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국현 Aug 01. 2023

에필로그 및 보충수업.

‘딸에게 보내는 교양 편지’는 이쯤에서 1권을 마치려 한다. 1권을 마친다는 이야기는 2권, 3권이 계속 나온다는 뜻이겠지. 이 편지는 아빠의 인생 나무에서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는 그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너의 눈동자를 처음 본 그 순간을 항상 기억한다. 그 짧은 찰나에 너의 눈은 나의 운명에 대해 설명해 주었지. 나의 지난 모든 과거들은 지금 이 순간을 위한 필연들이었음을. 나의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는 그 순간에 너의 눈동자를 보기를 소망한다. 그 순간에 무슨 감정을 느낄지는 모르겠으나 지나갈 필연들을 소중히 하기 위해 지금 이 순간 글을 쓴다.  


엄마 아빠는 사랑으로 만나 우주 끝에서 빛나고 있던 너를 불렀다. 10개월에 긴 여행 끝에 너는 지구에 도착했고 엄마 아빠는 무척 기뻤지만 내 마음 한 켠에는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산다는 건 나무가 광합성을 하여 에너지를 얻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얻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먹고살기 힘들다) 난 비록 가난했지만 정신까지 가난한 아빠가 되고 싶지 않았어. 그렇게 해서 시작한 것이 독서였다. 화폐, 유가증권이나 부동산은 물려주지 못해도 교양과 인생의 지혜는 물려주고 싶었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은 고통이라 말했어. 이 세상이 고통으로 만연한 이유는 인간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전락했기 때문이지. 철학, 심리학, 역사, 경제, 정치 등의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인간이 수단으로 전락된 과정을 이해하고 다시 목적으로 회귀하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서이다. 니체는 고통은 해석이라 말했다. 각자에게 고통이 달리 해석되는 이유로 세상에는 천차만별의 고통이 존재하지. 고통과 같은 형이상학적 대상을 이해하려면 해석의 도구인 언어가 필요하다. 부모는 인생의 고통을 설명해줘야 할 의무가 있고 나는 나의 언어로 너에게 이 세상을 설명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의 언어는 너의 고통을 해결해주지 못한다. 너의 고통은 너에게 해석된 세상 유일한 고통이므로. 아빠는 이 글을 통해 너에게 사유의 씨앗 하나를 줄 수 있을 뿐이야. 네가 그 씨앗을 너의 언어로 잘 키우기를 바란다. 너의 언어가 고통을 왜곡하지 않기를 바란다. 고통을 직면하고 도망치지 말아라. 고통은 너의 발자국을 먹고 더 커지게 된다. 행복은 고통의 뒷면에 적혀 있다. 고통으로부터 도망치면 너의 행복을 읽을 수가 없다.

 

너의 언어가 정립되면 그것을 철학이라 부른다. 평소에는 철학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지만 고통에게 포위당하면 철학을 찾게 되지. 고통의 방에 갇혔을 때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열쇠가 철학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해석만이 고통의 올가미에서 벗어날 수 있어다. 모든 희망은 무너지고 손 내미는 사람 하나 없는 막다른 골목길에서 외로움에 몸부림칠 때 고통은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세계는 무엇인가? 나는 앞으로 이 세계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 고통에게 나의 영혼과 이야기를 빼앗기고 마리오네트의 삶을 살게 된다.  


고통을 먼저 경험한 인생 선배들의 남긴 지혜를 고전이라 부른다. 독서를 하는 이유는 내가 모르는 타인의 낯선 사유세계에 접속하기 위해서이다. 고전의 언어와 나의 언어를 융합하면 나만의 철학을 정립할 수 있어. 나만의 철학은 나라는 소설의 문체이자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도구가 된다.  


