한다. 나의 헌법은 나의 정체성과 주체성이 만들어 준다. 헌법은 수많은 법철학 기반 위에 세워졌 듯이 나의 세계를 갖추려면 나의 교양과 철학이 필요하다. 사상이 시대를 만들었 듯이 나의 생각이 나의 역사를 만든다.  


  인생에는 행복과 불행이 공존한다. 불행을 제거한 행복은 없어. 야누스의 얼굴처럼 불행이 없으면 행복도 없다. 건강한 정신이란 이런 삶의 양면을 이해하고 통합하는 능력이야. 행복만을 긍정한다면 그건 맹신이며 삶은 오해하는 것이다. 행복의 열매는 고통의 나무에서 열리는 법이니까.  


 평등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 상호 존중하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조화롭고 건강한 관계는 서로의 개별성을 존중하는 것이야. 갈등이 생기는 이유는 키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키 차이를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지. 주체성은 ‘나다움’을 유지하는 것이다. ‘나다움’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상대와의 관계에서 나만의 생각, 감정, 취향 등을 보존하는 것이지. 국가 간의 문화 교류도 마찬가지이다. 자기 문화의 주체성을 가지면서 다른 문화를 받아들일 때 인해 새로운 번성으로 이어지지. 서양 문화의 기둥이라 할 수 있는 헬레니즘도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가 융합되면서 만들어졌다.


 우리의 관계를 전부 좋은 관계로 만들 수는 없다. 인간관계 법칙 중에 271법칙이 있어. 열 명 중에 두 명은 나와 친밀하고 일곱 명은 나에게 관심이 없으며 반드시 한 명은 나를 싫어한다는 유대교 경전에 나오는 법칙이야.  수천 년 동안 세월이 검증해 준 법칙이지. 나와 안 맞는 사람은 내가 무슨 노력을 하든 안 맞게 되어 있어. 그런 사람과는 ‘뭐 어쩌라고’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주식처럼 사람도 손절이 필요하다. 그 사람에게 쓸 에너지를 내 친구 두 명에게 쓰는 것이 현명하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만 하기에도 우리 삶이 너무나 짧기 때문이다.


 나의 세계가 발달하고 타인의 세계와 점점 연결되면 어느 순간부터 나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나의 자아가 내 피부를 넘어 우리로 확장되는 것이야. 나 자신이 개별적 존재가 아닌 우주 안에 연결된 존재임을 깨닫게 되지. 이는 공감의 시작이며 그 끝은 범아일여의 완성이다. 중력이 상호 간의 관계를 만든다면 그 관계를 유지하게 하는 힘의 근원은 무엇일까? 그 힘에 대해서는 다음 편지에서 이야기해 보겠다.


 세상은 연결과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어. 결합의 종류는 공유결합, 이온결합, 금속결함 이렇게 세 가지가 있다. 공유결합은 원자들이 서로 전자를 방출하고 공유하면서 생기는 결합으로 세 가지 결합 중에 결합력이 가장 높아. (공유 결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양자역학을 알아야 한다. 아빠가 양자역학을 열심히 공부해서 다시 알려주겠다) 태초에는 수소 원자들 만이 존재했다. 이 수소 원자들이 공유 결합을 하면서 헬륨으로 결합되고 이 헬륨이 탄소, 탄소가 산소로 융합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세상이 창조되었지.


 인간은 공감으로써 타인과 공유 결합을 할 수 있다. 너의 공감이 확장되어 세상에 새로운 결합이 만들어지길 바란다. 그 결합의 이름은 ‘사랑’이며 사랑의 결합만이 이 적막한 우주에서 우리를 빛나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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