나의 언어를 확립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독서이다. 하지만 지금은 영상물이 독서를 대체하여 책을 읽기가 어려운 시대가 되었어. 게다가 시간이 지나갈수록 영상의 길이는 점점 더 짧아지고 있고 유튜브 쇼츠, 틱톡, 인스타릴스 등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이런 숏폼 영상들은 자극적이고 중독이 되기 쉬어. 새로운 것들을 접해서 자극을 받으면 보상 호르몬이 나오는데 이런 영상들은 그런 자극들을 극단적으로 높인 것이다. 뇌가 이런 자극들을 계속 받으면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보상을 줄이게 된다. 그러면 일상생활에서의 다른 즐거움을 얻기가 어렵다.


짤막하고 즉각적이고 자극적인 영상물들은 사고의 빈곤, 주의력 분산 등의 부정적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한마디로 인간의 사고가 얄팍해지고 있지. 신경과학자 수전 그린필드는 디지털 영상물들이 인간의 정신에 끼치는 부정적 영향에 대하여 이렇게 경고한 바 있어. "인터넷이 촉진시키는 정신의 변화는 뇌를 유아적인 양식으로 작용하도록 비틀고, 우리 모두를 자폐적이 되도록 압박하는 세계를 창출함으로써, 인류에 대한 그 가공할 위험성은 종에 대한 위협인 변화와 비교할 만하다.”현대인은 정보를 선별하고 처리하는 능력은 높아졌지만 삶에 대해 사색하고 성찰하는 능력은 점점 퇴화되고 있어. 긴 문장을 읽는 인내력도 많이 떨어졌다.


넓고 깊은 사유는 독서만이 가능하다. 독서를 통해 얻은 문해력은 높은 창조적 사고력을 갖게 해 주지. <책 읽는 뇌>의 저자 매리언 울프 교수는 "많이 읽어야 성공한다"라고 말했어. 책을 읽으면 후두엽, 측두엽, 전두엽이 서로 상호작용하여 머리를 좋게 만든다. 신경 가소성은 뇌가 환경과 상호작용을 통해서 스스로 변화해 가는 능력을 말한다. 독서는 뇌의 수많은 부위가 참여하기 때문에 신경 가소성의 발달을 촉진하는 가장 효율적인 행동이야. 독서는 새로운 뉴런들을 생성 및 연결을 증가하고 그 연결을 더욱 강화하여 방대한 기능적 연결망을 형성하지. 독서는 네가 하는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 매리언 울프는 “작가의 지혜가 끝나는 곳에서, 우리의 지혜가 시작된다.”라고 말했다. 독서는 뇌 구조의 기능을 변화, 발달시켜 인생의 지혜를 얻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 프란츠 카프카가 친구 오스카 폴락에게 보낸 편지에 적힌 문장이다. 아빠도 사랑하는 딸에게 편지를 보낸다. 아빠의 편지가 네 사유의 바다를 건너는 노가 되고 얼어붙은 바다는 깨는 도끼의 손잡이라도 되길 바란다.


“아빠, 인생이 뭔가요?” 네가 이런 질문을 한다면 아빠는 이렇게 답을 할 것이다. “인생은 이야기이다.”

 

인생이 이야기인 이유를 말하기에 앞서 우선 뇌의 인식 작용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볼게. 움직이는 모든 생물은 뇌를 가지고 있다. 뇌는 생존하기 위해 세상을 왜곡한다. 뇌는 세상을 정확하게 파악하기보다는 생존과 번식에 유리하도록 세상을 적절히 왜곡해서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뇌가 세상을 왜곡한다는 것은 신체의 감각기관을 통해 전달받은 정보에 나름의 의미부여를 한다는 뜻이야. 이러한 의미부여가 언어를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스토리텔링이며 이것이 뇌에서 이루어지는 의식작용의 핵심이다. 즉 뇌는 스토리텔링 머신이라 할 수 있어. 이 세계를 1인칭 관점에서 하나의 이야기로 재해석한다. 이야기는 나와 세계를 연결하는 도구이다.

 

우리가 인식하는 세상은 있는 그대로의 실체가 아니라 뇌가 만들어낸 모습이야. 많은 뇌과학자들이 개인적인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고 다른 사람에게 말할 만한 이야기로 계속 만들어내는 과정을 '의식'이라고 한다. 삶의 본질은 이야기라는 의미이다. 자아는 이야기를 통해 자기 자신을 구성한다. 즉 ‘나’라는 것은 내가 느끼고 경험하는 모든 것은 스토리텔링의 결과이다.

 

우리가 실체라고 인식하는 시간과 공간은 뇌의 스토리텔링 시스템에 의해 생산된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학자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어. 시간과 공간이 먼저 존재하고 그 안에서 스토리텔링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스토리텔링이 인과관계를 만들고 이 관계가 시공간의 개념을 만들어냈다는 것이지. 인간의 의식이 없다면 우주에는 시간도 공간도 없다는 뜻이다.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의 저자 카를로 로벨리는 현재하는 것은 인간이 작은 시간적 간격들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갖게 되는 단정이라고 말한다. “흐르는 시간이라는 인상은 오직 거시적 규모에서만 유효한 근사치일 뿐입니다. 이는 우리가 세계를 대충 지각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것이죠.” 볼츠만도 비슷한 주장을 했어. "엔트로피가 존재하는 이유는 우리가 세상을 희미하게 설명하기 때문이다." 로벨리는 세계를 담는 공간도 없으며 사건들이 발생하는 시간도 없다고 말한다. 공간의 양자들과 물질들이 서로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관계만이 존재한다. 우리를 둘러싼 시간과 공간은 이런 관계들이 무리 지어 있는 것을 멀리서 흐릿하게 보고 있는 결과라는 것이다. 결국 물리학의 시간과 공간은 세상에 대한 우리 무지의 표현이다. 그는 책을 통해 “관계만이 존재할 뿐 그 어떤 실재도 없다. 사물이 있어서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관계가 사물의 개념을 낳는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세상은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라 사실들의 총체’라고 말했는지도 모르겠다. 


만들어진(?) 시간과 공간에서 나는 무엇을 향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이것이 이야기의 본질이다. 뇌과학자 마이클 가자니가는 좌뇌에는 여러 가지 정보를 통합해 그럴듯한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내는 일종의 해설가가 있다고 한다. 이 해설가 덕분에 우리는 하나의 자아를 유지한 채 살아간다는 것이다. 인생의 의미는 우리의 희로애락에 대해 좌뇌가 어떤 스토리텔링을 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인생이 달라지고 싶다면 이야기를 바꾸어야 한다. 이야기를 바꾸려면 나의 언어를 바꾸어야 한다. 세상은 언어로 구성되기 때문이야.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했지. 위대한 이야기를 남긴 위인들은 위대한 언어를 가진 사람들이야. 자신만의 언어를 창조할 수 있으면 세계를 나의 방식으로 재구성하고 독창적인 이야기를 만들 수 있어.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이다.”라고 말했다. 내가 가진 언어의 총량만큼 세상은 이해되고 해석된다. 내 이야기의 한계와 위기는 내 언어를 한계를 극복해야 넘을 수 있어. 나의 언어가 없으면 타인에게 남의 언어를 빌려와야 한다. 그러면 나의 주체성은 사라지고 남의 이야기에 기생하는 엑스트라가 될 뿐이야. 나의 세상이 어둡다면 나의 언어가 빈약한 것이다. 언어는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니까. 


나는 곧 나의 언어이다. 자아는 이야기 덩어리이다. 자아는 내가 나에게 한 이야기의 무더기이다. 인생은 나의 언어로 내가 주어인 삶이다. 너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것인가? 네 인생의 작가가 될 것인가? 남의 이야기에 지나가는 엑스트라가 될 것인가? 이것이 인생은 무엇인가에 대한 아빠의 답이다.

 

어떤 주제로 이야기를 쓸 것인지는 너의 몫이야. 철학이 필요한 이유 중의 또 하나는 철학이 나의 이야기의 제목과 주제를 정해주기 때문이지. 너의 주제는 네가 정하겠지만 아빠가 조언한다면 너만의 이야기보다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기를 바란다.

 

모든 사람은 행복을 위하여 산다. ‘행복’ 편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나만 행복하다고 행복한 세상이 되지 않는다. 개인만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해. 현대 사회에서는 행복도 상품이 되어 경쟁의 대상이 되었다. 자본주의는 의자 놀이와 같아서 나의 의자를 차지해야만 행복을 가질 수 있어. 의자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고 낙오되면 끝없는 절망에 빠진다. 비록 의자를 차지했다 하더라도 의자를 뺏기지 않기 위해 혹은 더 좋은 의자를 차지하기 위해 끝없는 투쟁에 빠지게 된다. 그럼으로써 항상 불안한 상태가 된다.

 

우선 현재 우리의 행복이 어떤 토대 위에서 자라고 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자본주의가 인간을 병들게 한다고 주장했어. 인류는 과거보다 물질적으로 훨씬 풍요로워졌지만 오히려 더 불행해졌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수많은 정의가 있겠지만 쉽게 말하자면 공장의 탄생으로 인한 ‘상품의 대량 생산’이야. 대량으로 생산된 상품은 팔려야만 하니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소비가 미덕이라 강조한다. 자본주의에서는 소비와 노동만을 강조한다. 즉 소비하는 노동자만을 원하지. 소비를 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고 자본주의사회는 돈이 지배하는 사회이다. 돈이 모든 것을 결정하며 모든 사람은 경주마처럼 돈을 향해 달려간다.


프롬은 “탐욕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자본주의 제도가 강요하는 병적인 욕망일 뿐”이라고 말했어. 과도한 소유나 과시적 소비는 인간 본성과 상관이 없으며 불안한 사회가 강요한 병리 현상이라는 것이지. 불안하기 때문에, 타인에게 존중받지 못할까 봐, 경쟁에 뒤처질까 봐 소비에 집착하게 된다. 모두가 행복하기 위해 부자가 되길 원하고 명예를 얻길 원하지만 무의적인 목표는 불안을 방어하는 것이다. 부자들도 불안하기 때문에 더 돈에 집착한다. 현대인은 원자화, 파편화되어 있어서 무력하며 비판적 사고 능력도 떨어져 있다. 그 결과 세계란 무엇인지 나는 누구이고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한 채 끝없이 방황한다. 즉 자본주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엑스트라로 전락하고 말았다. 


프롬은 불안한 사회에서 개인의 고립감은 연대를 통해서만 극복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개인은 공동체 안에서 이웃을 사랑하면서 살아야만 고립감에서 벗어날 수 있고 연대를 통해 자연과 사회를 개조해 나가야 무력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했어. 이웃들과 연대하여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활동만이 삶의 의미를 찾고 고립감과 무력감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생산적인 일이란, 단순히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세상에게 도움이 도는 것을 의미한다.

 

프롬은 병든 사회가 사랑의 능력을 박탈한다고 말한다. 병든 사회는 현대인을 권위적이고 대세 추정적이며 쾌락과 시장 지향적 인간으로 변질시켰고, 우리는 사랑의 능력을 잃어버렸다. 프롬은 자본의 노예가 아닌 자유롭고 독립적인 사람이 됨으로써 사랑의 능력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어. 사랑의 철학자로 불린 프롬은 현대인이 무력감과 고립감에서 벗어나려면 사랑을 통해 세계와 연결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인류를 종말에서 구원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개인들의 사랑과 창조적 노동으로 사회를 변혁하는 것이다. 사랑에 기반한 연대만이 가능하다. 모래로 집을 지을 수 없다. 그래서 개인이 아닌 연대가 필요한 이유이다. 함께 모여 사회를 위해 함께 일하고 함께 노는 인간이 행복하다. 


영화 흥부전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꿈꾸는 자들이 모이면 세상이 달라지지 않겠는가” 나는 이 대사를 이렇게 바꿔보고 싶다. “꿈꾸는 자들의 글이 모이면 세상이 달라지지 않겠는가” 인간의 생각은 글을 통해 완성된다. 진보된 생각이 글이 되어 퍼지면서 세상은 변화되었지. 예수의 죽음 이후 제자들은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도피하는 와중에도 글을 썼다. 마르코, 루가, 마테오, 요한의 글은 복음서가 되어 인류 정신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독재자들은 늘 글을 쓰는 사람들을 경계했고 탄압했어. 하지만 글을 쓰고자 하는 자유를 억누르지는 못했지. 감옥에 갇힌 많은 사람들이 글을 썼다. 바울이 감옥에서 쓴 네 편의 편지는 현재 성경에도 수록되어 있다. 그람시, 신영복, 오스카 와일드, 박노해, 안중근, 마르코 폴로, 세르반테스 등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서도 글을 썼다. 다산 정약용은 18년 유배 생활동안 약 500권의 책을 저술했다. 도스토예프스키, 솔제니친, 빅터 프랭클은 그 끔찍한 수용소 안에서도 글을 썼다.


전신마비가 되어 육체의 감옥에 갇힌 사람도 글을 썼다. 프랑스 패션 잡지 엘르의 편집장 장 도미니크 보비는 43세에 뇌출혈로 쓰러졌다. 아들과 함께 연극을 보러 차를 운전하며 가던 도중 정신을 잃고 만다. 장 보비는 쓰러진 후 3주 만에 깨어나기 했지만 잠금 증후군을 앓게 된다. 잠금 증후군은 뇌간이 손상되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마비되어 환자가 자신의 몸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장 보비는 오로지 왼쪽 눈꺼풀만 움직일 수 있었다. 이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언어치료사 앙리에트 뒤랑은 그가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왼쪽 눈을 이용해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도와준다. 프랑스에서 자주 사용하는 빈도에 따라 배열한 철자 차트를 이용하여 그가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수 있도록 새로운 방법 제시한다. 장 보비가 하고 싶은 말을 생각하게 한 뒤 사용 빈도수가 높은 철자를 순서대로 읽어주다가 원하는 글자가 나오면 눈을 깜박이는 방식이었다. 장 보비는 왼쪽 눈꺼풀을 움직여서 무엇을 하고 싶었을까? 그는 글을 썼다. 20만 번 이상 눈을 깜박여서 15개월 동안 글을 써서 책을 냈다. 그렇게 해서 ‘잠수종과 나비’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하였고 곧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자유를 구속당한 상태에서도 글을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글을 쓰는 동안은 자유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한 나의 정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육체는 억압할 수 있어도 정신까지는 억압할 수 없다. 글은 개인의 상처도 치유하는 힘이 있다. 글은 손으로 쓴다. 손으로 씀으로써 머리의 방해를 받지 않고 내면의 숨어있는 나 자신을 끌어올릴 수 있지. 상처는 외면하거나 억압한다고 해서 없어지지 않아. 상처와 마주해야 한다. 치유의 시작은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의 이야기처럼 인간은 누구나 발설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지 못하면 병이 된다. 나의 고통도 발설되어야 한다. 내면의 고통이 너무 오래 갇혀 있으면 부패한다. 부패된 상처는 나를 병들게 한다. 말하기 시작할 때 치유는 시작된다. 글쓰기는 내가 나에게 하는 대화이다. 글은 나의 고통을 발효하게 한다.


인간은 부조리를 발견하면 발설하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어. 이 욕망은 세상에 대한 저항이자 고발인 것이다. 개인도 자신에 대해 발설의 욕망을 느낀다. 가면 뒤에 숨어있는 나를 고발한다. 순진한 척, 고귀한 척, 용감한 척, 착한 척, 대범한 척, 강한 척한 나를 고해한다. 글쓰기가 나를 치유하는 이유는 글을 쓰는 동안 뇌가 변화되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동안 발생하는 언어의 논리적인 과정이 우리의 감정과 번뇌를 정리한다. 우리의 감정은 숨어있기 때문에 두렵다. 언어화를 통해 우리의 감정을 직면하며 대화할 수 있게 된다. 막연한 공포는 대면하면 힘을 잃게 된다. 우리 내면의 편견, 나약함, 비겁함, 상처, 두려움이 글을 쓰는 동안 조금씩 치유된다. 누군가 미켈란젤로에게 어떻게 멋진 조각상을 만들 수 있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나는 조각을 하는 게 아닙니다. 이 거대한 석회덩어리 안에 이미 있던 영혼을 끄집어낼 뿐입니다.” 글쓰기는 조각과 같다. 열심히 깍다 보면 나의 영혼을 발견할 수 있다.

 

무의식을 글로 옮기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냥 쓰는 것이야. 잘 쓸 생각하지 말고 솔직하게 계속 무언가를 쓴다. 손을 부지런히 움직여서 쓰면 분석적이고 이성적인 좌뇌가 일하게 된다. 글을 쓰면 머리는 그 상황에 맞는 이야기를 만든다. 이를 성찰이라 부른다. 그리고 통찰로 이어진다.

 

아빠도 ‘딸에게 보내는 교양 편지’를 쓰면서 스스로 치유되고 있음을 느꼈다. 아빠는 태어나서 성인이 될 때까지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마음 한 켠에는 상처받아 늘 울고 있는 한 어린아이가 있었다. 글을 쓰면서 평소에 나도 몰랐던, 아니 외면했던 나의 어린아이를 만날 수 있었다. 글을 통해 내가 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내가 나에게 질문을 하고 글을 쓰면서 그 답을 조금씩 찾을 수 있었다.


글쓰기는 늘 두렵다. 나보다 더 잘 쓰고 더 많이 아는 사람들이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쓰는 글을 즐겁다. 옛날에 네 엄마에게 썼던 연애 편지처럼 말이야. 사랑하는 너에게 글을 쓴다. 교양에 대한 책을 쓸 자격은 없을수도 있지만 딸에게 편지를 쓸 자격은 내가 1순위이다. 내 딸을 가장 많이 사랑하는 자는 나이므로.


1권에서는 주로 심리학에 대한 주제를 많이 다루었어. 심리학은 마음의 매뉴얼이라 할 수 있다. 일단 마음이 튼튼해야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고 세상의 풍파를 견딜 수 있다. 아빠가 살아보니 돈보다는 튼튼한 마음이 기둥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2권에서는 좀 더 다양한 주제로 폭을 넓혀서 이야기해 보겠다.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병든 사회가 병든 인간을 만든다. 엄마 아빠도 상처받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 상처를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상처받은 사람들이다. 살아보니 움직이며 산다는 것은 에너지를 다른 존재로부터 가져와야 하는 일이며 이는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을 수 없는 일임을 깨달았다. 이 세상은 이렇게 모두가 상처의 사슬로 연결되어 있다. 이제는 그 사슬을 끊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돈을 쟁취하는 이야기보다 우리의 행복을 일구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글을 쓴다는 것은 인간 최후의 자유다. 글을 씀으로써 세상의 부조리에 맞설 수 있다. 글쓰기를 연결하면 세상은 분명 바뀔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는 이미 물질의 풍요를 이루었다. 이제 모두 자신만의 글을 심는다면 그 글은 우리 정신의 풍요로 돌아올 것이다.

 

사랑하게 되면 쓰게 된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글을 쓰다 보면 우리의 글은 연결될 수 있다. 체제가 중요한가? 사람이 모두 선하다면 자본주의도 천국이 될 수 있다. 죽어서 천국으로 갈 생각을 하지 말고 살아 있을 때 이 곳을 천국으로 만들어야 한다. 글쓰기는 공동체의 산물이다. 읽고 쓰는 것 모두 인간을 위한 것이다. 아빠가 말하는 교양은 '결국은 사랑'이다. 


이전 28화 공감의 팽창 (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